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6화. 번견과 검은 얼음
오씨…!
두 팔로 몸을 감싸 안았다.
공명으로 공간이 바뀌자마자 느껴진 건 엄청난 추위였다.
바람이 많이 불거나 기온 자체가 낮아 추운 것과는 조금 다른 감각이었다.
얼음 새끼구나.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청새치와 타룬을 오염시킨 얼음에서 느껴졌던 한기.
그땐 손을 대어야 제대로 느껴졌던 한기가 지금은 공간 전체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화아아악…!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역시나 얼음이었다.
이전에 봤던 것보다 더 새까만 얼음.
다른 색은 전혀 섞이지 않은, 빛조차 반사되지 않는 순수한 흑색이었다.
얼어죽는 거 아닌가 이거.
뼈가 시릴 정도의 추위라니.
파밀라가 가져간 패딩이 생각나는 순간이었다.
역시 도끼의 시야고.
조금 시선을 위로 올리자 무릎 꿇고 있는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짧은 검은색 머리를 뒤로 넘긴 남자.
남자가 두른 갑옷은 산산조각이 나 있었으며 그 사이론 검은색 개 모양의 문신이 드러나 있었다.
갑옷이 멀쩡한 곳을 제외하곤 온통 붉은 피가 흘러내리는 중이었고 말이다.
“아깝구나. 사냥개여.”
귓가로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듣자마자 알 수 있었다.
사냥개라 불린 남자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지금 승리를 확신하고 있는, 검은 얼음의 주인이 낸 목소리였다.
목소리도 춥네.
몸을 한 번 떤 후 얼음의 주인을 바라봤다.
왠지 모르게 소름끼치는 생김새였다.
얼음색을 띤 눈을 제외하곤 온몸이 칠흑에 가까운 존재.
같은 세계에 사는 존재가 맞나 의심이 들 정도로 기이한 느낌이었다.
“네가 두 번째다. 내게 죽음을 떠올리게 만든 존재는 말이다.”
두 번째…? 죽음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말을 곱씹으며 녀석의 몸을 자세히 살폈다.
온몸이 검은 얼음으로 뒤덮인 녀석은 유독 심장 부근이 움푹 패 있었다.
아주 날카로운 것에 찔린 흔적이었고 그 너머엔 눈과 마찬가지로 푸른빛을 띤 무언가가 거칠게 움직이는 중이었다.
심장.
얼음 너머라 잘 보이진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저건 녀석의 유일한 약점이며 사냥개라 불린 남자는 정확히 저곳을 노렸다는 사실을 말이다.
하지만.
닿지 못했구나.
지금의 상황이 펼쳐진 이유였다.
회심의 일격이 향한 목적지는 정확했지만 창이 닿기엔 얼음이 단단하고 두꺼웠던 모양이다.
그 증거로 검은 얼음에 둘러싸인 남자의 창은 날 쪽이 완전히 망가져 있었다.
붉은색 창.
날이 망가져 더 이상 무기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창이지만, 그곳에선 피로 벼린 듯한 영롱한 붉은빛이 감돌고 있었다.
검은 존재의 눈 색깔과 확연히 반대되는 색이었다.
“주인이 네게 좋은 무기를 주지 않았구나. 창이 조금만 더 튼튼했어도 내 심장에 닿았을 텐데.”
“하아.”
검은 존재의 말이 이어지길 잠시.
남자의 작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상처가 깊어 숨을 헐떡이던 남자가 호흡을 고른 것이었다.
“거 말 더럽게 많네. 쥐톨 만한 새끼가.”
…?
급속도로 쏟아지는 욕에 나도 모르게 눈이 커졌다.
힘겹게 말한 것임에도 공간 전체로 시원하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
굳이 비유하자면 청량음료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차갑게 내리깔린 얼음쟁이와는 확연히 달랐다.
“창이 부족한 게 아니라 내 힘이 부족해서 못 뚫은 거다. 그리고 부하들 다 뒤진 다음에나 나온 겁쟁이 새끼가 말이 너무 많은 거 아니야? 바로 나오면 뒤질까 봐 내 힘 다 빼놓고 나온 거잖아. 안 그래?”
“눈앞의 결과를 부정하는 건가? 네가 말한 것들이 뭐가 중요하지? 결국 난 승리하여 살아남았고 넌 내게 무릎 꿇었다. 중요한 건 현재다.”
“말은 똑바로 하자고. 너한테 무릎 꿇은 게 아니라 그냥 뒤질 거 같이 힘들어서 앉아있는 거니까.”
엄청난데.
웃으면 안 되는 상황이지만 입가로 미소가 그려졌다.
남자는 분명 죽기 직전이었음에도 상대에 대한 굴복이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 같은 게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상대를 못 죽여서 조금 아깝다는 듯한 느낌뿐이었다.
“어떤가? 지금이라도 내게 오는 것은. 넌 어차피 주인을 위해 싸우는 개. 더 강한 주인을 위해 싸우거라.”
“풉… 푸하하하하!”
남자가 고개를 뒤로 젖히고 웃음을 터뜨렸다.
도중에 쿨럭대는 걸 보니 진심으로 빵 터진 것 같았다.
“이름이 뭐라 그랬더라? 칼마였나?”
간신히 웃음을 그친 남자가 칼마라 불린 존재를 바라봤다.
“칼마 새끼야. 잘 들어라. 네 말대로 난 주인을 위해 싸우는 번견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나를 위해 싸우는 건 아니야. 적어도 내 주인은 내가 고르지. 내가 목숨 바쳐 싸워도 되는 존재인지 말이야. 그리고 내가 모를 거라 생각하나?”
“…?”
“네놈의 검은 얼음으로 날 지배할 수 없어서 그런 제안을 하고 있다는 거.”
“!!”
어째선지 칼마는 이번 말엔 큰 동요를 보였다.
미세하게 진동하는 공간의 얼음이 그 증거였다.
“내 주인이 되고 싶다면 최소한의.”
숨이 차오르는지 다시 한번 호흡을 고른 남자가 고개를 들며 두 팔을 활짝 펼쳤다.
“자격을 갖추어라.”
“건방진…!!”
흥분한 칼마의 검은 얼음이 뻗어지고.
푸화아아아악!!
얼음이 남자의 몸을 꿰뚫는 것을 마지막으로 공명은 끝이 났다.
* * *
공명이 끝나고 돌아온 기록소.
“!!!”
옆에 있던 아이리가 화들짝 놀라는가 싶더니 크게 뒤로 물러섰다.
“배, 백운 님! 괜찮으세요!?”
자기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물러난 건지 다시 다가오려는 아이리에.
“잠시만요. 오지 마세요.”
손을 들어 괜찮다는 제스쳐를 취했다.
오씨.
시퍼렇게 변한 몸을 내려다봤다.
공간을 가득 채운 검은 얼음의 한기.
그 한기 속에 있다 와서인지 온몸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시간이 멈춰졌던 아이리 입장에선 갑자기 말도 안 되는 한기가 뻗어진 셈이니 본능의 위험 경고에 물러난 것이었다.
큰일 날 뻔했네.
내가 큰일날 뻔한 건 아니었다.
나야 몸이 워낙 튼튼해 괜찮지만 아이리는 조금만 더 한기에 오래 노출됐다면 위험할 뻔했다.
재빠르게 거리를 벌린 건 훌륭한 선택이었다.
“후우우.”
숨을 내뱉고 도로 들이마시며 천천히 호흡을 골랐다.
원래도 알고 있긴 했지만 정말 더럽게 지독한 한기였다.
단순히 겉만 침범한 게 아니었다.
몸속 깊은 곳까지 한기의 영향이 뻗어 있었다.
돌아오네.
몇 번인가 숨을 쉬자 퍼렇게 변했던 피부색이 원래의 색을 되찾았다.
온기가 돌아온 건 물론이었다.
“대체 무슨…!”
“그러게요. 도끼 좀 만졌을 뿐인데 갑자기 한기가 뻗치더라고요.”
모르는 척하며 앞에 있는 도끼를 툭툭 건드렸다.
“이젠 안 그러네. 뭐였지.”
내가 멀쩡해지자 다가온 아이리도 조심스럽게 갈라드의 도끼를 건드려보았다.
아무 반응이 없자 어깨를 으쓱이더니 날 바라보는 아이리.
“백운 님. 원하신 건 얻은 건가요? 솔직히 도끼를 가져가거나 그러실 줄 알았는데 툭 건드리고 끝이네요.”
“하하! 가져가다뇨! 어떻게 기록소에 보관 중인 걸 막 가져가고 그러나요.”
꼴깍.
대답하면서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인간을 제대로 꿰뚫어 볼 줄 아는 아이리였다.
만약 여기에 있는 게 갈라드의 도끼가 아니라 내가 찾고 있는 창이었다면 망설임 없이 꿀꺽했을 것이다.
보라색이라 다행이야.
한차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조금 전 공명을 떠올렸다.
두꺼운 검은 얼음 속에 갇혀 있던 붉은색 창.
그걸 게이볼그라고 가정한다면 칼마란 존재 앞에서 욕을 쏟아내던 남자의 이름으로 떠오르는 건 하나뿐이었다.
쿠훌린.
쿨란의 번견이자 심장을 꿰뚫는 가시 창의 주인이라 불린 아일랜드의 영웅이었다.
조금 혼란스럽긴 하네.
지금까지 무기를 찾을 땐 얼추 시대 등을 고려하며 유추하곤 했었는데.
이번엔 그러는 게 별 의미가 없어 보였다.
신화 속 인물인 쿠훌린이 바이킹과 동시대에 살았음은 물론이고 데몬 새끼와도 연관이 있다니.
알고 있던 시간대에선 이미 거리가 한참 멀어진 상태였다.
칼마란 새끼도 꽤 오래 살아온 거 같고.
조금 전 공명에서 본 검은 얼음은 지금 아일랜드를 덮고 있는 것과는 질적으로 차이가 컸었다.
머금은 한기의 정도나 얼음 자체의 강도 등이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강력했다.
엄청 약해졌다는 건데.
당장 생각나는 건 공명에서 본 심장 부근의 깊은 상처였다.
칼마를 죽이진 못했지만 오랜 시간 회복이 필요할 정도로 많은 대미지를 줬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지금까지 무사할 수 있었던 건가.
아주 오랜 세월동안 죽지 않고 존재해온 칼마.
그럼에도 아직까지 아일랜드가 가라앉지 않을 수 있었던 건 마지막 쿠훌린의 일격 덕분인 것 같았다.
일 년 뒤.
좌우로 왔다리 갔다리 하며 턱을 문질렀다.
아일랜드에 얼음이 나타난 시점과 가라앉는 시점을 생각해봤을 때.
칼마는 쿠훌린에게 입었던 상처를 회복하고 움직일 수 있는 상태가 된 모양이었다.
“아이리 님. 혹시 오래된 서적이나 역사책에 검은 얼음에 관련된 기록은 없나요?”
“음…. 저도 딱히 그런 쪽에 관심이 있는 건 아니어서요. 열심히 읽거나 제대로 찾아본 건 아니지만… 제가 아는 한도 내에서 검은 얼음이 등장한 건 이번이 처음이에요.”
“그렇군요.”
부서진 게이볼그는 검은 얼음 속에 갇혀 있었다.
공명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창을 뒤덮은 얼음은 계속해서 두터워졌고 말이다.
그 누구도 절대 창을 꺼낼 수 없도록 꽁꽁 둘러싸는 느낌이었다.
뾰족한 것이 작은 산 느낌이었지.
창을 둘러싸고 있던 얼음의 형태를 떠올리며 빙글 몸을 돌렸다.
“어디로 가시게요?”
“아까 그 서재 좀 다시 둘러보려고요.”
아이리가 따라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공식적으로 인정된 서재가 아니라 아까 봤던 그곳요?”
“네.”
왠지 공식적으로 인정된 책엔 얼음에 관련된 내용이 없을 것 같았다.
만약 있었다면 아이리가 아니더라도 얼음이 처음 등장했을 때 뭐라도 이야기가 나왔을 테니까.
관련된 내용이 기록된 적이 있다면.
곰팡이와 함께 사람들에게 외면당한 채 기록소에서 묵혀지고 있는 책일 가능성이 조금 더 높았다.
“제가 또 비공식적인 걸 좋아해서요. 한 번 쭉 읽어보려고요.”
의아해하는 아이리에게 말을 건넨 뒤.
서재 쪽을 응시하며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머릿속으론 칼마와 창을 둘러싼 검은 얼음을 떠올린 채였다.
칼마년아. 좋은 말로 할 때.
오독.
내 창 가져와라.
* * *
아일랜드의 깊은 심해.
점점 두터워지고 칠흑으로 변하는 얼음 속에서.
번쩍.
칼마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서늘하게 새어 나오는 얼음빛.
몇 번인가 눈을 굴리던 칼마의 얼굴로 미세한 인상이 찌푸려졌다.
‘사라지지 않았다.’
칼마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고 있는 존재.
분명 얼음 조각을 내보내며 사라질 거라 여기고 잠들었었는데.
그 기운이 여전히 칼마의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왜 거슬리는 거지.’
깊은 잠에 빠져있었던 칼마를 깨울 정도의 기운.
이게 대체 무슨 기운이고 자신이 왜 이렇게 신경 쓰는지는 칼마 본인도 알지 못했다.
단지 본능으로 위험이 느껴졌다.
그리고 위험을 느끼자 떠오르는 게 있었다.
과거 자신의 심장을 노렸던 쿠훌린의 불길한 창.
‘….’
생각을 마친 칼마가 손을 휘둘러 얼음 조각을 뿌려냈다.
‘나의 아이들아.’
서늘한 칼마의 명령이 조각을 타고 바다로 뻗어 나갔다.
‘창을 지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