326화. 호수의 기억
데몬이 노리는 건 모든 존재의 땅이다… 라.
리아네의 말을 곱씹으며 턱을 문질렀다.
모든 존재엔 당연히 인간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데몬이 인간의 땅을 차지하려 한다는 건 다소 생소하게 들리는 이야기였다.
“백운 님껜 익숙한 이야기가 아니군요.”
리아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 입을 열었다.
“알려지지 않은 곳이 있을 가능성도 있지만, 당장 지구에서 데몬에게 빼앗겼다고 알려진 땅은 없거든요. 애초에 사람들은 데몬이 어떠한 목적성을 가지고 공격해오는 걸로 생각하지도 않고요.”
지금도 데몬은 끊임없이 모습을 나타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침략이 아닌 출몰의 개념이었다.
무언가 특정한 목적성이나 패턴을 가진 게 아닌, 그저 무작위적인 출몰.
그렇기에 데몬을 만나 목숨을 잃게 되면 사람들은 흔히 말했었다.
운이 없었다고 말이다.
“하지만 방향을 조금만 바꿔보면 충분히 목적을 가진 침략이 될 수도 있겠네요.”
데몬의 본능에 기본적으로 탐욕과 침략이 새겨져 있다면.
저마다의 작은 목적이 있을지언정 놈들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건 데몬 외 존재의 말살 및 정복이라고 봐야 했다.
종말의 날도 다시 떠올려 보면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대부분 땅을 빼앗긴 날이기도 했다.
데몬과의 싸움을 전쟁에 비유하자면 인간의 참패였고 말이다.
“뭐랄까. 옛날 전쟁 같은 정복 전쟁이라 생각하니까 느낌이 많이 다르네요.”
리아네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백운 님이 사는 세계가 무사하다는 건 다행스러운 일이네요. 자신이 살던 세계가 무너진다는 건 슬픈 일이니까요.”
리아네가 시선을 옮겨 뛰어놀고 있는 털뭉치들을 바라봤다.
“로로는 토게라고 불리는 정령족의 아이에요. 싸움이라곤 전혀 알지 못하고 살아온 평화로운 정령이죠. 그렇기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어요. 어느 날 정체불명의 균열과 함께 등장한 데몬 군대에게 모든 걸 빼앗기고 말았죠.”
친구와 천진난만하게 바둥거리고 있는 로로.
이야기를 듣고 나니 아까 뺨따구를 후려친 게 조금 미안하게 느껴졌다.
“토게족은 하루도 빠짐없이 달콤한 음식을 먹어온 정령이에요. 살던 공간엔 아주 달콤한 꿀과 열매가 가득했었거든요. 그런데 이곳은 그렇지 못하다 보니 틈만 나면 밖으로 나가 도둑질을 하기 시작했어요. 물론 다른 이의 물건을 훔치는 건 잘못된 일이라 항상 꾸짖고 있지만요.”
“가게를 털거나 할 정도로 대담하진 않아서 다행이네요. 절 털었을 때를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할 거 같은데요.”
“당연한 거 아닙니까!”
언제 온 건지 바로 아래로 다가온 로로가 입을 열었다.
당연한 소리를 한다는 듯한, 묘하게 킹 받는 표정을 한 채였다.
“가게를 계속 털면 얼마 안 가 망해버리고 말겁니다! 그럼 공급이 영영 끊길 테니 털고 싶어도 참는 겁니다! 오랫동안 달콤한 걸 먹기 위해서 말입니다!”
“….”
엉뚱한 곳에서 똑똑하고 약삭빠른 녀석이었다.
하도 당당히 말하길래 하마터면 한 대 더 쥐어박을 뻔했다.
계속 도둑질 하겠구만 이거.
달콤한 걸 이야기하면서도 침을 줄줄 흘리고 있는 로로.
리아네가 아무리 꾸짖어 봐야 로로는 얼마 안 가 2층짜리 빨간 버스를 끌고 또 밖으로 나갈 터였다.
“너 버스는 어떻게 한 거야? 네가 직접 만든 거야?”
갑자기 생각난 버스에 로로를 쳐다봤다.
나를 직접 치고 지나가진 않았으나 분명 생김새는 2층 빨간 버스였다.
“그거 말입니까!? 저겁니다!”
“응?”
로로가 가리킨 곳엔 작은 수레가 하나 서 있었다.
아무리 봐도 빨간 버스로는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토게족의 능력이에요. 동작 원리를 이해한 물체를 재현할 수 있죠. 아마 그 버스란 건 로로와 친구들이 모여 재현해낸 걸 테고요.”
대, 대단한데…?
쓸데없이 훌륭한 능력에 로로를 바라봤다.
리아네의 말을 칭찬으로 들은 건지 로로는 가슴을 쫙 펴고 늠름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밟으면 빨라진다! 돌리면 방향이 바뀐다! 완벽히 이해했습니다!”
난폭 운전의 이유 또한 알 것 같았다.
저 정도만 이해하고 만들어 운전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토게족은 전투 외적인 면에선 다재다능해요. 단거리 순간이동 등도 가능하고요.”
그래서 순식간에 사라진 거였구만.
괴상하고 작은 털뭉치 정도로 생각했었는데.
의외의 능력을 가진 로로였다.
“백운 님. 잠시 이쪽으로 오시겠어요?”
슬쩍슬쩍 로로의 뽀송한 털을 만지고 있는 사이.
자리에서 일어난 리아네가 호수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첨벙.
멈추지 않고 그대로 호수로 발을 디디는 리아네.
따라오라는 듯한 리아네의 손짓에 순간 함정인가 의심병이 돋았지만.
아무리 봐도 아닌 듯했기에 의심을 쑤셔 넣으며 호수로 걸음을 옮겼다.
엄청 시원하네.
발끝이 닿았을 뿐인데도 맑은 호수의 감각이 온몸을 감쌌다.
단순히 시원하다 아니다로 표현하긴 힘든 감각이었다.
시원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포근하고 따듯했다.
꼬로록.
완전히 물속으로 들어간 리아네에 나 역시 호수에 완전히 몸을 담갔다.
꼭 리아네가 아니더라도 머리끝까지 푹 담그고 싶을 정도로 기분 좋은 호수였다.
와.
물로 들어오며 주변이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그리고 눈앞으로 보이는 수천수만 개의 반짝임.
부서져 들어오는 달빛을 뭔지 알 수 없는 호수 속의 작은 입자들이 끊임없이 반사해내고 있었다.
“이곳이 제가 오랫동안 머물러 온 슈니아의 호수입니다.”
“어떻게 말을… 얼레.”
물속에서 어떻게 말하는 건지 물어보려고 했는데.
리아네만 가능한 게 아니었다.
“호흡을 한 번 해보실래요?”
잠시 망설이다 리아네의 말대로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홀리…!”
상쾌한 공기가 코를 통해 들어와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바깥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오히려 더 맑게 느껴지는 공기였다.
“흡하! 흡하!”
신기한 경험에 계속해서 코로 숨을 들이마셨다.
쉴 때마다 혹여나 물이 들어오지 않을까 조금 걱정되긴 했지만.
걱정과 달리 코로 들어오는 건 물이 아닌 상쾌한 공기뿐이었다.
“물에서 숨 쉬고 말하는 날이 오다니. 감사합니다. 리아네 님. 인간 최초가 아닐까 싶네요!”
특별한 경험을 선물해 준 리아네에게 고개를 꾸벅였다.
이 정도면 털뭉치들이 훔쳐갔던 디저트 값은 충분히 상쇄하고도 남았다.
“저한테 감사하실 필요는 없어요. 제가 한 게 아니니까요.”
“넵?”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에 되묻자.
말을 멈추고 조용히 바라보던 리아네가 천천히 내 쪽으로 다가왔다.
“…!?”
얼굴 바로 앞까지 다가와서야 움직임을 멈춘 리아네.
리아네는 조금 전과 달리 사뭇 진지해져 있었다.
“이 호수의 이름은 슈니아. 슈니아는 자격이 있는 자에게 호흡과 말이 가능해지도록 권한을 부여합니다.”
“자격요…?”
“제가 느낀 게 틀리지 않았군요.”
점점 더 아리송해지는 이야기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든가 말든가 그저 조용히 미소를 머금고 있는 리아네.
“!?”
무언가를 더 물으려는 순간 리아네의 이마가 내 이마로 포개어졌다.
그리곤 두 손을 내 머리로 가져댄 리아네가 조용히 두 눈을 감았다.
“지금부터 호수의 기억을 전해드릴게요.”
“가, 갑자기요?”
눈을 감은 리아네의 입가로 다시 한번 옅은 미소가 그려졌다.
“로로가 백운 님의 케이크를 훔친 것에 대한 보상… 정도로 해둘까요?”
딱히 보상받을 생각도 없었으나.
사뭇 진지한 분위기에 호다닥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됐든 받아서 나쁠 거 같진 않았다.
“기억을 받으셔도 당장 무언가가 떠오르고 하진 않을 거예요. 하지만 때가 되면 기억이 백운 님께 길을 보여 드릴 거예요.”
“기, 길요. 알겠습니다.”
이야기를 따라가는 건 내려놔야 할 것 같았다.
아까 말한 자격이란 건 뭔지, 호수의 기억은 뭐고 리아네가 말한 때는 언제이며 어디로 향하는 길을 보여준다는 건지 등 이해되는 게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나중 되면 알게 되겠지.
일단 나도 눈을 감으며 다음을 기다렸다.
“그럼 전달하겠습니다. 그리고 백운 님은.”
머리로 무언가 스며드는 청명한 기운과 함께.
“슈니아 호수의 두 번째 방문자이십니다.”
리아네가 말을 마쳤다.
* * *
짹짹짹짹!
리아네와 정령들이 있던 세계에서 빠져나오자 우렁찬 지저귐이 들려왔다.
하늘론 밝은 아침 햇살이 떠오르는 중이었고 말이다.
“으음…!”
호수 안에서 꽤 오랜 시간을 보낸 모양이었다.
느껴진 건 아주 찰나였던 거 같은데 말이다.
“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심각한 표정으로 턱을 슥슥 문질렀다.
리아네와 토게족을 만난 것까지는 전에 페샨을 만났던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는데.
호수 안으로 따라 들어간 후엔 너무 급속도로 전개되어 내가 뭘 하고 온 건지 여전히 아리송했다.
“뭔가 들어온 거 같긴 한데.”
리아네의 이마가 닿았던 부분을 슥슥 문질러 보았다.
분명 끊임없이 무언가 흘러들어왔었는데 당장 떠오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 이제 곧 문이 닫힐 거예요. 닫히면 일주일 뒤에나 열릴 거랍니다.
호수에서 빠져나와 기억에 관해 묻자 리아네는 묘한 미소와 함께 나가는 방향을 가리켰었다.
문이 주기적으로 열리니 오고 싶으면 언제든지 다시 오라는 말과 함께였다.
물론 다시 와도 기억이나 호수에 관해선 말해 줄 것 같지 않았지만 말이다.
“꿈을 꾼 느낌이네.”
그렇다고 모든 게 아링송한 건 아니었다.
리아네와 나눴던 대화 중 데몬에 관련되었던 건 머리 한복판에 선명히 자리 잡고 있었다.
“침략 전쟁의 연속이라.”
데몬의 등장에 관한 새로운 개념이었다.
이렇게 따지니 참 지긋지긋한 전쟁이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도 최소 수십 년간 끝나지 않을 전쟁이었다.
회귀 전 결말은 인간의 패배였고 말이다.
“흐음… 이대로 괜찮나.”
인간 입장에선 끝없는 공격을 그때마다 대응해 방어하는 처지였다.
당연히 공격당하는 입장이라 한 템포씩 늦고 피해가 누적될 수밖에 없었다.
“공격과 방어라.”
안 돌아가는 머리로 잠시 고뇌를 하다.
“에라이 모르겠다. 내가 인간 대표도 아니고.”
뜨거워지는 듯한 머리의 느낌에 어깨를 으쓱이며.
“일단은 무기 열심히 모으자.”
무지성 결말을 내린 후 시내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에?”
로로와 정령들이 당황한 얼굴로 리아네를 올려다봤다.
“호수의 기억을 주셨다고요…?”
다시 한번 되물으며 로로가 입을 쩍 벌렸다.
백운을 배웅하며 서 있던 리아네는 아무렇지도 않게 엄청난 말을 했었다.
딱 한 명에게만 전달할 수 있는 호수의 기억을 만난 지 몇 시간도 안 된 백운에게 건넸다는 것이었다.
“얼굴 마주한 지 하루도 안 됐는데!?”
그 기억이 뭔지는 로로를 포함한 다른 정령들 역시 몰랐으나.
리아네에게 익히 들었던 터라 기억이 몹시 중요하고 소중하다는 것만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기억을 오늘 만난 백운에게 홀라당 넘겨버렸으니 다른 정령들 입장에선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확실하거든요.”
백운이 나간 방향을 바라보는 리아네의 입가로.
확신 가득한 미소가 그려졌다.
“그가 기억의 주인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