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4화. 기록소로
“무슨 일이 있나 보네.”
행사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언덕.
카런이 소란스러운 행사장 쪽을 바라봤다.
피크닉을 가고 싶다는 파밀라에 샌드위치와 간식을 준비해 나온 카런이었다.
“아까는 소리가 울리더니 지금은 경찰이 많이 모여있어.”
카런이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눈에 보이는 걸 파밀라에게 설명해주었다.
아까 소리가 울렸을 때부터 어째선지 파밀라는 행사장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왜 이렇게 집중해서 보지.’
파밀라를 내려다보며 카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됐든 좀처럼 관심을 보이지 않는 파밀라였기에 카런은 이런 딸의 모습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파밀라. 행사장에 아는 사람이라도 있니?”
“응.”
“누구?”
“저번에 만났던 오빠.”
백운을 떠올린 카런이 아! 하는 표정을 지었다.
파밀라가 들고 와버린 잠바를 돌려줘야 하는 참이었다.
‘오늘도 색을 보고 있는 건가.’
카런은 파밀라가 개방한 능력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파밀라의 짤막한 말을 조합해 유추해볼 뿐이었다.
“이상해.”
“응?”
뜻밖의 말에 카런의 눈동자가 커졌다.
이상하다니, 파밀라가 좀처럼 하지 않는 말이었다.
평소의 파밀라는 항상 모든 거 꿰뚫어 보는 듯한 말과 행동을 했었기 때문이다.
“무서운 기운이 있었어. 행사장에 있던 빛들은 그 기운에 전부 집어삼켜져야 했는데.”
잠시 말을 멈춘 파밀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그 기운이 사라졌어. 원래 없었던 것처럼 완전히.”
“그럼 다행이네. 덕분에 빛이 안 사라질 수 있잖아.”
“응.”
응이라고 대답했지만 파밀라는 여전히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지금까지 파밀라가 미리 본 것들은 절대 변하지 않았었다.
파밀라는 그걸 운명이라고 결론 내렸었다.
어떤 변수가 생겨도 절대 변하지 않는 법칙.
이 법칙을 깨보고자 파밀라는 직접 당사자들을 찾아가 경고해주는 등 많은 노력을 했었다.
결과적으론 아무것도 바뀌는 게 없었지만 말이다.
- 언니는 와야 해.
이번에도 똑같을 거라 생각했다.
경고해줬지만 아이리는 행사장으로 향했고, 파밀라가 봤던 대로 무서운 기운을 만났다.
하지만 파밀라가 봤던 것과 달리 무서운 기운은 아이리의 빛을 집어삼키지 못했다.
뜬금없이 등장한 황금색 빛 때문이었다.
‘빛이 기운을 삼켜버렸어.’
정말 무섭고 포악한 기운이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황금빛을 만나기 전까지의 이야기였다.
압도적인 빛을 만나자 기운은 거인 앞에 선 난쟁이처럼 순식간에 사그라들어버렸다.
꿀꺽.
자기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킨 파밀라가 행사장에서 여전히 빛나고 있는 황금빛을 응시했다.
이것이 의미하는 한 가지였다.
‘운명이… 바뀌었다.’
* * *
얌전히 쇼파에 앉아 주변을 둘러봤다.
어제 아이리를 따라 도착한 단체의 아지트.
뭔가 여러 가지 무장을 갖춘 비밀스러운 장소일 거라 생각했는데.
아지트는 의외로 포근한 느낌을 주는 단독 주택이었다.
# 요점은 어제 말씀드린 것과 같습니다.
TV에선 오늘 아침까지 함께 있던 다닐로가 기자회견을 갖는 중이었다.
로컨이 지금까지 저질러 온 비리와 실험, 타룬 등의 존재를 하나도 빠짐없이 공개하고 있었다.
그 덕에 아일랜드는 제대로 난리가 났고 말이다.
불을 질러버린 기분이랄까.
예상 못한 건 아니지만 두 눈으로 직접 보니 약간 식은땀이 흘렀다.
아까 아이리가 보여준 인터넷을 보니 행사장에서 벌어진 일로 도배된 상태였다.
“로컨을 따르던 자들도 모래성처럼 무너지고 있어요.”
커피 향기가 나는 듯 싶더니 아이리가 옆으로 와 몸을 앉혔다.
만약을 대비해 아이리는 어느 정도 사태가 진정될 때까지 몸을 숨기기로 한 것이었다.
“조금이라도 형량을 줄이기 위해 먼저 자수하거나 정보 제공을 하겠다는 자가 벌써 한 무더기라고 해요.”
“역시 무서워서 붙은 거라 빨리 무너지는군요.”
로컨의 무력이란 버팀목으로 간신히 유지되던 조직인 듯했다.
그야말로 오합지졸 그 자체.
아일랜드 각 지역과 기관이 우르르 수사를 돕고 있으니 금방 정리가 될 것 같았다.
# 다닐로 대통령님! 행사장에서 더블린 헌터청 청장 로컨이 재기불능 상태로 발견됐다고 들었습니다! 대체 누가 로컨 청장을 그렇게 만든 건가요?
역시 몸뚱이 하나는 아주 튼튼한 녀석이었다.
별개로 아주 독종인 자식이었고 말이다.
죗값 달게 받으라구 아저씨.
당시에도 숨이 붙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단지 다시는 일어날 수 없을 거란 걸 알았기에 그대로 내버려두고 왔었다.
남의 나라 청장을 완전히 하늘로 보내버리는 것도 영 껄끄러웠기에 내린 선택이었다.
# 죽을 뻔한 절 구해주고 로컨의 반역을 막아준 은인이 계십니다. 이름 공개를 원하지 않으셨기에 그게 누군지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저 저와 아일랜드를 위기에서 구해주신 만큼 저를 포함한 국가 일동은 은인에게 깊은 감사를 표하는 바입니다.
안되지. 안돼.
나중이면 모를까 앞으로 뽈뽈 돌아다녀야 하는데 공개되는 건 곤란했다.
사태가 조금만 진정되면 더블린 시내로 호다닥 달려나가야 했고 말이다.
“무기왕이실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어요.”
“하하…!”
아이리의 말에 머리를 긁적였다.
로컨을 박살내고 하수도를 빠져나가자 다닐로와 아이리는 날 벙찐 얼굴로 바라봤었다.
대체 어떻게 살아서 돌아온 거지…? 란 표정이었다.
“무기왕은 세계적으로 유명 인사니까요. 그런 유명한 분과 만난다는 건 현실성이 떨어지다 보니 더 눈치 못 챈 거 같아요. 백운 님은 처음부터 심상치 않았었는데 말이죠.”
“어휴 유명하다뇨. 별말씀을요.”
멋쩍은 얼굴로 앞에 놓인 커피를 홀짝였다.
유명하다는 말을 대놓고 면전에서 들으니 낯이 뜨거워지는 중이었다.
“로컨이 무너지다니.”
TV로 고개를 돌린 아이리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저에게는, 아일랜드에게는 절대 불가능하다고 여겨진 일인데. 백운 님은 그런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내시네요.”
끝도 없이 화끈해지는 얼굴에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 앞으로 검은 얼음을 더 면밀히 조사하고 사라진 실험체들을 찾을 생각입니다. 잠정적인 위험을 하루 빨리 제거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다닐로가 실험체를 언급하며 기자회견을 종료했다.
사라진 실험체라.
웬만한 건 하루 만에 다 회수 됐지만 연구실과 함께 통째로 사라져버린 게 있었다.
검은 얼음을 매개체로 만들어진 타룬 부대가 바로 그것이었다.
“백운 님. 전에 타룬이 울부짖는 걸 들으셨다고 했었죠?”
“넵. 아주 그냥 데몬처럼 울부짖던데요.”
“이상하네요.”
작게 앓는 소리를 내던 아이리가 말을 이었다.
“연구소를 조사해봤는데 타룬에 소리를 내는 기능 같은 건 없었거든요. 실험에 참여했던 연구원도 같은 대답이었어요. 타룬은 절대 소리를 낼 수 없다… 라고 변함없이 말하더라고요.”
약간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그 날 술을 많이 마신 것도 아니었으니 환청을 들었을 리도 없었다.
“하아.”
한숨을 내쉰 아이리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소리를 낼 수 없는 게 소리를 냈다라…. 아무 일도 없어야 할 텐데 걱정이네요.”
* * *
야심한 시각.
더블린을 빠져나간 여러 대의 트럭이 속도를 올렸다.
“일단 더블린에선 최대한 멀어진다. 다른 기관까지 모이고 있으니 수사망이 좁혀올 거야.”
“알겠습니다.”
로컨 아래에 있던 헌터들과 추종 세력.
그들은 실험실에서 훔친 타룬 부대를 가지고 국경을 넘으려는 중이었다.
아일랜드에선 더 이상 설 곳이 없으나 무기로 사용할 수 있는 타룬과 함께라면 분명 관심을 보이는 국가가 있을 터였다.
‘이 재수 없는 것들이 지금은 우리의 생명줄이라니.’
헌터 중 한 명이 트럭 뒤로 고개를 돌렸다.
양옆으로 줄지어 서 있는 타룬 부대.
아직 전원을 넣지 않아 고개를 숙인 채였다.
‘최대한 비싸게 사주는 곳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헌터가 눈살을 찌푸렸다.
순간이지만 어둠 가득한 트럭 뒤쪽에서 희미한 빛을 봤기 때문이다.
“방금 봤어? 뒤에서 빛난 거.”
“빛이라뇨? 잘못 보신 거 아닙니까? 지금 트럭에 전원 공급 장치도 없어서 타룬 못 움직입니다.”
급히 도망치느라 충전조차 시키지 못했기에 지금의 타룬은 그저 움직이지 않는 마네킹과 다를 바 없는 상태였다.
“그런가?”
피곤해서 잘못 봤나 라고 여긴 순간.
“크르르…!”
“!!!”
이번엔 명확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키잉----!
거기서 그치지 않고 타룬의 눈으로 들어오는 서늘한 푸른빛.
켜질 리 없는 것들이, 움직여선 안 되는 것들이 손과 머리를 움직이며 소름 돋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뭐야! 당장 다 연락 돌…!”
헌터의 말은 끝까지 완성되지 못했다.
함께 달리다 갑자기 폭발하기 시작한 트럭들.
그곳으로 향한 헌터의 눈엔 믿기지 않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끄아아아악!”
살아 움직이는 타룬에 의한 학살.
다른 트럭의 인원들은 갑자기 살아난 타룬에게 제대로 된 반응조차 못 하고 속수무책으로 목숨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전에 봤던 것보다 훨씬 빠르고 강해진 움직임이었다.
“무, 무슨 일이….”
주춤하며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친 헌터.
툭.
헌터의 등 뒤로 몸을 얼어붙게 하는 한기가 느껴지고.
“크라아아…!”
“!!”
몸을 돌리려는 찰나.
푸화아악!
헌터의 시야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마지막 시야로 보인 타룬은 헌터들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던 꼭두각시 같은 게 아니었다.
그들은 자아와 생명을 가지고 오로지 살인이란 목적을 위해 움직이는 괴물, 데몬이었다.
* * *
“정말 괜찮을까요?”
“네. 아마 정상 운영을 기다리려면 한참 걸릴 거예요.”
사람들이 모두 잠든 야심한 시각.
난 아이리를 따라 어두운 골목을 걷고 있었다.
- 혹시 더블린 기록소는 언제 가볼 수 있나요?
저녁 식사를 마치고 아이리에게 조심스럽게 물어봤었다.
지금의 소동 때문에 식료품과 생필품을 제외한 모든 가게의 영업이 중단된 상태.
기록소도 예외는 아니었기에 그 시기가 궁금했었다.
- 지금 가시죠.
아이리는 내게 많은 걸 묻지 않았었다.
그저 기록소에 볼일이 있냐는 간단한 질문 후 곧장 쇼파에서 몸을 일으켰었다.
지금 당장 기록소에 들어가게 해주겠다는 것이었다.
곧 복직 예정이라고 하시더니. 역시 장관(진)님이야.
아이리는 로컨과 붙어먹었던 환경부 장관을 대신해 차관에서 장관으로 진급 예정이었다.
그 덕을 맨 처음으로 보는 게 나인 듯했고 말이다.
저벅.
그런데 어디 가시지.
정문과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걸어가는 아이리.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자 아이리가 당연하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몰래 들어가야죠. 공식적으론 닫혔으니까요.”
“예?”
뜻밖의 대답에 약간 벙찐 사이.
“이제 익숙해지셨죠?”
미소 지은 아이리가 내 손을 붙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