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8화. 영웅이 아닌
아이리가 멍한 얼굴로 모니터를 응시했다.
백운이 클라크로 날아가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다.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
사실 아이리가 입을 벌린 건 조금 전의 일이었다.
- 크라아아아!
찾고 있던 타룬 부대가 더블린 반대편에서 나타난 것 때문은 아니었다.
놈들은 놀라서 입을 벌리기도 전에 백운에 의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예측할 수가 없네.’
입이 벌어진 건 백운이 선택한 산 검증 방법이었다.
클라크가 검은 얼음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걸 알아내기 위한 방법.
무기왕이라면, 백운이라면 어떤 방법을 사용할지 궁금했었는데.
- 콰앙!
백운은 별로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클라크로 냅다 주먹을 꽂아버렸었다.
그 한 방에 산은 무너져 내렸고 뒤이어 검은 얼음이 나타났고 말이다.
그야말로 완벽하고 깔끔한 검증 방법이었다.
물론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 이번엔 불길이 솟구칩니다!!
모니터 너머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클라크 근처에서 근무 중인 아일랜드의 기관원.
주변에 뭐가 없다곤 해도 아무도 모르게 산을 무너뜨리는 건 불가능했다.
당연히 비상망으로 연락이 퍼졌고 이에 아이리가 나서 괜찮으니 대기해달라고 말을 한 것이었다.
# 아이리 장관님. 정말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아도 되는 겁니까?
여기에 말도 안되는 불길이 치솟자 다시 한 번 난리가 난 상황.
이번 물음엔 아이리 역시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어떻게 단 한 명의 사람이 저 거대한 산을 뒤덮는 불길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괜찮습니다. 대기하세요.”
마른침을 한차례 삼킨 아이리가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사실 괜찮지 않아도 지금 당장 아일랜드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저 말도 안되는 불길 아래로 가는 건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였다.
“…!!”
모니터를 통해 백운의 행동을 지켜보던 아이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춤거리며 모니터 바로 앞까지 다가간 아이리.
아이리의 얼굴은 아까보다 더욱 큰 놀라움으로 물들어 있었다.
- 소멸시킬 수 없습니다.
아무리 때려 부숴도 순식간에 복구하던 검은 얼음.
갖은 방법으로도 끄떡 않는 얼음에 연구 자료에도 소멸시킬 수 없음으로 결론 내려졌었다.
하지만 지금, 아이리의 눈앞에선.
“검은 얼음이…!”
산이 증발하고 있었다.
* * *
푸화아아아아악!
불꽃을 최대로 일으키며 아래를 향해 나아갔다.
그냥 불꽃을 뿌려낼 수도 있었지만 혹시나 무기까지 상처 입힐까 싶어 직접 내려가는 중이었다.
“좀 뜨겁지?”
빠르게 녹아내리는 산을 보며 검은 얼음의 주인 칼마를 떠올렸다.
아주 오만하기 짝이 없던 자세와 말투로 자신은 무적이라는 듯 말했던 칼마.
그랬던 칼마의 얼음을 녹이고 있자니 통쾌한 기분까지 들었다.
“라의 불꽃이라는 건데 많이 뜨거울 거야.”
끝도 없이 뿜어지는 불꽃을 바라봤다.
내가 사용하는 주체임에도 마른침이 삼켜지는 위력이었다.
당장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 역시 버티지 못해 유탈라스와 함께 사용해왔고 말이다.
그래도 단단하긴 하네.
검은 얼음의 강도는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지독했다.
라의 불꽃을 상대로 이 정도 속도라니.
불과 닿는 면에선 말도 안되는 저항이 일어나고 있었다.
눈사람도 아니고 아주 많이 쌓아…!?
순조롭게 내려가다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깜짝이야.”
원활하게 녹아내리던 얼음 속에서 뻗어진 무언가의 손길.
생김새를 보니 얼음 안에서 잠자고 있던 칼마의 따까리 데몬인 것 같았다.
모습을 다 드러내지도 못한 채 불길에 녹아버려 정확한 생김새는 보지 못했지만 말이다.
얼음에다 빙어 마냥 박아놨었네.
이후에도 데몬의 손길은 쉬지 않고 계속해서 등장했다.
혹시 있을지 모르는 침입자를 위해 적지 않은 수를 박아 놓은 모양이었다.
대체 뭘 숨겨놨길래.
불길에 휩싸인 손바닥에 힘을 주며 속도를 올렸다.
우리 칼마가 이리도 꽁꽁 싸매놨을까.
그렇게 기대 가득한 마음으로 얼마나 나아갔을까.
검은 얼음을 뚫고 나오는 빛에 주먹에서 불길을 거둬냈다.
깊이도 숨겨놨다.
산의 중간쯤에서 한참이나 더 내려왔으니 바닥보다 약간 위인 지점이었다.
공명에서 봤던 대로 날이 망가진 채 잠들어 있는 붉은 창.
꽤 오랜 시간 갇혀 있었을 텐데도 창은 특유의 붉은빛을 잃지 않은 상태였다.
치이이이익!
최소한의 불꽃만 일으키며 창으로 손을 뻗어 나갔다.
실시간으로 녹으며 수증기를 일으키는 검은 얼음.
수증기로 주변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됐을 때.
“크라아아아악!!”
수증기 너머로 데몬의 괴성이 들려왔다.
약간 먼 거리에서 소리가 좁혀오는 걸 보니 산에 박혀 있던 놈은 아니었다.
아마 산 방어를 위해 새롭게 보내진 놈 같았다.
여러 소리가 섞인 걸 보니 한두 마리가 아닌 듯했고 말이다.
마음이 급하긴 급한가 보네.
산이 녹아서 그런 걸까.
급한 건 둘째 치고 칼마가 화들짝 놀란 모양이었다.
계속해서 새로운 놈들을 보내는 게 그 증거였다.
화아아악.
생긴 거 봐라.
얼마 지나지 않아 울음소리의 주인공들이 수증기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청새치와 같은 조각을 받은 건지 타룬보다 훨씬 거대하고 진한 얼음으로 뒤덮여 있는 데몬들.
변형이 아주 뒤죽박죽이라 데몬이 되기 전에 뭐였을지는 쉽게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열심히 뛰어왔는데 어쩌냐.”
칼마가 보고 있기를 바라며 사방에서 내게 쏘아지는 놈들에게 미소를 그린 후.
“조금 늦었는데.”
뻗은 손으로 창을 움켜쥐었다.
* * *
따듯하네.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적당히 훈훈하면서 포근함이 느껴지는 온도였다.
으.
정면으로 비치는 햇빛에 손을 들어 올렸다.
손바닥으로 빛을 가리며 찡그렸던 눈을 뜨자.
“!?”
태양을 등지고 있는 남자의 형체가 보였다.
“호오.”
이어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명에서 들었던 시원시원한 사이다 같은 목소리.
데몬의 질척이는 울음소리만 듣다가 들으니 귀가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다른 사람을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완성된 공간은 어느 무너진 성 내부였고 남자는 허물어진 벽 근처에 걸터앉아 있었다.
오우.
빛에 눈이 익숙해지자 보이는 남자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깜짝 놀랐다.
뒤로 넘겨진 머리 아래로 드러난 훤칠한 이목구비.
콧대와 눈매, 눈썹 할 것 없이 모든 게 깔끔하고 시원하게 뻗어진 것이 목소리와 아주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꾸벅.
양손을 배꼽 위에 올리고 허리를 굽혔다.
“안녕하세요. 백운이라고 합니다.”
저벅.
몸을 일으킨 남자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몸은 내가 숙여야 할 거 같은데… 어쨌든. 내 이름은 쿠훌린이다.”
홀리…!
이미 알고 있었지만 다시 들으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무려 신화 속의 인물을 직접 만나고 있다니.
무기를 찾을 때마다 항상 느끼지만 내가 무기왕이란 건 정말 커다란 행운이었다.
“내 창을 찾은 건가?”
고개를 끄덕이며 창을 찾기까지의 과정을 간략하게 말해주었다.
“허.”
탄성을 터뜨린 쿠훌린이 재밌다는 표정을 지었다.
“창은 그 빌어먹을 얼음에 집어 삼켜졌을 텐데. 그걸 녹여 버렸다라.”
한참 날 바라보던 쿠훌린이 무너진 벽 한쪽을 가리켰다.
“일단 앉자고. 미안하지만 대접해 줄 차 같은 건 없어. 여기엔 아무것도 남은 게 없거든.”
“괜찮습니다. 저 차 안 좋아해요.”
쿠훌린을 따라 걸으며 말을 이었다.
“여긴 어딘가요?”
“내가 머물렀던 성이다. 물론 내가 성의 주인이라거나 그런 건 아니고.”
책의 내용이 진짜였나.
여기저기 흩어진 잔해를 보니 과거엔 꽤 아름다웠을 것 같은 성이었다.
죽은 장군을 대신해 공주를 호위했다는 이야기가 떠오르는 장소였다.
“내가 지키던 사람이 살던 곳이었지.”
“혹시 공주님…?”
“어떻게 아는 거지?”
“책에서 읽었어요. 쿠훌린 님은 장군을 죽이고 공주님의 호위가 됐다고요.”
한차례 웃은 쿠훌린이 어깨를 으쓱했다
“누가 기록한 건지 신기하네. 주변에 그렇게 할 일 없는 놈이 있었나.”
진짠가 보네.
“신기하네요. 전 사실 쿠훌린 님의 이야기를 다르게 알고 있었거든요.”
“나의 이야기?”
궁금해하는 쿠훌린에게 지금껏 내가 알고 있었던 신화를 말해주었다.
“큽…!”
몇 차례 참는 듯하던 쿠훌린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지어내는 걸 좋아하는 게 사람의 기본적인 특성이라곤 해도 엄청 멀리 가는군. 신화 속 영웅이라니.”
웃음을 그치며 처음처럼 걸터앉은 쿠훌린.
쿠훌린의 얼굴로 묘한 표정이 그려졌다.
“난 신화 속 존재 같은 게 아니야. 당연히 영웅은 더더욱 아니고.”
고개를 휘휘 저은 쿠훌린이 날 바라봤다.
“영웅이란 단어의 의미가 패배자나 실패자 같은 걸로 바뀐 게 아니라면 말이야.”
패배자…?
의아한 표정을 짓자 쿠훌린이 성 중앙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예쁘게 꾸며졌지만 반으로 갈라져 버린 의자가 놓여 있었다.
“난 번견이다. 무언가를 지켜내야만 하는 존재지.”
쿠훌린의 얼굴로 슬픈 빛이 어렸다.
“하지만 난 아무것도 지키지 못했다. 지켜주기로 했던 사람도, 그 사람이 좋아했던 다른 것들도. 무엇하나 지키지 못했어.”
지난날의 일이 떠올라서인지 깊은 한숨을 내쉬는 쿠훌린.
조용히 그런 쿠훌린을 바라보았다.
사이다 같은 시원함 뒤에 숨겨진 깊은 슬픔.
슬픔 속엔 자책이나 후회 같은 것들이 잔뜩 뒤섞여 있는 것 같았다.
“원래는.”
다시 말을 시작한 쿠훌린이 손을 한 번 내젓자.
날 둘러싸고 있던 배경이 바뀌었다.
바뀐 건 장소가 아닌 시점이었다.
“이런 곳이었지.”
와우.
예상했던 대로 성은 아름다웠다.
휘황찬란하진 않으나 은은하면서도 따스한 분위기를 가진 성.
내가 서 있는 곳은 공주의 방인 듯했다.
“쿠훌린.”
뒤이어 목소리가 들려오고.
방의 중앙으로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공주의 모습이 나타났다.
아주 맑고 선한 인상을 가진 공주.
공주는 의자에 걸터앉은 채 쿠훌린이 앉은 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쿨란 공주.”
그리움이 사무친 목소리와 함께 들려온 이름.
신화 속에선 대장장이라 알려졌던 이의 이름이었다.
“내가 지켜야 했지만 지키지 못한 존재.”
너머에 나타난 쿨란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는 쿠훌린.
그런 쿠훌린을 향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그게 어디서 태어났는지, 언제 이곳까지 와있었는지는 나도 모른다. 하지만 그놈으로 인해.”
쿠훌린이 다시 한번 손을 휘저었다.
“…!!”
눈앞엔 더 이상 따듯한 성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여기저기 부서져 허물어진 성과 그곳을 뒤덮고 있는 검은 얼음만이 보일 뿐이었다.
그리고.
역시 칼마 그 새끼였구나.
쿠훌린이 지켜야 하는 존재인 쿨란은 진하고 거대한 검은 기둥에 갇힌 상태였다.
생기 넘치던 얼굴은 지독한 한기에 그 온기를 잃고 파랗게 질려 있었다.
“난 심지어 모든 걸 앗아간 놈을 죽이지도 못했지.”
눈을 감은 쿠훌린이 뒤로 고개를 젖혔다.
“다시 말하지만 난 영웅 같은 게 아니다.”
쿠훌린의 입가로 희미한 미소가 그려졌다.
“제 주인조차 지키지 못한 무능력한 개일 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