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9화. 지하에선
시야를 가리던 빛이 잦아들자 천천히 눈을 떴다.
돌아왔네.
눈앞에 있던 12개의 빛은 사라진 상태였다.
지금 앉아있는 곳은 옮겨지기 전의 공간.
옆엔 은은한 빛을 뿜고 있는 샤를이 서 있었다.
반짝.
“!?”
샤를의 눈동자로 반사되는 빛에 호다닥 고개를 내렸다.
조금 전에 봤던 12가지의 색이 한데 뒤섞여 내 목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묘하네.
뜨겁거나 아프진 않았다.
그저 뭐라고 표현하기 힘든 따스함이 목을 감싸는 중이었다.
“맹약의 문양.”
“넵?”
멍한 얼굴로 중얼거리는 샤를에 목덜미를 만지작거렸다.
그냥 빛이 스며들고 만줄 알았는데 목에 뭐가 있는 모양이었다.
“기사왕에게 주어지는 문양이에요. 원탁의 기사는 물론 모든 기사가 백운 님을 따를 거예요.”
“…!”
깜짝 놀란 표정을 짓긴 했지만 뭐랄까.
솔직히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 우리의 검은 당신의 것입니다.
라고 빛으로 된 원탁의 기사들에게도 들었지만.
지금 당장은 내게 새로운 힘이 생겼거나 하는 느낌은 없었기 때문이다.
화아아아.
식이 끝난 건지 공간을 밝히던 빛이 사라졌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까지 울려 퍼지던 메아리도 그친 상태였다.
“즉위식은 끝났어요. 함께 가요.”
생각보다 간략하게 끝난 즉위식에 다행이라 생각하며.
나란히 서는 샤를과 함께 입구로 걸음을 옮겼다.
주변에 있던 다른 이들은 모두 제자리에 검을 내려놓은 채 나와 샤를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뭔가 얼떨떨하네요.”
순식간에 호로록하고 지나간 기분이었다.
그래서인지 기사왕이 됐다는 건 더더욱 더 실감 나지 않았다.
“사실 저도 그래요.”
샤를이 작게 웃으며 날 바라봤다.
“역대 왕들의 기억에도 기사왕 즉위식에 관한 기억은 없었거든요. 아서왕 이후로 처음이었으니까요. 기억이 내려오기 시작한 건 아서왕 후부터고요.”
“그렇겠네요.”
샤를이 괜히 긴장한 게 아니었다.
즉위식 진행 방식은 대대로 전해져 내려왔지만 실제로 해본 건 역대 왕 중 샤를이 처음이었다.
“기사의 왕이란 자리가 또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어요. 보통 왕이라 불리는 건 한 명뿐이니까요.”
“맞아요. 기사의 왕좌는 왕실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면 존재를 알 수 없는 자리에요. 음 그리고 기사의 왕은 뭐라고 해야 할까요. 자리 그 자체라기보단 약속 혹은 맹약에 가까워요.”
계속 걸으며 샤를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아서왕이 다음 대 왕들에게 남긴 유언이자 약속이니까요. 저를 포함한 후대 왕들은 선대 왕의 말을 이행할 의무가 있고요.”
“드디어 샤를 님이 하신 거군요.”
“네. 그래서 그런지 마음이 홀가분하네요. 물론 제가 홀가분하자고 한 일은 아니에요.”
샤를이 손을 들어 내 목덜미를 가리켰다.
“제가 틀리지 않았다는 증거거든요.”
“제 목에 대체 뭐가 있는 건가요? 안 보여서요.”
아! 하는 표정을 지은 샤를이 품에서 작은 거울을 꺼내 내 목으로 가져다 대주었다.
에?
거울을 보기 무섭게 입이 벌어졌다.
귀 뒤부터 쇄골까지 이어진 기다란 문양.
13자루의 검이 오묘한 모양으로 한데 뒤섞인 듯한 문양이었다.
문신을 박아버렸다고?
물론 무슨 문양일까 궁금하기 전에 노빠꾸 식 새김질에 깜짝 놀랐다.
딱히 가리고 다니거나 할 생각은 없지만 옷으로도 못 가리는 곳에 새겨 넣다니.
다행이야. 익숙해서.
만약 내가 몸에 무언가 새기는 걸 안 좋아했다면 눈물을 줄줄 흘렸을 터였다.
나야 카사락의 망자 군대 문양부터 라의 불꽃을 사용할 때 새겨지는 문양까지.
지금까지 여러 가지를 몸에 새겨왔다 보니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말이다.
“맹약의 문양은 원탁의 기사가 백운 님을 기사의 왕으로 인정했다는 증거에요. 아서왕에게 바쳤던 충성과 맹세를 그대로 이을 거란 이야기죠. 물론 이게 백운 님께 어떤 걸 가능하게 하지는 저도 알 수 없어요. 기억에도 존재하지 않고요.”
“그렇군요.”
이건 앞으로 내가 알아나가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당장 새로운 힘이 생긴 게 아니더라도 어떤 형태로든 추후 분명 도움이 될 거란 확신이 들기도 했고 말이다.
스륵.
출구가 가까워지는지 저 멀리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백운 님도 아시겠지만 기사의 왕은 공식적인 왕좌가 아니에요. 그래서 어딘가에 말하더라도 고개를 갸웃거리겠죠. 하지만 저를 포함한 왕실은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출구로 발을 내딛기 직전.
샤를이 확신 가득한 얼굴로 날 돌아보며.
“언제, 어디서든 기사왕이 필요로 할 때 최선의 힘을 보탤 것임을.”
입가로 밝은 미소를 그려 보였다.
“영국 왕실 여왕 샤를 엘리자베스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 * *
전 여왕 세이란 엘리자베스의 저택.
“세이란 님. 즉위식이 모두 끝났다고 합니다. 샤를 여왕님과 새로운 기사왕의 즉위식 둘 다입니다.”
“그런가요.”
저택 집사 리도의 보고에 세이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입가로 잔잔한 미소가 번진 건 물론이었다.
“샤를한텐 너무 힘든 시기에 왕위를 주게 됐네요. 데몬이란 존재가 들끓는 전쟁의 시기에 말이죠.”
세이란의 말에 옆에 서 있던 리도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세이란 님은 충분히 하셨습니다. 개방과 데몬이 등장하며 찾아왔던 혼란을 잘 수습하셨지 않습니까.”
“잊고 있었는데 리도 때문에 또 떠올랐네요. 그땐 정말 아찔했었죠.”
세이란이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무슨 일이 있든 냉정함을 잃지 않는 세이란조차도 그땐 잠시 패닉에 빠졌었다.
상식이나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 당연한 것처럼 세상에 자리를 잡아버렸기 때문이다.
“그땐 고생 많았어요. 제 옆을 지키며 명령을 수행하느라.”
지금은 집사지만 한때는 세이란의 수족이 되어 많은 일을 해온 리도였기에.
세이란은 항상 감사해 하고 있었다.
“별말씀을요. 왕가를 수호하고 보필하는 게 저희 가문의 존재 이유입니다.”
“제가 옛날부터 말하지 않았나요. 리도 님은 말이 너무 딱딱하다고요.”
이번엔 리도가 웃음을 터뜨렸다.
세이란의 말대로였다.
사실 이제 와서 가문의 가업 같은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리도 자신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은 왕가 그 자체가 아닌 세이란 엘리자베스란 사람을 존경하고 좋아하여 모시고 있다는 걸 말이다.
“세이란 님. 저번에 말씀드렸던 건 생각해보셨는지요.”
웃음을 그친 리도가 사뭇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제 대답은 같아요. 오래된 마인드지만 전 부자연스러운 방법으로 제 수명을 연장하고 싶지 않아요.”
세이란의 대답에 리도가 슬픈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세이란 역시 개방을 했으나 건강 상태가 문제였기에.
리도는 오랜 시간 세이란의 병을 고치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해왔고 효과가 있을지도 모르는 방법도 여럿 찾아놨었다.
결정적으로 세이란의 반대로 무산되었지만 말이다.
“하아.”
세이란이 의자로 몸을 파묻으며 샤를이 가져다준 회중시계를 어루만졌다.
자신은 물론 역대 왕들이 망설이며 미뤄왔던 일을 해내버린 손녀 샤를.
샤를 덕분에 세이란은 마음 편히 왕위를 내려놓을 수 있었다.
“샤를은 정말 좋은 왕이 될 거예요. 누구보다 똑똑하고 총명하니까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리도에 세이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새로운 여왕 샤를 엘리자베스와 아서왕의 뒤를 이은 새로운 기사왕이자 무기왕인 백운.”
의자에 몸을 기댄 세이란이 기분 좋은 얼굴로 두 눈을 감았다.
“이젠 새로운 세대의 세상이군요.”
* * *
모든 게 끝나고 돌아온 샤를의 저택.
저택은 맛있는 음식 냄새로 가득했다.
“오셨습니까! 백운 님!”
문으로 들어선 날 레차도가 반갑게 맞이했다.
자신이 셋팅해준 옷과 머리를 다시 한번 만족스러운 얼굴로 훑어보는 레차도.
“역시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군요!”
“엄청난 셋팅력이었습니다! 레차도 님!”
“와하하하! 감사합니다!”
기분 좋게 웃으며 레차도가 나와 샤를을 음식 냄새가 풍기는 식당으로 안내했다.
무섭군.
풍겨오는 냄새를 보니 준비된 건 한 두 가지 음식이 아니었다.
아마 저택에 온 이래로 가장 많은 가짓수가 아닐까 싶었다.
“백운 님껜 죄송하네요. 국가 차원에서 성대한 파티를 열어드려도 모자란데요.”
나란히 걷는 샤를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에요. 이런 시기에 파티라니 말도 안 되죠.”
아직 곳곳에 구울 사태의 상흔이 가득한 런던에서 공식적인 파티를 연다는 건 말도 안 됐다.
가능하다 하더라도 내가 원하지 않았고 말이다.
“그렇다고 이대로 백운 님을 떠나게 둘 순 없으니까요. 최대한 준비해봤으니 이건 거절하지 말아 주세요.”
“어휴 거절을 모르는 사람한테 거절이라니 하하… 감사합니다!”
샤를에게 손을 내저으며 식당으로 들어섰다.
대체 어디서 가져온 건지 말도 안 되게 커다란 식탁과 그 위를 가득 채운 음식들.
내가 아무리 많이 먹어도 이건 불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서오세요. 백운 님.”
“안녕하세요.”
식탁엔 먼저 도착한 에밀리아와 이사벨이 벌써 질린 얼굴로 앉아있었다.
눈앞 음식들의 위용에 압도된 모양이었다.
“어서들 앉으십시오! 식탁 위의 음식이 전부 사라지기 전까지는 식당을 나가실 수 없습니다! 하하하!”
레차도의 호탕한 웃음소리를 들으며 식탁으로 몸을 앉혔다.
“후우우.”
전투 시작 전의 마음으로 호흡을 가다듬고 있을 때.
옆에 앉은 이사벨이 몸을 기울였다.
“백운 님. 궁금한 게 있는데요.”
“네 말씀하세요.”
“어떻게 아신 거예요? 소나타 윈스가 로즈에게 건넨 게 커피란 거요!”
이사벨이 눈동자까지 흔들어대며 질문을 건넸다.
마치 신들린 무당을 쳐다보는 표정이었다.
“그거요?”
음 소리와 함께 턱을 슥슥 문지르며,
오랜 시간 황금 비율 커피를 준비하던 아이작과 그 커피를 먹으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던 줄리아를 떠올렸다.
“그냥…. 감이랄까요?”
“네에?”
힘 빠지는 표정을 하는 이사벨을 뒤로하고.
“자 그럼!”
옆에 있는 포크와 나이프를 집어 들었다.
“한 번 먹어볼까요!”
* * *
음습한 공기가 가득한 지하 공당.
저벅.
공당 안으로 누군가의 걸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 연이사! 나가자고! 뭔가 있는 거 같다니까.”
“그러자고. 너무 무모해! 우리에게 협력할 거란 보장도 없지 않나.”
겁먹은 중년 남자들의 말에 연창환이 고개를 내저었다.
죽은 연수정의 뒤를 이어 이사 자리에 오른 연창환.
연창환의 두 눈엔 짙은 복수심이 어려있었다.
“지금 우릴 공격하지 않는 걸 보면 모르시겠습니까?”
연창환이 주변을 둘러봤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존재가 그림자 아래에 숨어있었다.
그 존재들은 당연히 데몬일 것이고 말이다.
“적의 적은 아군입니다. 분명 협상의 여지가 있을 겁니다.”
연창환과 다른 이사들의 불안과 확신이 뒤섞이는 사이.
그들의 귓가로 소름 돋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또 제 발로 여길 찾아오는 인간이 있다니.”
목소리엔 작은 조소가 담겨있었다.
“정말 정신 나간 족속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