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5화. 갈라드의 도끼
편하구만.
눈 깜짝할 사이 도착한 기록소에 아이리를 바라봤다.
이동 거리가 짧다뿐이지 아무런 사전 준비 없이 들어올 수 있어 몹시 편리한 능력이었다.
“감사합니다. 아이리 님.”
“별말씀을요.”
아이리에게 고개를 꾸벅이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일단 내가 서 있는 곳은 기록소에서 오래된 책을 보관하는 장소인 듯 했다.
엄청 낡았네.
천천히 거닐며 꽂혀있는 책들을 구경했다.
케케묵은 곰팡내를 기본으로 간직하고 있는 책들.
표지나 책을 감싸고 있는 케이스만 봐도 최소 수백 년은 되어 보였다.
이렇게 막 보관해도 되나.
희미한 빛이 감돌고 있는 걸 보니 어느 정도 보호하고 있는 거 같긴 한데.
꺼내 읽을 수 있는 건 물론 대여도 가능하다고 쓰인 걸 보니 이러면 안 망가지나 의아함이 들었다.
“아일랜드엔 이런 책들이 정말 많거든요.”
뒤따라온 아이리가 오래된 서재를 소개했다.
“역사적 가치는 크지 않지만 그냥 버리기엔 쓰인 시점 등을 봤을 때 아깝다고 여겨지면 이곳으로 오게 돼요. 그래서 딱히 유명한 고서에 비해 제대로 된 보존이나 보호가 이뤄지지 않는 거고요.”
“오호.”
“책 보관 및 보호하는 비용이 또 만만치 않거든요.”
아이리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였구만.
어디선가 얼핏 들은 적이 있었다.
오래된 책을 보존할 땐 책의 재질이나 사용된 잉크별로 고려해야 하는 부분이 많아 적지 않은 비용과 인력이 들어간다고 말이다.
# 아일랜드의 신화.
걸음을 옮기다 눈에 띄는 책을 집어 들었다.
아주 얇으면서도 단순명료한 제목을 가진 책.
책의 첫 번째 표지에는 무섭고 용맹하게 생긴 강아지 한 마리가 그려져 있었다.
강아지라고 부르기엔 너무 안 귀여운데.
사냥개가 더 어울리겠다고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책을 펼쳤다.
# 이렇게 그와 그녀는 서로를 처음 마주하게 되었다.
뭐야.
다짜고짜 나오는 글귀에 나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신화라고 해서 펼쳤더니 처음부터 나온다는 게 로맨스 향기 풀풀 나는 글귀라니.
이래서 중요도가 떨어진다고 판단이 된 건가 싶었다.
조금만 더 보자.
바로 덮어버릴까 하다가 몇 장을 더 넘기며 읽어보았다.
# 남자는 횡포를 참지 못하고 장군을 때려죽이고 말았습니다. 장군은 공주를 지키던 호위로써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자였습니다.
사이다네.
화끈하고 시원했지만 보통 이런 이야기의 결말은 좋은 편이 아니었다.
거기다 상대가 권력자였다면 더더욱 더 말이다.
# 남자는 곧장 잡혀 왔고 호위를 잃은 공주 앞에 무릎 꿇리게 되었습니다.
이거 봐. 현실이 사이다가 아닌데 어떡해. 참아야 한다니까.
# 공주는 물었습니다. 그대가 나의 호위를 죽임으로써 내가 위험해졌는데 이를 어떻게 책임질 것이냐고 말입니다. 그러자 남자는 말했습니다. 자신이 그 장군을 대신하여 공주를 지키는 번견이 되겠다고 말입니다.
씨알이나 먹히겠냐고.
패기로운 제안이었지만 공주 입장에선 일면식도 없는 남자였다.
호위란 직책이 애들 장난도 아니고 공주가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 밝게 미소 지은 공주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이것이 공주와 남자의 첫 만남이었습니다.
에?
비현실적인 진행에 책을 덮고 싶었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둘이 만났다는 걸 마지막으로 내용이 끊겨 있었기 때문이다.
개연성 보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책에서 몸을 돌렸다.
단순히 박살난 개연성과 마음에 안 드는 진행을 떠나서 제목이 왜 아일랜드의 신화인지부터가 의문인 책이었다.
그렇게 책에서 멀어져 도끼로 나아가려는 찰나.
- 번견.
머리로 조금 전에 봤던 단어가 떠올랐다.
단어의 뜻만 봤을 땐 집 지키는 개로 별 뜻은 없지만.
아일랜드의 번견이라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있어서였다.
쿨란의 번견 쿠훌린.
멈춰 선 채 다시 책을 돌아보았다.
내가 알고 있는 쿠훌린의 내용과는 많이 다르긴 했다.
일단 쿨란은 공주가 아니라 대장장이었다.
따라서 그녀를 지키던 건 장군이 아니라 사나운 사냥개였고 말이다.
그래도 비슷하단 말이지.
신분과 죽은 존재만 슬쩍 바꾸면 대략적인 맥락은 동일했다.
내가 찾고 있는 건 창일 가능성이 높으니까.
이 부분에서도 쿠훌린에 무게가 실렸다.
쿠훌린이 사용하는 무기는 게이볼그란 이름을 가진 창이었다.
필살의 상처를 입히는 창, 심장을 꿰뚫는 창 등 여러 가지 이명이 붙어 있는 유명한 창이기도 했다.
게이볼그라.
나의 망상일 수도 있지만 여기까지 생각이 닿으니 뭐랄까.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당장 무기를 찾기 위해 아일랜드로 왔으나 그 주인이 누군지조차 모르던 상황이었는데 쿠훌린과 게이볼그라니.
쿠훌린은 무려 신화 속의 영웅이었다.
“백운 님. 왜 그러세요?”
한참을 따라오지 않자 앞서가던 아이리가 고개를 돌렸다.
“어디 아프세요? 얼굴이 빨개요.”
“하하 아니에요. 계속 가시죠!”
괜찮다고 손을 내저으며 아이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방금 말한대로 아픈 건 아니었다.
그저 단전부터 끌어올려진 기대감이 온몸을 들끓게 하고 있을 뿐이었다.
* * *
한국과 일본의 사이, 해저 깊은 곳.
햇빛이 들지 않는 바다에서 진동이 울려 퍼졌다.
거친 느낌의 진동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바다를 울리고 있었다.
“서둘러라. 늦으면 죽임당할 테니까.”
“알겠습니다.”
헤키리스의 책사 포이카가 데몬들을 재촉했다.
바다 아래에서 수천의 데몬을 이끌고 한국으로 향하고 있는 포이카.
포이카는 이동을 위한 사전 작업을 명 받은 상태였다.
‘규모를 최대로 해야겠군.’
임무는 간단했다.
헤키리스와 본대가 원하는 시점에 넘어올 수 있도록 문을 준비하는 것.
포이카 역시 지금껏 한 번도 만들어본 적 없는 규모의 문이라 소모 시간이 쉽게 가늠되지 않았다.
- 빨리 해라. 당장에라도 넘어갈 수 있도록 빨리…!!
헤키리스는 무기왕을 만날 수 있단 생각에 눈이 제대로 돌아가 있었다.
일분일초라도 빨리 무기왕을 찾아내 잘린 팔의 복수를 하려는 것이었다.
‘늦었다간 완성이 돼도 위험하다.’
포이카는 헤키리스의 성질을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책사의 위치에 있다 해도 이 정도 흥분 상태라면 어떤 돌발 행동을 할지 몰랐다.
“얼마나 넘어와야 하는 겁니까?”
포이카를 따르는 데몬 중 한 명이 물어왔다.
S급 데몬으로 포이카와 견줄만한 지능을 가진 자였다.
“최소 수만.”
“…!?”
놀라는 데몬에 포이카가 작게 혀를 찼다.
“지하 공당에 있는 전원이 온다.”
포이카 역시 부하가 왜 놀라는지는 알고 있었다.
원래라면 더 크고 강대한 전력이 갖춰질 때까지 지하 공당에 머물러야 했다.
헤키리스가 처음 명한 것이기도 했고 말이다.
- 당장 가라!
하지만 팔이 잘린 후의 헤키리스는 이성을 완전히 상실했기에.
지난 계획 따위는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상관없겠지.’
실제로 이런 헤키리스의 결정에 반대하는 데몬은 한 명도 없었다.
모두가 살육에 굶주린 터라 오히려 대기하라는 이전 명령에 반발하던 놈들이었기 때문이다.
‘… 괜찮을까.’
드디어 나간다고 환호성을 질러대던 데몬들.
포이카도 이전엔 이들과 다를 바 없었지만, 지금은 조금 달랐다.
상처 입지 않는 왕, 절대 죽지 않는 왕, 불사이자 무적의 왕이라고 불렸던 지하공당의 헤키리스.
‘헤키리스는 불사가 아니다.’
팔이 잘려 울부짖는 헤키리스를 보며 포이카는 깨달았었다.
헤키리스가 분명 막강한 존재임은 맞으나 무적은 아니란 사실을 말이다.
그렇기에 지금 한국으로 향하면서도 걱정이 되었다.
과연 헤키리스가 지금 그 무기왕이란 존재를 만나는 게 옳은 선택인지, 여기에 더해 그를 다시 만났을 때 깨어진 무결성으로 이기는 게 가능한지 말이다.
“포이카 님? 무슨 걱정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다.”
포이카가 거칠게 고개를 흔들어 걱정을 털어냈다.
‘바보 같은.’
그 날의 일이 너무 충격적이어서일까.
순간이지만 말도 안 되는 일을 상상해버렸다.
이길 수 있을까라니.
이기지 못하는 게 이상했다.
그때는 무결성을 믿고 무방비하게 팔을 내밀었던 헤키리스지만, 정면으로 마주했을 땐 상대가 누구든 질 리 없었다.
“키라아아악!”
“크르르르…!”
뒤따르고 있는 데몬 군단도 마찬가지였다.
공당에 머물고 있는 데몬 중 어중이떠중이는 하나도 없었다.
최소 수준을 넘는 데몬만이 공당에 머무를 수 있었기에 지금 한국으로 향하고 있는 건 재앙이라 불러도 전혀 손색이 없는 전력이었다.
‘질 리가 없다.’
이빨을 깨문 포이카가 애써 몸에 힘을 주었다.
‘우리가 패배할 리는….’
으득!
‘없다.’
* * *
“다음 방이에요.”
머리를 긁적이며 서둘러 아이리를 따라갔다.
멋쩍어하는 나와 마찬가지로 아이리의 얼굴도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멋들어지게 침입한 거까진 좋았는데.
- 누구냐!
기록소가 왜 이렇게 허술한가 싶은 찰나.
순찰 중이던 인원들과 정면으로 맞닥뜨리고 말았다.
미리 다가오는 걸 알았던 터라 그 전에 아이리에게 잠깐 나갔다 오자고 말했었지만.
- 괜찮아요.
잠시 고민하던 아이리는 고개를 저으며 정면으로 경비들에게 걸어가 신분을 밝혔었다.
공무 중이니 협조해달라는 요청과 함께였다.
- 실례했습니다!
이에 경비들은 깜짝 놀라며 아이리에게 고개를 숙였었다.
낮에 있었던 다닐로 대통령의 발표 이후로 아이리는 아일랜드의 스타이자 영웅이 된 상태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처음부터 정면돌파가 나았겠어요. 하하….”
“그러게요. 하하….”
서로 어색하게 웃으며 철문 앞에 도달하고.
아이리가 손을 뻗어 문을 열어젖혔다.
여러 바이킹의 물품이 전시된 기록소.
다양한 볼거리가 많은 듯했지만 당장 내 눈엔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저게 백운 님이 말씀하셨던 갈라드의 도끼에요. 아, 이미 보고 계시네요.”
아이리를 향해 가볍게 웃어 보인 뒤.
천천히 갈라드의 도끼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거 혹시 열어봐도 될까요?”
“네. 물론이죠. 부수지는 말아 주시고요.”
장난스럽게 말하는 아이리에 엄지를 치켜세워주었다.
“당연하죠. 살짝만 톡 하고 만져볼게요. 어떤 느낌일지 궁금해서요.”
정말 다른 것 없이 살짝만 톡 만질 생각이었다.
만진다고 해서 갈라드의 도끼가 사라지거나 할 일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번쩍.
도끼가 머금고 있는 빛은 황금색이 아니었다.
무기고에 넣을 수 있는 무기가 아닌, 나의 무기가 있는 곳을 가리키는 지표일 뿐이었다.
역시.
조심스럽게 유리관을 열며 입가로 미소를 그렸다.
뭔진 몰라도 바이킹의 긍지를 버리고 데몬쉨이 된 녀석의 도끼였다.
이딴 도끼가 황금빛이었으면 무기를 찾았다는 기쁨보단 혼란스러움이 훨씬 컸을 거 같은데.
아주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자 그럼 데몬 새끼의 도끼야.
유리관을 옆으로 치워내고.
모습을 드러낸 갈라드의 도끼로 손을 뻗었다.
내게 창이 있는 곳을 알려다오.
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