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8화. 기사의 왕
넵?
뇌의 사고가 정지되는 기분이었다.
새롭게 왕이 된 샤를의 첫 번째 기사.
이것만으로도 잠시 벙쪄 있던 상태인데 갑자기 기사의 왕이라니.
일단 이 자리가 뭔지 모르는 걸 넘어 모두가 내 앞에 무릎 꿇고 있는 현 상황이 몹시 낯설었다.
무, 무릎 괜찮으신가.
나이가 꽤 많으신데 똑같이 몸을 숙이고 있는 죠셉.
사고가 정지된 탓인지 엄한 것만 걱정되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제안이라 당황스러우실 거란 건 알고 있어요. 하지만 아주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온 규칙이라 미리 말씀드릴 수가 없었어요.”
“일단 일어나신 후에 이야기를…!”
여간 마음이 불편한 게 아니었기에 말하자.
샤를이 묘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가로저었다.
“백운 님의 결정이 있기 전까지는 아무도 일어날 수 없어요.”
홀리!
내가 일어나달라고 해서 될 게 아닌 분위기였다.
아무래도 현재 상황 또한 오래 전부터 전해져 내려온 예우인 모양.
뭐가 됐든 내가 빨리 결정을 내려야만 모두가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급하게 결정하실 필요는 없어요. 결정하는 건 어디까지나 백운 님이니까요.”
어떻게 안 급해!
라고 외치고 싶었다.
착각일 수도 있지만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죠셉의 몸은 약간 후들거리고 있었다.
내가 결정을 조금만 더 늦추면 정말 큰일이 날 것 같았다.
기사의 왕이라.
눈을 감은 채 다시 한번 곱씹어 보았다.
기사란 존재는 영국 밖에서도 드물지 않게 접할 수 있었다.
당장 얼마 전까지 함께 했던 에밀리아도 기사였고 말이다.
하지만 기사의 왕이란 자리는 살아생전 처음 접하는 것이었다.
“자격이 있는 자가 나타난다면 나의 이명을 물려주도록 하라.”
“…?”
조용히 대답을 기다리던 샤를이 입을 열었다.
내게 말을 건네기보단 전해져 내려오는 무언가를 읊는 느낌이었다.
“이름을 가진 자는 자격을 갖추게 될 것이다.”
여기까지 말한 샤를이 날 올려다봤다.
“최초의 기사왕. 아서 펜드래곤이 남긴 말이에요.”
“!!”
샤를이 말한 이름에 나도 모르게 헛숨이 들이켜졌다.
귀가 막힌 게 아니라면 조금 전 들은 이름은 엑스칼리버의 주인, 아서왕의 이름이었다.
“아서 펜드래곤의 이명은 기사의 왕. 아서왕은 이 이명이 자격을 갖춘 사람에게 전해지길 원했어요. 그리고 이명을 전할 수 있는 권한을 왕실의 왕에게 부여했죠.”
조용히 샤를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아서왕 외의 누군가가 기사의 왕 자리에 오른 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어요.”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간단한 이유였어요. 역대 왕들이 판단하기에 기사의 왕좌에 오를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이가 없었거든요. 덕분에 기사의 왕 자리는 아서왕 이후로 쭉 공석이었고요.”
홀리 슅…! 아서왕 바로 다음 대의 왕좌라고.
부담은 둘째 치고 가슴이 벅차올랐다.
아서왕 이후로 아무도 오르지 못했던 왕좌에 앉아 달라 샤를은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 말인즉슨 새롭게 왕에 오른 샤를이 날 자격을 갖춘 적합자로 판단했다는 것이고 말이다.
“왕좌에 오르셔도 백운 님이 무언가를 하셔야 하거나 앞으로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그저 왕좌에 오르신 것뿐이죠. 기사의 왕이 됐다고 앞으로의 행동에 부담을 가지실 필요도 없어요. 판단하고 선택한 건 저니까요.”
“전에도 보셨다시피 제가 좀 경우가 없고 종종 냅다 도망치고 할 때도 있는데 괜찮을까요.”
샤를의 얼굴로 밝은 미소가 그려졌다.
“전 지금의 백운 님을 보고 자리에 적합하다 판단한 거예요. 당연히 모든 면을 봤고요. 그렇기에 백운 님이 왕좌에 오르신다고 달라지는 걸 원치 않습니다.”
여기까지 듣자 당장 네! 라고 소리 지르고 싶었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지만 아서왕의 왕좌라니.
당장은 확실하지 않지만 분명 이후 아서왕과 관련된 무기를 찾을 때도 도움이 될 터였다.
“다시 한번 간곡히 부탁 드리겠습니다. 백운 님.”
사뭇 진지한 표정을 한 샤를이 만연한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부디 기사의 왕이 되어 주세요.”
더 이상 망설일 필요는 없었기에.
샤를을 향해 미소 지으며.
스윽.
내밀어진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 * *
슬쩍슬쩍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어두운 공간을 밝히고 있는 몇 개의 등불.
양옆으론 아까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저마다 검 하나씩을 들고 도열해 있었다.
팔 괜찮으신가.
바로 옆에 있는 죠셉을 힐끔거렸다.
동의한다는 의미로 샤를의 손등에 입을 맞추자 그제야 숙이고 있던 이들이 몸을 일으켰었다.
모두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지만 죠셉의 무릎은 분명 미세하게 후들거렸었다.
조, 조금만 버티세요!
이젠 검에 혹사당하는 죠셉의 팔을 응원하며 정면으로 고개를 고정했다.
앞에선 샤를이 커다란 검 하나를 들고 천천히 날 인도하고 있었다.
궁 아래에 이런 공간이 있을 줄은.
비밀 요새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몸을 일으키기 무섭게 샤를은 날 어딘가로 이끌었었다.
그곳은 궁의 지하였고 굳게 닫힌 문으론 딱 봐도 복잡한 술식이 잔뜩 얽혀있었다.
- 자격이 갖춘 자가 도달했으니.
샤를과 죠셉은 물론 자리에 있던 모든 이가 술식 해제를 하기 시작했었다.
한참을 해제하고 나서야 문이 열리며 지금의 공간이 드러났고 말이다.
지금은 입 열면 안 되겠지.
물어보면 대답이야 해주겠지만.
공간으로 들어서자 한층 더 경건해진 분위기에 입도 뻥긋하지 않고 조용히 따라가는 중이었다.
샤를 역시 이곳에 직접 들어오는 건 처음이라 그런지 약간 긴장한 듯한 모습이었다.
“도착했어요.”
아치 형태의 문을 지나 도착한 공간.
공간은 드문드문 등불이 있었던 길과 달리 몹시 어두웠다.
바로 옆에 서 있던 죠셉의 얼굴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빛이여. 새로운 왕을 비추소서.”
샤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화아아악…!
공간 중앙을 기점으로 황금색 빛이 번져나갔다.
불이 밝혀졌다거나 등이 켜진 건 아니었다.
그저 알 수 없는 빛이 공간을 가득 채운 느낌이었다.
와우.
정면에 잘 고정하고 있어야지 했던 고개가 좌우로 돌아갔다.
거대한 공간은 원형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각 벽면엔 저마다 다른 모습을 한 기사들이 조각으로 새겨져 있었고 말이다.
원탁의 기사인가.
그리고 조각상의 정중앙, 정확히는 공간의 정중앙으로 거대한 양손검을 쥔 기사의 조각이 새겨져 있었다.
땅에 디딘 양손검 위로 두 손을 얹고 있는 조각상.
검날의 끝으론 수많은 검이 꽂힌 왕좌가 놓여 있었다.
와, 왕좌!
마른침이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나무 의자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어도 왕좌란 생각에 긴장됐을 텐데.
수많은 검으로 이루어진 왕좌는 그야말로 멋짐 수치 대폭발이었다.
멋짐을 미터기로 측정할 수 있다면 이미 하늘 높이 승천할 수준.
내가 저기에 앉는다고?
여전히 와 닿지 않는 현실감에 심호흡하는 사이.
샤를과 행렬이 왕좌를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나 역시 뒤처질 세라 호다닥 발을 내디뎠다.
보랏빛 같은 건 없네.
아쉽거나 한 건 아니었다.
단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위를 둘러봤었다.
뜬금없이 보랏빛이나 황금빛이 뿜어지는 건 아닐까 하고 말이다.
너, 너무 도둑놈 심보였나.
스스로 선 넘네라고 생각하며 걷길 잠시.
먼저 왕좌 앞에 도착한 샤를이 들고 있던 검을 내려놓았다.
우우웅…!
그러자 미세한 진동과 함께 빛을 뿜어내기 시작한 검.
왕좌 앞에서 뿜어진 빛은 정확히 내 발 앞까지를 비추고 있었다.
마치 이 빛을 따라 걸어오라는 듯 길을 그려 준 느낌이었다.
스윽.
옆으로 비켜서며 내게 미소를 짓는 샤를에.
“후읍.”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왕좌로 걸음을 옮겼다.
묘한 기분이었다.
궁에서 여기까지 함께 걸어온 이들 말고도 더 많은 이가 날 지켜보는 것 같았다.
저벅.
왕좌 바로 앞까지 도달하자 샤를과 왕실의 사람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공간 전체를 가득 메우며 메아리치는 소리에 정확히 듣긴 힘들었으나.
메아리가 커지면 커질수록 공간을 밝혔던 빛이 나와 왕좌로 압축되고 있었다.
잠시 후엔 연극 무대의 스포트라이트처럼 나와 왕좌에게만 빛이 비쳐졌다.
아서왕이시여.
만나본 적 없지만.
언젠간 반드시 만날 아서 펜드래곤을 향해.
당신의 자리를 계승하겠습니다.
마음 속으로 말을 건네며 왕좌에 몸을 앉혔다.
화아아아아악----!
* * *
얼레.
왕좌에 앉기 무섭게 눈 부신 빛이 주변을 감쌌었다.
옮겨진 건가.
공간 자체가 옮겨진 건 아니었다.
조금 전까지 있던 장소와 동일한 공간.
하지만 주변을 가득 메웠던 사람들의 메아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샤를을 포함한 모든 이의 모습이 사라진 건 물론이었다.
공명…은 아니고.
공명을 일으키는 빛에 손을 대진 않았었다.
비슷하지만 공간이나 왕좌가 지닌 고유의 능력 같았다.
뭐, 뭐라도 해야 하나.
왕좌에 앉은 채 열심히 눈을 굴렸다.
여전히 공간은 어두웠고 밝혀진 거라곤 내가 앉아있는 왕좌뿐이었다.
일단 일어나볼까.
아무 반응도 없는 공간에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
사락.
공간 한편으로 붉은빛이 비추어졌다.
빛은 아까 들어오며 봤던 조각상 중 하나를 비추고 있었다.
저기로 가… 어?
빛이 발생하고 몇 초의 시간이 흘렀을까.
그 의미를 파악하기도 전에 빛이 사람 형태로 바뀌기 시작했다.
빛으로 이루어졌다 보니 이목구비가 자세히 보이거나 하진 않으나 대충 형태로 보아 조각상과 동일한 인물 같았다.
우우웅…!
첫 번째 붉은빛을 시작으로 각 조각상에 가지각색의 빛이 비추어지고.
총 12개의 빛이 내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겨왔다.
설마.
그대로 굳은 채 다가오는 빛의 무리를 응시했다.
숫자까지 맞아떨어지는 걸 보니 확실한 것 같았다.
원탁의 기사.
아서 펜드래곤을 포함해 13명으로 이루어진 기사단.
아서왕과 함께 해온 이들이었다.
저벅.
마른침만 삼켜대고 있을 때.
12개의 빛이 내 앞으로 도열하며 걸음을 멈추었다.
각각의 색과 생김새를 가진 존재들.
그들은 가만히 선 채 왕좌에 앉은 날 응시하고 있었다.
결투 신청하려나.
얼핏 들은 적이 있었다.
과거 원탁의 기사는 자리에 앉을 수 있는 자격을 몹시 중요시했다고 말이다.
자격은 많은 걸 논했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건 역시 강함이었다.
그랬던 만큼 저들이 내 자격을 시험하기 위해 싸움을 걸어올 수도 있었다.
응해줘야지.
급속도로 진행된 즉위식이긴 하나.
엉겁결에 앉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저들이 원한다면 최선을 다해 내 강함을 증명해 줄 생각이었다.
“….”
그렇게 서로를 마주 보고 있길 잠시.
“!!”
맨 처음 비췄던 붉은빛의 기사를 시작으로 내 앞에 선 이들이 한쪽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우리의 검은.”
동시에 들려오는 12가지의 목소리.
목소리와 함께 눈앞의 빛들이 일렁이고.
잠시 후엔 한데 뒤섞여 만들어진 휘황찬란한 빛이 다시 한번 내 시야를 덮쳐왔다.
“당신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