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7화. 얼음산
오랜만의 독서구만.
충혈된 눈을 비비며 다음 책으로 손을 옮겼다.
갈라드의 도끼에서 기억을 본 후 기록소의 서재로 들어온 지 다섯 시간.
이후 아이리와 난 쉴 새 없이 책을 뒤지며 얼음산의 흔적을 찾고 있었다.
“이 책엔 딱히 관련된 게 없어 보이네요.”
한차례 눈을 비빈 아이리가 보고 있던 책을 옆으로 밀었다.
뜻하지 않은 독서라 그런지 나 이상으로 무척 피곤해 보였다.
“아이리 님. 좀 쉬세요. 나머지는 제가 좀 볼게요.”
“아니에요. 장관이 되고 나면 하루 종일 활자만 보고 있어야 할 텐데요. 사전 연습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그리고.”
아이리가 심각한 얼굴로 내 옆에 놓인 메모지를 바라봤다.
다섯 시간 동안의 독서로 아무것도 얻은 게 없는 건 아니었다.
“검은 얼음이 이전부터 존재했었다는 게 좀 불길하게 느껴져서요.”
책에서 검은 얼음 비스무리한 게 처음 등장했을 땐 약간 긴가민가했지만.
곧이어 다른 저자의 책에서도 비슷한 게 등장하며 심증은 확증으로 변해갔었다.
저자들은 각각 다른 시대를 살았기에 부르는 호칭은 달랐지만, 묘사된 걸 보면 검은 얼음의 특징들이 분명했다.
“여기 있는 책들도 재조사를 해야 할 거 같아요. 아마 너무 비현실적인 내용이어서 허구라고 치부해버린 모양이니까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검은색으로 이루어진 얼음으로 지독한 한기를 뿜어내는 얼음, 부서졌음에도 곧바로 회복해버리는 얼음.
실제로 검은 얼음을 본 이가 아니라면 믿기 힘든 내용이긴 했다.
심지어 책에서 얼음을 찾아낸 장소도 아주 깊은 동굴이나 지하같이 사람의 발길이 쉽게 닿지 않는 곳이었다.
“좀 그럴싸한… 어?”
계속 감기려는 눈꺼풀을 간신히 버텨내며 책을 읽던 중.
눈을 번쩍 뜨이게 하는 글귀가 보였다.
# 산에선 지독한 한기가 뿜어졌다. 조금만 다가가도 소름이 돋고 오한이 들어 감히 올라갈 생각이 안 드는 산. 그것은 검은 얼음으로 이루어진 산이었다. 산은 생명체의 탄생 및 접근을 원천적으로 거부하는 느낌이었다.
공명에서 봤을 땐 산이라 부를 정도의 크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얼음이 두터워졌다면 충분히 가능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왜 없는 거냐.
책의 내용이 허구가 아니라고 가정한다면 내가 찾고 있는 얼음산은 존재했다.
문제가 있다면 지금 아일랜드에 그런 비슷한 산이 없다는 것이었다.
애초에 그렇게 특이한 생김새를 한 산이 있었다면 일 년 전이 아니라 수십 년 전부터 검은 얼음이 관측되었어야 했다.
톡… 톡.
손가락을 두드리며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커다란 산이 한순간에 뿅하고 사라지거나 하진 않았을 터였다.
산이 바다로 가라앉았다면 물이 높아지거나 하면서 눈에 띄는 현상이 생겼을 테니 그것도 아닐 거 같았다.
쉽게 알아보지 못하는 모습으로 가려졌다.
현재 가장 그럴싸한 추측이었다.
시간이 흐르며 먼지를 맞고 흙이 쌓여 검은 얼음의 모습을 감춰버렸을 가능성이 있었다.
칼마라는 놈이 의도적으로 숨겼을 수도 있고 말이다.
“아이리 님.”
“네?”
잠시 음 소리를 내다 방금 떠올린 것들을 물었다.
“혹시 아일랜드에 있는 산 중에서 나무나 풀이 자라지 않는 곳이 있을까요? 흙이나 바위로만 뒤덮여 있다거나 고런.”
검은 얼음의 한기가 얼마나 강력한지는 공명에서 본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런 한기 속에서 풀이나 나무 같은 생명체가 자라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
만약 얼음산이 감추어져 있다면 그 주변은 식물이든 동물이든 생명을 가진 건 아무것도 없을 것 같았다.
“아…!”
생각에 잠겼던 아이리가 손가락을 튕기며 눈을 떴다.
품에서 핸드폰을 꺼내 무언가를 검색한 아이리.
“여기요!”
아이리가 건넨 핸드폰을 받아 들었다.
멀리서 찍은 듯 보이는 거대한 산 사진.
회색과 검은색으로 뒤덮인 산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황폐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 생명을 잃어버린 산, 클라크.
“제가 환경부 말단 직원이었을 쯤인가. 클라크가 한 번 크게 이슈화 됐었어요. 당시 국토 재건 사업 중 하나로 황폐화된 지역에 나무와 꽃을 심는 프로젝트를 진행했었거든요. 당연히 클라크도 대상에 포함됐었고요.”
“심었는데 안 자란 건가요?”
“아뇨. 시도조차 못 했어요. 잠시만요.”
핸드폰에서 뭔가를 찾던 아이리가 말을 이어갔다.
“당시 클라크에 관한 보고서예요.”
# 산을 둘러싸고 있는 토건이 너무 단단하고 깊어 이를 강제로 파헤치려고 할 시 산 자체가 붕괴할 위험이 있음. 지대가 형성된 건 아주 오래된 것 같은데 토건이 어째서 이렇게 단단한 건지는 현재로썬 원인을 알아내기 힘듦.
“이런 이유로 클라크는 프로젝트에서 제외됐었어요. 원인도 모르는데 산이 무너질지도 모르는 위험을 안고 진행할 순 없었거든요. 그런 리스크를 안을만한 프로젝트도 아니었고요.”
“오호.”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킨 후.
하늘로 크게 기지개를 켰다.
오도독!
하도 굽히고 있었던 탓인지 몸 여기저기에선 비명이 들려왔으나.
좋았어.
가능성이 높은 산을 발견함으로써 마음은 한층 가벼워진 상태였다.
“아이리 님. 그 클라크라는 산.”
아이리를 바라보며 눈을 반짝였다.
“어디에 있나요?”
* * *
- 더블린에서 무척 먼 곳이에요. 못해도 300km는 떨어져 있을 거예요.
갈 거라면 비행기를 준비해주겠다는 아이리에 고개를 저었었다.
안 그래도 난리법석인 더블린에서 전용기를 준비하고 타고 하는 것도 일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만 기다리자.
더 이상의 지연은 사절이었다.
무슨 저주라도 받은 건지 가는 곳마다 날 방해하는 놈 천지였다.
더블린에 더 머물렀다가 제2의 로컨 같은 놈이 또 튀어나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파앙!
연기를 한 번 더 터뜨리며 밤하늘을 가로질렀다.
속도도 칼데아 윙이 비행기보다 압도적으로 빠르니 이쪽이 여러모로 좋은 선택이었다.
물론 쫄보답게 혹시나 어디 레이더에 걸려도 잘 좀 부탁한다고 아이리에게 미리 말해놨고 말이다.
그나저나.
오돌오돌오돌!
더럽게 춥다!
말을 해뒀어도 엄한 곳에 걸리지 않게 최대한 상공에서 비행하는 중이었다.
그 덕에 방한 대책을 강구했음에도 차가운 바람이 몸 구석구석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옛날이었으면 얼어 죽었다 이거.
왕의 육체라 동상에 걸린다거나 어디가 잘못되진 않으나 추운 건 추운 거였다.
찬 바람을 맞다 보니 눈에선 쉴 새 없이 눈물까지 흐르는 상태.
마지막으로 언제 울었는지 기억도 안 나는데 외딴 아일랜드 하늘에서 눈물을 흘릴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저건가.
빨리 좀 도착해라! 기도하며 연기를 몇 번이나 터뜨렸을까.
저 너머로 작은 성벽이 눈에 들어왔다.
- 로스 캐슬이란 성벽이에요. 클라크는 거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해안가에 있어요.
그리고 조금 더 가자 내 목적지인 클라크가 보였다.
아까 사진으로 본 것보다 훨씬 더 황폐한 산이었다.
더럽게 황량하네.
속도를 줄이며 천천히 산 주변을 돌아보았다.
아이리에게 들었던 대로 클라크엔 나무는커녕 풀 한 포기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대충 봐도 생명체는 절대 살지 않는, 죽음 그 자체인 산이었다.
으음.
눈을 이리저리 돌리며 산을 살폈다.
겉만 봤을 땐 당장 검은 얼음과의 접점은 없어 보였다.
어디 한 번.
산으로 다가가 손을 대보았다.
만약 산의 내부가 검은 얼음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조금이라도 한기가 느껴질 것 같아서였다.
음… 딱히 뭐가 느껴지진 않는 거 같은데.
고개를 갸웃거리며 잘못 짚은 건가 생각하고 있을 때.
“크르르르…!”
많은 수의 접근이 느껴지는가 싶더니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리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몰려들어 날 응시하고 있는 타룬 부대가 보였다.
연구실에서 사라졌다는 녀석들인 것 같았다.
수영해서 왔나.
녀석들은 이 추위에 온몸이 폭삭 젖어있었다.
예전에 봤을 때보다 검은 얼음이 몸을 덮고 있는 범위가 넓어진 건 물론이었다.
“우리 구면이지? 또 봐서 반갑네.”
타룬을 돌아보며 방긋 미소를 그려주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한 건 아니었다.
이번엔 진심이었다.
눈을 희번덕거리는 타룬을 본 순간 가장 먼저 반가움을 느꼈었다.
“사실 긴가민가하고 있었거든. 제대로 생각한 게 맞는지 말이야. 그리고 고민 중이었어. 가능성 때문에 이방인인 내가 다짜고짜 산을 뽀개봐도 되는 건지.”
타룬을 발견한 순간 이 걱정과 고민은 깨끗하게 사라졌다.
“그런데 너네를 보니까 확신이 드네. 더블린에 있던 새끼들이 여기까지 헐레벌떡 수영해서 올 정도면.”
뚜둑.
“이곳에 뭐가 있어도 있겠구나란 확신이 말이야.”
“크라아아악!”
말을 알아들은 건지 모여들었던 타룬 부대가 내 쪽으로 몸을 날렸다.
늘어난 검은 얼음 덕분인지 이전에 봤을 때보다 훨씬 날렵하고 강해진 움직임이었다.
“빨라졌네.”
가볍게 날갯짓해 하늘로 몸을 옮겼다.
쿵!
아무도 없는 곳을 덮치며 훽 고개를 드는 타룬 부대.
오우.
수백 개의 푸른 눈깔이 날 응시하니 약간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달려 들어봐. 힘차게 뛰면 닿을 거리잖아.”
말을 잘 듣도록 설계된 탓일까.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타룬 부대가 괴성과 함께 몸을 날려왔다.
“세지긴 세졌는데 머리가 깡통인 건.”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타룬 부대.
칼데아의 연기를 커다란 두 개의 손아귀로 만들어.
“여전하네.”
놈들의 몸을 움켜쥐었다.
빠드드드득!!
* * *
찌부가 된 놈들을 휙 던져버리고 산으로 몸을 앉혔다.
여전히 검은 얼음과 관련 없는 척 버티고 있는 산.
괘씸한 산의 표면을 좀 벗겨 줄 생각이었다.
[유탈라스 - 1단계 의태]
오른손으로 모든 비늘을 모으고 산의 중심부로 크게 휘둘렀다.
콰아아아앙---!!
귀를 때리는 굉음과 함께 순식간에 갈라지는 클라크.
타격을 견디지 못한 지면이 무너지며 커다란 산사태가 일어났다.
[이카로스 - 칼데아 윙]
다시 날개를 꺼내 산에서 조금 떨어진 허공까지 날아올랐다.
주변에 뭐 없어서 다행이네.
마을이라도 있었으면 이런 무식한 방법은 불가능했을 텐데.
불길한 산이라 그런지 일대엔 그 흔한 농경지조차 보이지 않았다.
“콜록!”
의도치 않게 만들어버린 미세먼지에 기침하며 먼지가 잦아들길 기다렸다.
사아아아…!
기다리기를 잠시.
온몸으로 밀려드는 저릿한 한기에.
펄럭!
날개를 크게 펄럭여 먼지를 뒤쪽으로 밀어냈다.
반대 방향으로 먼지구름이 사라지며 서서히 모습을 드러나는 산의 본체.
“허.”
나도 모르게 탄성이 터져 나왔다.
방금 부숴낸 토지는 그야말로 겉면이었다.
처음 봤던 클라크의 모양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는 검은 얼음.
조금 전 일격에 부서졌던 걸로 보이는 얼음은 순식간에 재생되며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그때 봤던 얼음보단 여전히 약하다.
칼마가 상처 입은 후 생성된 얼음이라 그런지 공명에서 봤던 것보단 검은색의 진함이 덜했다.
덕분에 달빛을 반사하며 장관을 연출 중이었고 말이다.
아직 황금빛은 안 보이지만.
산이라고 부를 만큼 어둡고 두터운 얼음이었다.
중심부를 파봐야 확실해질 것 같았다.
회복에 자신이 있는 모양인데.
산의 정상으로 올라가 착지한 뒤 얼음 위로 손을 얹었다.
이것도 한 번 회복해봐.
[라 - 불꽃의 문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