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0화. 한곳으로 모이다
아이리가 놀란 얼굴로 아이를 쳐다봤다.
그냥 이곳에 있던 아이가 우연히 부른 걸 수도 있겠지만, 뭐랄까.
묘한 느낌이었다.
눈을 감고 있으면서도 마치 자신을 꿰뚫어 보는 듯한 느낌.
“안녕. 이름이 뭐니?”
“파밀라.”
이름을 밝힌 파밀라가 종종걸음으로 아이리에게 다가왔다.
바로 아래까지 다가온 파밀라는 아무 말 없이 아이리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언니 내일도 여기 오지.”
아이리의 얼굴로 약간의 경련이 일어났다.
파밀라는 아이리에게 질문을 한 게 아니었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토대로 말한 것이었다.
“오지 마. 언니.”
“…!”
최대한 놀란 기색을 숨긴 아이리가 몸을 숙였다.
그냥 가볍게 넘기기엔 아이가 뿜어내는 기운이 범상치 않았다.
“괜찮으면 이유를 알 수 있을까? 파밀라가 언니한테 오지 말라는 이유.”
“약해져.”
“응?”
파밀라가 손을 뻗어 아이리의 팔에 얹었다.
“언니는 좋은 사람이야. 빛이 나거든.”
아이리가 미소를 머금은 채 파밀라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아주 어둡고 무서운 기운이 내일 이곳에 와. 그리고 그 기운이.”
조용히 말을 잇던 파밀라가 슬픈 표정을 지었다.
“언니의 빛을 집어삼킬 거야.”
“….”
마른침을 한 차례 삼킨 아이리가 작게 심호흡했다.
파밀라가 정확히 누구고 무슨 말을 한 건지 100% 이해했다고 하기엔 힘들었다.
하지만 파밀라가 아이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는 어느 정도 알 것 같았다.
‘내일 이곳에 오면 죽게 된다는 건가.’
어둡고 무서운 기운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역시 대충 짐작이 갔다.
내일 행사에서 아이리의 가장 큰 위험 요소가 될 헌터청 청장 로컨.
함께 하던 이를 수 없이 죽인 만큼 로컨은 아이리에게 있어 철천지원수 같은 인간이었다.
당장 기회가 온다면 망설임 없이 죽일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그런 기회 같은 건 아이리에게 있어 요원한 것이었다.
‘철권의 로컨.’
헌터청 청장 로컨을 부르는 이명이었다.
유명한 만큼 로컨이 개방한 능력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보통은 능력이 알려져 있으면 그에 맞는 대응책을 준비할 수 있어 유리하지만, 로컨에겐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본인이 단련하면 단련할수록 신체의 강도 및 운동 능력이 대폭 증가한다.’
로컨이 개방한 능력이었다.
자신의 노력 여하에 따라 무한히 강해질 수도 있는 능력.
이미 다양한 무술을 배우며 스스로를 단련한 건 물론 셀 수 없이 많은 데몬과의 전투로 로컨의 강함은 극에 달한 상태였다.
웬만한 무기와 능력 가지고는 기스조차 낼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 우드득!
아이리 또한 로컨의 강함을 직접 본 적이 있었다.
데몬이 던진 트럭을 정권 한방으로 분쇄해버리던 모습은 뭐랄까.
같은 세계에 살고 있지만 아득히 먼 다른 존재를 목도 해버린 기분이었다.
“언니의 빛으론 그 기운을 이겨낼 수 없어. 도망쳐야 해.”
이어지는 파밀라의 말에 아이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나도 알아. 하지만.”
사기를 떨어뜨릴까 회의에선 말하지 않았으나.
내일 작전의 위험성은 직접 이곳으로 향하는 아이리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로컨을 아주 잠깐이라도 마주치는 순간 죽게 될 거란 사실도 말이다.
“언니는 와야 해.”
아이리가 파밀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죽을 확률이 99%고 살아남을 확률이 1%라고 할지언정 내일의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이번이 아니면 또 언제 대통령을 만날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알려주고 걱정해줘서 고마워. 내 빛이 꺼지지 않도록.”
아이리의 입가로 밝은 미소가 그려졌다.
“열심히 노력해볼게.”
* * *
저기가 행사장인가.
이마에 손을 얹고 멀리 떨어진 더블린 광장을 바라봤다.
아직 시작하려면 한참 남았음에도 광장은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사람들로 몹시 분주했다.
생각보다 큰 행사구만.
광장은 사진으로 봤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비싸 보이는 장식품으로 여기저기 치장된 건 기본이고 연설 장소로 보이는 중앙엔 언제 만든 건지 의문이 드는 거대 조각상까지 놓여 있었다.
바이킹인가.
큼지막한 도끼를 든 바이킹을 표현한 조각상.
부디 저 조각상이 갈라드를 본떠 만든 게 아니길 바랄 뿐이었다.
저벅.
천천히 행사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대통령이 참가하는 행사라 그런지 경비도 엄청났다.
더블린 헌터청에 속한 인원이 총동원된 게 아닐까 싶었다.
“흐음.”
지붕 위를 걸으며 뒤로 멘 보따리를 바라봤다.
아이리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아 챙겨온 얼음 로봇의 잔해.
호다닥 집어서인지 얼음도 빠져나가지 않고 여전히 로봇에 붙어있는 상태였다.
보따리 좀 눈에 안 띠는 걸로 주지.
- 형아. 이거에 싸서 가.
코뉴는 자기가 아끼는 거라며 두툼한 보따리 하나를 건넸었다.
장난감을 쌀 때 쓰던 건지 아주 그냥 알록달록하기 그지없었고 말이다.
겁나 수상해 보이잖아!
물론 딱히 눈에 띌 만한 장소로 갈 건 아니라 상관없긴 하지만.
어쨌든 조용히 지나가기만 해도 검문당하게 하는 보따리임은 분명했다.
그나저나. 챙겨오긴 했는데 어떻게 줘야 하나.
아이리가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만큼 일단 시끄러운 곳이 생기면 출발! 이란 생각으로 오긴 했지만.
어디서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지가 조금 애매했다.
음?
들려오는 인기척에 걸음을 잠시 멈춘 찰나.
아래에서 무전기 소리가 들려왔다.
일대를 경비 중인 헌터들인 것 같았다.
# 아이리나 그 세력으로 보이는 일당은 아직인가?
“예. 아직 수상해 보이는 인원은 딱히 보이지 않습니다.”
사삭.
낯익은 이름에 벽에 붙어 은밀히 아래로 내려갔다.
얼레.
빼꼼 고개를 내밀어 살피니 아는 얼굴이었다.
날 더블린 공항에서 시내까지 안내했던 헌터 중 한 명인 클로다.
클로다가 다른 헌터 한 명과 함께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 오늘 배포된 백운도 보이는 즉시 잡아들여야 한다. 죽이거나 해선 안 된다. 그가 타룬의 잔해를 가지고 있다.
“알겠습니다.”
# 방심하지 말고 주의해야 한다. 백운을 돕는 제3세력이 있다. 한국으로 신원조회 한 결과 백운은 7급 헌터라는 답변이 왔다. 타룬을 박살내고 포위망을 빠져나간 건 백운 스스로가 한 게 아니다.
오호 7급이라.
귀를 쫑긋 세우고 엿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번 1급 헌터가 되며 듣긴 했었다.
1급 헌터는 국가 핵심 전력으로 분류되어 본인이 동의한 신원조회가 아니라면 적당한 7급이나 8급 헌터로 답변한다고 말이다.
아주 훌륭하구만.
흡족한 얼굴로 한국 헌터청을 떠올리며 무전이 끝나길 기다렸다.
이걸 결국 써야 하나.
보따리 안에 챙겨온 가면을 꺼내 썼다.
하얀 수염과 자글자글한 주름까지 아주 디테일하게 만들어진 바이킹 가면이었다.
이건 코뉴가 준 건 아니었다.
- 슬쩍.
이유는 모르겠으나 코뉴가 소중히 모셔 놓은 듯한 장난감 컬렉션에서 슬쩍 해온 것이었다.
나중에 새 걸로 사줘야지.
아침에 나올 때까지 코뉴는 눈치채지 못한 듯했기에.
일을 끝내고 돌아가 비슷한 걸로 가져다 놓을 계획이었다.
“그럼 계속 경계하겠습니다.”
무전을 마친 인원들에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누구냐!”
일부러 발자국 소리를 내자 내 쪽을 돌아보는 클로다와 나머지 헌터A.
가면의 틈 사이로 당황스러운 표정을 한 두 사람이 보였다.
당황스럽겠지.
기괴한 가면에 어린 애들이나 가지고 있을 만한 보따리를 두르고 있으니.
수상한 걸 넘어 정신 이상한 사람이라 생각할 것 같았다.
“누구시죠?”
경계할 대상은 아니라고 판단한 걸까.
클로다가 침착한 목소리로 물으며 내 쪽으로 걸어왔다.
착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가면 속에서 눈을 질끈 감았다.
공항에서 패스트 트랙도 안내해주고 밤까지 맥주도 마셔줘서 더블린의 착한 헌터라고 생각했었다.
알고 보니 내가 미사일에 가루가 되도록 맥줏집으로 안내한 유인책이었고 말이다.
“죄송하지만 이 앞에선 대통령이 참가하는 행사가 열려서요. 보따리 안엔 뭐가 들었나요?”
내 앞을 가로막은 클로다가 보따리 쪽으로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 손이 보따리에 도달하기 전.
“아일랜드는 어렸을 때 안 알려 주냐? 사람 속이면.”
“…!?”
움켜쥔 주먹을 하늘로 뻗어 올렸다.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 안 준다고.”
쩌어어엉!!
* * *
행사장 내부로 이동한 아이리가 주변을 살폈다.
‘이상해.’
최대한 조심하며 들어오긴 했지만 무언가 이상했다.
로컨이 직접 신경 썼다고 하기엔 행사의 경계가 너무나 느슨했다.
허를 찔러 배치할 거라 생각했던 위치는 물론 당연히 있어야 할 기본적인 장소에서도 헌터의 모습을 찾을 수가 없었다.
덕분에 미리 준비해뒀던 교란 작전은 시작조차 하지 않은 상태였고 말이다.
‘무슨 생각인 거지.’
오히려 침투가 너무 쉬워 망설여지는 중이었다.
로컨이 아이리를 위해 준비해놓은 함정일지도 몰랐다.
‘내 침입을 막는 대신에 끌어들여 잡아먹겠다는 건가.’
아이리가 입술을 깨물었다.
함정이란 의심이 드는데도 들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야속할 뿐이었다.
“빨리 움직여! 서쪽 방향이다!”
들려오는 목소리에 아이리가 건물 뒤로 몸을 숙였다.
어째선지 다급한 얼굴로 달려가는 세 명의 헌터.
“다른 조는 어떻게 됐어!?”
“아까 응답이 마지막이었습니다! 그나마 반응이 있던 조도 점점 연락이 끊기고 있습니다!”
“이런 샹!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헌터들의 대화에 아이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점점 연락이 끊기다니…?’
아이리 측에서 무언가를 한 건 없었다.
준비해둔 교란 작전도 말 그대로 시선을 끌 뿐이지 적 헌터를 때려잡거나 하는 게 아니었다.
하고 싶어도 아이리 측엔 그런 일이 가능한 전력이 없었다.
스윽.
지나간 헌터들에 아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조금 전 이야기와 여기까지 오며 봤던 것들을 종합해보는 아이리.
‘함정이 아니라.’
이상할 정도로 허술했던 경계를 떠올린 아이리가 미간을 찌푸렸다.
‘누군가에게 당했다는 건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아이리를 돕는 숨은 조력자는 여럿 있었다.
하지만 그중에도 이런 대담한 일을 벌일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누구야 대체.’
아이리가 헌터들이 달려간 방향을 바라봤다.
더블린 헌터청부터 각 기관의 주요 병력까지.
모두 로컨 휘하에 있는 자들로 현재 이곳 행사장은 아일랜드에서 가장 경비가 삼엄하다 봐도 무방했다.
까딱 잘못하면 한순간에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장소.
그런 곳을 이렇게 휘젓고 다닐 수 있는 건 두 가지 부류의 사람뿐이었다.
자신처럼 무언가를 위해 목숨을 내다 버린 정신 나간 사람이거나.
‘아니면.’
절대 잡히지 않을 자신이 있는 사람 뿐이었다.
‘….’
약간의 고민을 마친 아이리가 몸을 돌렸다.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누군지 모를 이는 지금 아이리에게 기회를 만들어 주고 있었다.
아이리는 그 기회를 놓칠 생각은 없었다.
‘누군지 알 수 없는 분. 언젠가 살아서 만나게 된다면.’
입술을 깨문 아이리가 속도를 올렸다.
‘꼭 보답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