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7화. 즉위식
구울 사태 이후 며칠이 지났을까.
짹짹짹짹짹---!
오늘도 우렁찬 지저귐을 들으며 눈을 떴다.
알람으로 시스템화된 건지 1분의 오차도 없이 지저귀는 참새들.
“으음.”
몸을 일으키며 커튼을 걷고 창문을 열어젖혔다.
“전혀 상쾌하지 않군.”
하루 이틀 자면 적응할 거 같았는데.
워낙 우렁차서 절대 적응이 불가능한 소리였다.
완전 초슈퍼 아침형 인간이 아니라면 말이다.
짹짹짹---!
“입 닥쳐! 조용히 좀 해! 모두가 아침형 인간인 건 아니란 말이야!”
나뭇가지에 나란히 앉아 있는 참새쉨들을 노려봤다.
옹기종기 모여 앉아 한마음으로 울어대는 녀석들.
쫑쫑쫑.
날 놀리려는 건지 좌우로 걸어대는 걸 보니 뭐랄까.
몹시 얄밉고 킹 받아 주먹이 우는 기분이었다.
“휴. 여기가 샤를 님의 저택이란 걸 다행히 여기라구.”
아니었다면 이미 참새 구이행이었음을 경고하며.
어제와 마찬가지로 별 소득 없이 창문을 닫았다.
그나마 조용해지는 소리에 한숨을 내쉬었다.
참새놈들 때문에 매일 전쟁 같은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지만.
이것도 이제 하루 이틀이면 끝이 날 터였다.
- 내일 즉위식이 열릴 거예요. 당연히 백운 님도 오셔야 하고요.
몇 시간 뒤면 오랜만에 휴식도 할겸 기다리고 있던 즉위식이 열릴 예정이었다.
“즉위식이라.”
기다리고 있을 땐 별생각이 안 들었는데.
막상 오늘이라고 생각하니 등 뒤로 땀이 흘렀다.
내, 내가 가도 되는 건가 이거.
매년 열리는 연례행사 같은 게 아니었다.
왕위가 넘어갈 때만 필요하니 개방의 등장 이전에도 보통 수십 년에 한 번씩 열리던 행사였다.
그런 행사에 웬 듣보잡 외국인이 끼는 것이었고 말이다.
대체 난 가서 뭘 하는 거지. 꽃이라도 뿌리는 건가.
그곳에서 내 역할이 무엇인지는 아직도 오리무중이었다.
몇 번이나 물어봤지만 샤를은 보안상 비밀이라고 답을 해주지 않았었다.
-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세계로 동시 송출되는 만큼 대놓고 내 모습이 나가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샤를은 말했었다.
이미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내가 무기왕임을 알고 있지만, 아직까진 모르는 사람이 훨씬 많은 상태.
내가 이를 걱정할거라 생각한 건지 미리 알려 준 것이었다.
으음.
사실 방송에 나가는 건 그다지 걱정하지도 않았었다.
지난번 사신 사건 때만 봐도 런던 사람들은 알아서 내 정체를 숨겨주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줬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번에도 알아서 해줄 거라 믿고 있었다.
내 걱정은 따로 있었다.
꼴깍!
내, 내가 즉위식 조지면 어떡하지.
늦은 새벽까지 영국의 법도에 관해 폭풍 검색을 했었다.
하면 할수록 지식은 늘었지만 자신감은 반비례할 정도로 복잡했던 왕실의 법도.
뭐가 그렇게 많은지 도저히 외울 수가 없었기에 운명에 맡기기로 무지성 결론을 내렸었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고 이젠 친근해진 레차도가 방으로 들어왔다.
“안녕히 주무… 못 주무신 거 같군요!”
힘차게 아침 인사를 건네던 레차도가 의아한 표정을 짓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그럴 만도 했다.
레차도는 슈퍼 아침형 인간이라 몇 시간 전부터 일어나 준비했을 텐데 눈앞의 인간은 뒷머리에 새집을 만들어 놓은 건 물론 여전히 반바지 바람으로 돌아다니고 있으니.
한심함과 함께 실소가 터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레차도 님. 정말 괜찮을까요?”
“예? 무슨 말씀이신지….?”
“저 따위가 즉위식에 가도 괜찮을까요! 예라는 건 밥 말아 먹은 지 오래된 사람인 제가!”
“허허허허허!”
다시 한번 큰 웃음을 터뜨린 레차도가 손을 내저었다.
“상세한 예를 모르셔도 상관없습니다. 샤를 님의 즉위식에 가시는 거라면 문제가 됐겠지만요.”
“넵? 그건 또 무슨?”
“가보시면 아실 수 있습니다! 이 레차도가 감히 장담하는데 아무 문제 없을 겁니다! 물론.”
조심스럽게 손을 든 레차도가 내 머리와 옷을 가리켰다.
“머리를 감고 제가 드린 옷으로 깔끔하게 갈아입어 주신다면요. 그건 해주실 거라고 믿습니다.”
장난스레 말하는 레차도에 손을 휘휘 내저었다.
“에이. 레차도 님도 참. 아무리 그래도 제가 그 정도 인간은 아니에요!”
“….”
장난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지금까지 내 츄리닝과 삼선 쓰레빠 만행을 봐서인지 사뭇 진지한 레차도.
그런 레차도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호다닥 욕실로 몸을 옮겼다.
“아참! 그리고 오늘 아침에 다녀오니 말씀하신 대로 사라져 있었습니다.”
“오?!”
샴푸로 머리를 조지던 중 고개를 휙 돌렸다.
“말씀하신 대로 아주 충분한 양을 가져다 놨는데도 깔끔하게 사라져 있더군요.”
호수의 세계에서 나온 직후.
저택으로 돌아온 난 레차도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었다.
비용은 내가 지불할 테니 런던의 유명 가게들이 일주일마다 공원 앞으로 케이크 등 달콤한 디저트를 가져다주게 해줄 수 있는지였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사이 쌓인 후원금이 많았기에 과감히 지른 것이었다.
- 허허허허! 비용은 무슨! 제게 맡겨주십시오!
레차도는 움직이지도 않은 채 어딘가로 전화를 한 통 걸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해결됐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내게 말했었다.
배달이 잘 이루어지는지는 매주 자신이 직접 확인하겠으며 비용 역시 왕실 측에서 모두 대겠다는 말도 함께였다.
그리고 오늘이 첫 배달 날이었다.
“가보니 커다란 잎사귀 하나가 놓여 있었습니다. 그 위론 뭐로 적었는지 모르겠는 글이 남겨져 있었고요. 머리 감느라 바쁘시니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등 뒤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가 싶더니 곧이어 레차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당신은 토게족의 영웅입니다! 그리고 명실상부한 기억의 주인이십니다!!! 라고 느낌표가 무지막지하게 붙어 있군요. 마지막엔 로로가 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고요.”
“오… 쪽지까지!”
신나게 디저트를 먹고 있을 로로와 토게족을 떠올렸다.
당장 어딘지도 모를 땅을 되찾아 주진 못해도 달콤한 디저트 정도는 마음껏 먹여주고 싶어 한 일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레차도가 한결 따듯해진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또 어딘가에 도움을 주고 오신 모양이군요.”
“하하…. 그냥 스윽 들어갔다 나왔을 뿐이에요.”
뺨 한 대 때렸고요.
멋쩍은 기분에 뒷머리를 긁적이는 사이.
짝!
우렁찬 손뼉 소리가 들려왔다.
“자! 그럼 얼른얼른 준비하도록 하죠! 이 레차도가 바로 옆에서 끝까지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왠지 모르게 의욕 넘치는 레차도의 목소리에.
“네, 넵!”
나 역시 큰 소리로 대답하며 샴푸질에 속도를 올렸다.
* * *
즉위식이 열릴 세인트 제임스 궁.
와 사람 겁나 많네.
시작 전부터 우글대는 인파에 혀가 내둘러졌다.
성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건 소수임에도 이런 숫자라니.
바깥엔 얼마나 많은 사람과 기자가 있을지 쉽게 가늠이 되지 않았다.
레, 레차도 님 어디 갔어!
놀이공원에서 엄마 손을 놓쳐버린 애마냥 주변을 휙휙 둘러봤다.
날 이곳에 던져 놓은 후 레차도는 바람처럼 사라졌었다.
“어! 설마…?”
적응되지 않는 분위기에 눈을 이리저리 돌리던 중.
아는 얼굴의 발견에 방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안녕하세요! 에밀리아 님. 이사벨 님. 오늘따라 더 반갑네요.”
“안녕하세… 요.”
눈동자를 크게 키운 두 사람이 날 위아래로 훑어봤다.
“거짓말. 백운 님 아니죠.”
“마, 맞는데요.”
츄리닝에 삼선 쓰레빠의 인상이 너무 강렬했던 탓일까.
두 사람 모두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내젓고 있었다.
“말끔한 턱시도에 반짝이는 구두, 거기다 깔끔하게 넘겨 고정시킨 머리라니…! 와우!”
리액션 좋은 이사벨이 내 주변을 빙빙 돌아댔다.
내가 씻고 나오자 바쁘게 손을 움직인 레차도의 작품이었다.
“잘 어울려요. 정말로요.”
감탄한 듯이 말하는 에밀리아에 머리를 긁적였다.
살면서 거의 처음 입어보는 턱시도였는데 잘 어울린다 해주니 감사할 따름이었다.
“앞으로도 자주 입으세요. 백운 님! 뭘 입어도 잘 어울리실 테니까요!”
“가, 감사합니다!”
물론 자주 입을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아마 오늘이 지나면 다시 편안한 츄리닝 차림으로 회귀할 테니까.
“두 분도 정말 잘 어울리네요. 오늘부로 소속이 변경되는 거죠?”
에밀리아와 이사벨이 쑥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새롭게 왕이 된 샤를의 부름으로 왕실 직속 호위대에 속하게 된 에밀리아와 이사벨.
지난번 샤를을 지키지 못했다는 생각에 에밀리아는 이 부탁을 거절했었지만.
- 왕명이에요. 전 제가 가장 신뢰하고 좋아하는 친구가 곁에서 절 지켜주길 원해요.
완강한 샤를의 말에 에밀리아는 두 번 다시 지난번과 같은 상황을 만들지 않겠다고 맹세하며 호위대장 자리를 수락했다고 전해 들었었다.
“에밀리아 님! 이사벨 님! 이쪽으로 와주세요! 이제 곧 즉위식이 시작될 겁니다!”
“아 네! 백운 님. 그럼 조금 있다 뵈요!”
“네. 파이팅!”
엄지를 치켜세우며 멀어지는 에밀리아와 이사벨을 바라봤다.
나, 난 어떡해!
다시 혼자가 된 상황.
어디 구석에라도 가서 짜져 있어야겠다 싶은 순간.
“안녕하십니까. 백운 님.”
“!?”
딱 봐도 지위가 높아 보이는 할아버지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
“왕실의 죠셉이라고 합니다. 저와 함께 가시죠.”
* * *
몇 시간 후.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진 즉위식이 끝이 났다.
앉아있기만 해도 불편하구만.
나름 절도있게 박수치며 주변을 둘러봤다.
의자가 무척 푹신한 VIP석이지만, 주변이 온통 딱 봐도 높아 보이는 사람들뿐이라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다 왕실에 속한 분들인가.
영국의 총리 등 정부에서 높은 이들은 다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내 주변에 앉은 건 하나같이 커다란 왕실 마크를 새긴 사람들이었다.
단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가 꽤 나이가 지긋이 든 분들이었고 말이다.
포도 먹고 싶다.
눈앞에 놓인 포도를 바라봤다.
아까부터 하나 집어먹고 싶었는데 엄숙한 분위기에 쉽사리 손이 뻗어지지 않았다.
저벅.
지금이라도 먹을까 말까 고민하고 있을 때.
새롭게 왕이 된 샤를이 내 쪽으로 걸어왔다.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람들.
나도 따라서 일어나려는 순간 아까 날 안내했던 죠셉이 어깨에 손을 올렸다.
“백운 님은 앉아 계셔도 됩니다.”
“!?”
의아했으나 일단 시키는 대로 해야겠다 싶어 앉아있자.
바로 앞까지 다가온 샤를이 미소를 지으며 날 바라봤다.
“백운 님께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다고 말씀드렸었죠.”
샤를이 손등을 위로 해 내게 손을 뻗어왔다.
어디서 본 건 있어 엉겁결에 뻗어진 손을 잡자 말을 잇는 샤를.
“부디 제 첫 번째 기사가 되어 주세요. 그리고.”
스르륵.
“!?”
현재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
주변에 있던 모든 이와 함께 샤를이 천천히 몸을 숙이며 내 손에 이마를 기대었다.
“백운 님께서 기사의 왕이 되어 주셨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