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3화. 가르다
두껍게 감싸고 있던 얼음이 풀리며 칼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리석구나.”
칼마의 낮은 목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시선은 바다 아래를 향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백운과 함께 바다 저 아래까지 처박혔을 검은 얼음의 산이었다.
“재앙의 한기가 고작 그 정도일 거라고 생각한 거냐.”
당시 자리엔 없었지만 칼마 역시 알고 있었다.
백운에게 자신의 얼음을 녹일 힘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크게 걱정하진 않았다.
백운이 지금까지 봐 왔던 얼음은 칼마가 가진 한기의 아주 일부분일 뿐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은 오만하구나.”
칼마가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조금 전 찰나의 순간, 백운은 승리를 확신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었다.
마치 불꽃을 뿜어내기만 하면 이제부터 칼마의 위치를 찾아내는 건 물론 모든 얼음을 단숨에 녹여낼 수 있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과거 그 창잡이의 눈빛도 마찬가지였다.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재앙 그 자체인 나를 꿰뚫을 수 있을 거라 굳게 믿었었지. 고작 창 하나로 말이야.”
그때를 떠올리던 칼마가 웃음을 터뜨렸다.
자신의 창이 심장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걸 인지한 순간.
패기롭게 도전했던 쿠훌린의 몸은 그대로 무너졌었다.
얼굴만큼은 죽는 그 순간까지도 오만방자했었지만 말이다.
“아쉽구나. 마지막 네놈의 표정을 보지 못해서.”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도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했던 백운.
백운도 쿠훌린과 마찬가지였기에 똑같은 절망을 맛보게 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한기를 다 뿜어내지 않고 기다린 것이었다.
백운이 목이 빠져라 기다리던 힘을 뿜어내는 순간, 오랜 시간 벼려온 진짜 한기로 불꽃을 꺼뜨리기 위해서 말이다.
“이미 얼어버렸겠지만 조금이라도 숨이 붙어 있다면.”
칼마가 천천히 얼음산으로부터 등을 돌렸다.
“지나치게 오만했던 자신을 탓하도록 하거라.”
* * *
깜짝이야.
라의 불꽃을 뿜어내려는 순간 덮쳐온 칼마의 검은 얼음.
빠르게 내 몸을 감싼 얼음은 날 바다 아래까지 처박아버렸다.
힘을 숨기고 있었던 건가.
얼음의 양도 양이지만 지금까지 본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한기였다.
공명에서 봤던 것보다도 훨씬 강력해 순간이지만 몸이 약간 굳을 정도의 한기.
덕분에 적응하느라 심해까지 처박히는 사이 이렇다 할 반격을 하지 못했다.
음.
여기에 예상하지 못한 게 한 가지 더 있었다.
이제 빠져나가야지 생각하며 불을 뿜어내려는 순간, 주변의 모든 게 멈췄었다.
인지도 못 하고 죽은 줄 알았네.
원활하게 내쉬어지는 호흡을 느끼며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문양을 사용하고 있었으니 어딘가에 라가 있을 터였다.
“다크메타 다음은 검은 얼음인가.”
목소리와 함께 등 뒤로 따듯한 온기가 느껴졌다.
몸에 퍼져 있던 한기를 원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끔하게 지워버리는 온기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라 님!”
몸을 휙 돌리며 꾸벅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고개를 들기 무섭게 굳어버리고 말았다.
화르르르륵…!
말도 안 되는 양의 불꽃이 내 시야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내겐 따듯하게 느껴지고 있었으나 불꽃 한 줌 한 줌의 열기가 얼마나 강력한지는 본능으로 알 수 있었다.
“다양한 존재를 만나고 다니는구나.”
우렁찬 인사가 마음에 들었는지 싱긋 웃은 라가 말을 건넸다.
라는 여유로운 눈짓으로 날 뒤덮은 칼마의 얼음을 살피고 있었다.
“마가 낀 것 같습니다. 가는 곳마다 이런 애들이 있네요. 그런데 혹시… 저 위기였던 건가요?”
땀을 주륵 흘리며 질문을 건넸다.
항상 위험한 상황에 있다 보니 죽을 위기였는데 인지하지 못한 건가 싶었다.
바다의 바닥을 찍었고 몸도 한기에 적응했으니 슬슬 올라가려던 참이었는데.
사실은 불꽃으로 뚫을 수 없는 상황이었던가 하는 의문이었다.
“그럴리가.”
작게 웃은 라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여유로운 움직임으로 칼마의 얼음에 손을 갖다 대는 라.
“불안정하기 짝이 없는 한기.”
조소와 함께 낮게 읊조린 라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의 불꽃은 절대 꺼지지 않는다. 그저.”
불꽃이 일렁이는가 싶더니 라의 몸이 내 쪽으로 움직였다.
“어둠이 짙을수록 더 강하게 타오를 뿐이다.”
마른침을 삼키며 쳐다보고 있길 잠시.
라의 몸을 둘러싸고 있던 불꽃이 내게 밀려들기 시작했다.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서서히 내 몸속으로 흡수되는 라의 불꽃.
사방을 가득 채웠던 불꽃이 사라지기 무섭게 라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더 강하게 타올라….”
라의 입가로 희미한 미소가 그려졌다.
“잿더미로 만들어버려라.”
* * *
방송국 안으로 무거운 침묵이 찾아왔다.
두 눈을 크게 뜬 채 고요해진 모니터를 쳐다보는 사람들.
@ ….
쉴 새 없이 올라가던 채팅창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데몬의 한기에 덩달아 얼어버린 것처럼 그 누구도 채팅을 치고 있지 않았다.
손에 땀을 쥐며 무기왕과 데몬의 공방을 지켜보길 잠시.
무기왕의 불꽃이 일렁이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데몬의 얼음이 덮쳐왔었다.
그 얼음은 그대로 무기왕을 집어삼키고 바다 저 깊은 곳까지 처박히며 거대한 산을 만들어냈고 말이다.
@ 저거 지금…. 산이야?
간신히 채팅 한 줄이 올라왔다.
말하지 않아도 산이란 걸 알 수 있었기에 몰라서 물어본 건 아니었다.
그저 현실 감각이 떨어졌다.
손 한 번 뻗었을 뿐인데 거대한 얼음산을 순식간에 만들어내다니.
대체 저 모니터가 비추고 있는 데몬은 얼마나 강력한 존재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 무기왕은 저 아래에 박혀 있는 거고….?
“…!”
다시 올라온 채팅에 굳어있던 송유빈이 눈을 크게 떴다.
평소라면 부정적인 분위기를 깨기 위해 무기왕 못 믿냐고 노발대발 소리 질렀겠지만.
이번엔 그러기가 쉽지 않았다.
안 그래도 쉽지 않아 보였던 무기왕과 데몬의 공방전.
무기왕은 여러 무기를 꺼내며 대항했으나 쉽게 통하지 않는 모양새였고 그마저도 방법의 가짓수가 점점 떨어지는 것처럼 보였었다.
그러던 중 이런 상황이 생긴 것이고 말이다.
송유빈이 아니라 무기왕을 직접 아는 사람이 와도 긍정적인 말을 하기 힘들 터였다.
@ 무기왕이 진 거야?
@ 거짓말이지? 진짜 졌다고? 그 괴물 무기왕이?
@ 이번엔 정말 진 거 같은데… 무기왕이 약해서가 아니라 저 데몬이 너무 강해.
@ 인정. 저런 말도 안 되는 게 도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
@ 뭘 분석하듯이 평화롭게 말하고 자빠졌어? 무기왕도 안되면 저걸 누가 막아!? 데몬이 한국까지 오기라도 하면 어쩔 거고!
무기왕의 패배를 기정사실화 해버려서일까.
채팅창으로 부정적인 분위기가 번져나갔다.
당장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사람과 드디어 올 것이 왔다며 재앙과 종말을 논하는 사람, 여기에 무기왕은 거품이었다고 말하는 안티 세력까지.
가지각색의 사람이 등장하며 조금 전까지와는 다른 이유로 채팅창을 달구고 있었다.
“소… 송!”
간신히 추스른 조영천이 송유빈을 쳐다봤다.
좋지 않은 상황이지만 어쨌든 이대로 계속 있을 순 없었다.
무기왕이 패배했더라도 방송은 계속 흘러나가고 있었다.
“스으으읍….”
멍하니 채팅창을 보던 송유빈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잠시 멍했던 눈을 크게 치켜뜬 건 물론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무기왕은!!!!!!”
송유빈의 엄청난 샤우팅이 들려왔다.
방송국과 채팅창을 다시 얼려버릴 정도의 샤우팅.
가까운 곳에 있던 사람들은 귀에서 피가 나는지 만져볼 정도로 큰 소리였다.
“절대 지지 않습니다!! 여러부우우우우운!!!”
자기한테 외치는 건지 사람들한테 외치는 건지 헷갈리는 샤우팅이 끝나고.
방송국의 모든 이가 벙 쪄버린 사이 송유빈이 심호흡하며 숨을 골랐다.
솔직히 말하자면, 찰나의 순간이지만 송유빈 역시 무기왕이 진 건가? 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이 사실이 송유빈 스스로를 분노하게 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이 무기왕을 의심하다니.
찐팬 송송으로서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 드디어 미친 건가?
@ 원래도 미친 거 같긴 했는데.
@ 무기왕 져서 현실부정자 된 듯.
쾅!!
두 손으로 책상을 내리친 송유빈이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무기왕은 지지 않는다아아아아!!! 만약 무기왕이 지면!”
입술을 깨문 송유빈이 카메라를 향해 손가락질했다.
“저… 저거 말려야 돼.”
헛숨을 들이킨 조영천이 아찔함을 느끼며 주저앉은 사이.
송유빈이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제 전재산 다 기부하고 리포터 그만두겠습니다아아아아!!”
있는 힘을 다해 소리 지른 송유빈이 다시 모니터로 고개를 돌렸다.
@ … 미친.
@ 찐광기다.
@ 백수 어서 오시고.
@ 진짜 송유빈은 미쳤다.
채팅창의 사람들은 송유빈의 광기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도.
@ 맞아. 아직 모르잖아. 무기왕이 지금까지 보여줬던 거 생각하자.
@ 언터쳐블 무기왕. 무기왕은 절대 죽지 않는다!!
꺼져가던 희망의 불씨를 다시금 살려가고 있었다.
그렇게 송유빈을 포함한 모든 이가 간절한 마음으로 바닷속을 보고 있을 때.
반짝.
“!?”
두껍게 쌓인 얼음산 위로 붉은빛이 솟아올랐다.
마치 검을 휘두를 때 생기는 검격과 비슷한 생김새.
아주 찰나였지만 분명 핏빛에 가까운 검격이 반원 모양을 그리며 얼음산을 스치고 지나갔었다.
그리고 잠시 후.
푸화아아아아아악!!
검격이 지나갔던 길로 불꽃이 터져 나왔다.
* * *
[라 - 불꽃의 문양]
[동기화 - 작열의 각인]
고개를 내려 온몸에 새겨진 불의 각인을 응시했다.
각인에선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강력한 불꽃이 쉴 새 없이 뿜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각인이 새겨진 곳은 내 몸이 끝이 아니었다.
[쿠훌린 - 게이볼그]
한쪽 손에 들린 영롱한 핏빛의 게이볼그.
게이볼그에도 몸에서 이어진 작열의 각인이 새겨져 있었다.
라의 불꽃을 수도 없이 응축시키며 머금은 게이볼그는 붉게 달아오른 상태였고 말이다.
“후우우!”
물속에서 참고 있던 숨을 뱉어냈다.
여전히 사방은 칼마의 얼음 투성이었지만 아까 느껴지던 한기 따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불안정하기 짝이 없는 한기라 내게 도달하지 못하고 있었다.
시원하네.
완전히 갈라진 얼음산을 내려다봤다.
한 번.
단 한 번의 휘두름으로 칼마가 쌓아 올렸던 산을 가를 수 있었다.
[라 & 쿠훌린 - 하늘을 가르는 불의 창]
툭.
어깨에 창을 걸치며 멀어져 가던 칼마를 바라봤다.
싸움이 끝났다고 생각한 건지 자신을 감싸던 얼음에서 벗어나 본체를 드러낸 상태였다.
“야 아직 안 끝났는데.”
당황한 얼굴로 날 돌아보는 칼마를 향해 창을 겨누며.
입가로 여유 넘치는 미소를 그려 보였다.
“어딜 기어가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