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4화. 꿰뚫리다
처음엔 잘못 느꼈다고 생각했었다.
등을 돌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느껴진 열기.
- …?
낯선 감각에 칼마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혹한의 재앙인 칼마.
열기가 됐든 온기가 됐든 그 어떤 것도 한기를 뚫고 자신에게 도달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쭉 말이다.
- 스윽.
등을 돌리자 그곳의 풍경은 조금 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건방진 적을 깔아뭉개고 있던 얼음산.
칼마가 감추고 있던 모든 한기를 끌어내 만든 산이었는데.
그 산이 눈 깜짝할 사이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 어딜 기어가냐.
대신 산이 있던 곳엔 백운이 여유로운 얼굴로 서 있었다.
아까처럼 날개를 이용해 공중에 떠있거나 한 건 아니었다.
여전히 백운이 선 위치는 바다 한가운데였지만 근처에 있던 바닷물이 모두 사라져 있었다.
정확히는 실시간으로 증발되고 있었다.
백운이 들고 있는, 말도 안 되는 열기를 머금은 창에 의해서 말이다.
‘말도 안 된다.’
그리고 지금.
스아아아아악!
‘말도 안 된다.’
백운은 쏟아지는 칼마의 공격을 베어내며 솟구치고 있었다.
칼마가 미친 듯이 얼음을 끌어모아 휘둘렀지만 아무 소용도 없었다.
얼음은 백운에게 닿기 전부터 약화되어 맥을 못 추고 있었으며 그마저도 한 번의 휘두름에 모조리 소멸해버리는 중이었다.
푸화아아아악!
창의 휘둘러진 뒤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엄청난 양의 불꽃.
불꽃은 사방으로 휘둘러지며 아일랜드를 뒤덮었던 얼음을 녹여내고 있었다.
콰드드드득!
칼마가 주변에 있는 한기를 모아 백운에게 쏟아부었다.
그러든가 말든가 태연히 얼음을 가르며 한 발자국 더 칼마에게 가까워지는 백운.
‘말도….’
두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오랜 시간 벼려온 자신의 얼음이 한낱 인간에게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도, 자신을 향해 조금씩 다가오는 인간을 떨쳐낼 수 없다는 사실도, 그리고 그런 인간으로부터 과거 쿠훌린에게 느꼈던 정체불명의 감각을 느끼고 있는 현실까지도.
인정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안된단 말이다!!!”
괴성을 지른 칼마가 온 힘을 다해 얼음을 끌어모았다.
지금까지 뿌려낸 게 통하지 않았다면 더 크고 강한 한기로 찍어누르면 그만이었다.
한낱 인간의 몸으로는, 생명이란 온기를 가진 존재라면 절대 버텨낼 수 없는 한기로 말이다.
드득.
“…!!”
시야 전체를 덮는 얼음이 쏘아지고 잠시 후.
균열이 생기는가 싶더니 백운의 지긋지긋한 창격과 함께 불꽃이 덮쳐왔다.
온 힘을 다했음에도 허무하게 소멸되어버리는 칼마의 얼음.
그리고 갈라진 얼음 사이로.
“심장 뚫릴 준비 됐냐?”
붉은 창을 든 채 웃고 있는 백운의 모습이 드러났다.
* * *
당황했네. 이 새끼.
순간이지만 얼음 사이로 칼마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여유롭고 오만했던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잔뜩 겁에 질린 얼굴이었다.
“야이 겁 많고 옹졸한 새끼야.”
계속해서 얼음을 치고 나가며 말을 건넸다.
“그딴 식으로 날 부르지 마라!! 창잡이부터 네놈까지 오만하기 짝이 없구나!!”
흥분한 칼마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난 녀석을 도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으니까.
“네가 창잡이라 부르는 사람의 이름은 쿠훌린이다. 넌 그 사람과 바로 싸우는 게 두려워 바이킹으로 힘을 빼놓았었지. 그것도 모자라 유인해서 그 사람의 소중한 걸 빼앗았고.”
“내가 두려워하는 것 따위는 없다!”
쾅!!
다음 얼음을 부수며 말을 이었다.
“두려워하는 게 없는 새끼가 왜 창을 얼음산에 숨겨둔 거냐. 찾으러 가니까 허겁지겁 부하까지 보내고.”
“내겐 두려움이란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모르는 거겠지.”
푸화아아악!
불꽃을 뿜어내 시야를 방해하는 모든 얼음을 거두어내고.
오만상을 찌푸린 채 다급해진 칼마를 올려다봤다.
“쿠훌린 님의 창이 네 심장으로 쏘아졌을 때, 그리고 지금. 네가 느끼고 있는 그 감각이 바로 두려움이다.”
“입 닥쳐라!!”
천천히 창을 든 손을 뒤로 젖혔다.
지금이라면 충분히 닿을 수 있었다.
“!!!”
본능적으로 무언가를 느껴서일까.
얼음을 끌어모은 칼마가 처음보다 더 두껍게 자신의 본체를 감쌌다.
겁쟁이 새끼.
조소를 흘리며 남은 모든 불꽃을 창으로 눌러 담았다.
“뒤지기 전에 잘 기억해둬라. 이 창의 이름은 게이볼그.”
불을 머금은 창의 열기를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아까처럼 칼마는 숨었지만 상관없었다.
게이볼그를 들고 있는 지금, 내 눈은 칼마의 심장을 노려보고 있었다.
“네가 한낱 창잡이라고 낮춰 불렀던.”
콰아아아아아아아….!!
칼마가 감싼 얼음을 뚫으며 앞으로 나아가자.
얼음이 모두 녹아내리며 칼마의 본체가 눈앞에 나타났다.
“영웅 쿠훌린의 창이다.”
[심장을 꿰뚫는 창]
* * *
스팟!!
칼마가 고개를 돌렸다.
순식간에 자신을 스치고 지나간 백운.
콰직!
‘…?’
묘한 소리에 칼마가 고개를 내리자.
휑하니 꿰뚫린 심장이 눈에 들어왔다.
과거 쿠훌린이 도달하지 못했던 칼마의 심장.
백운은 그곳에 닿은 걸 넘어 시원하게 뚫어버리기까지 한 것이었다.
꿀꺽.
칼마가 멍한 얼굴로 마른침을 삼켰다.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자신에게 쿠훌린의 창이 닿을 뻔했을 때, 그리고 백운이 다가올 때 느꼈던 정체불명의 감각이 무엇인지 말이다.
‘공포.’
쿠훌린이나 백운이나 한낱 인간에 불과했다.
아주 작디작은 존재.
별거 아닌 걸로도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나약한 존재이기도 했다.
‘어째서 닿을 수 있는 거냐. 저게 무엇이기에.’
고개를 돌리자 칼마의 눈으로 백운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토록 많은 양을 뿌려냈음에도 백운에게 깃든 불꽃은 여전히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마치 태양의 신이 눈앞에 강림하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저게 무엇…!!!’
백운의 뒷모습을 보던 칼마가 두 눈을 크게 떴다.
칼마는 쿠훌린 이전에도 정체불명의 감각, 공포를 느꼈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백운에게 느껴지는 이질적인 기운 역시 긴가민가했지만 처음 느끼는 게 아니었다.
‘….’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정확히는 자신을 혹한의 재앙이라 되뇌며 살아가기 위해 꽁꽁 싸매 깊이 봉인해둔 기억이었다.
탄생했던 지역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남자.
황금색 머리와 눈동자를 가진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칼마를 내려다봤었다.
그 눈빛은 뭐랄까, 너무 귀찮고 하찮은 벌레를 내려다보는 듯한 눈이었다.
- 사, 살려….
칼마가 그토록 믿었던 한기는 남자에게 통하지 않았다.
아무렇지도 않게 한기를 산산조각내며 칼마의 머리를 짓밟았던 남자.
조용히 칼마를 내려다보던 남자는 조소와 함께 입을 열었었다.
- 꺼져라. 겁쟁이를 죽이는 취미는 없으니.
남자를 피해 달리며 칼마는 몸을 쉴 새 없이 떨었었다.
압도적인 공포가 칼마의 몸을 집어삼켰었기 때문이다.
- 잊어야 한다. 잊어야 한다.
달리면서 칼마는 계속 잊어야 한다고 되뇌었었다.
누구보다 본인이 가장 잘 알았기 때문이다.
이 기억을 지우지 않는다면 앞으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어떻게…?’
그렇게 필사적으로 지워낸 기억이 백운의 등을 보며 되살아나 버리고 말았다.
처음 백운의 기운을 느꼈을 때 거슬려 할 게 아니라 도망쳤어야 한다는 사실도 새삼스레 깨달을 수 있었다.
‘… 다르다.’
곧바로 기억이 떠오르지 않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백운이 가진 기운은 그 남자와 동류지만 명확한 차이를 가지고 있었다.
‘대체 무슨 차이가….’
생각을 더 이어가려는 찰나.
끔찍한 열기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백운이 지나간 자리를 따라 몰려오는 끔찍하게 뜨거운 불꽃.
칼마가 멍한 얼굴로 하늘을 뒤덮은 채 밀려드는 불꽃의 파도를 응시했다.
‘….’
남자와 백운의 차이를 명확하게 알 순 없었다.
하지만 칼마의 본능이 느끼고 있었다.
저 압도적인 불꽃을 눈앞에 두고 있는 지금 이 순간.
자신이 느끼고 있는 공포는 지금까지 느껴본 그 어떤 공포보다 더 거대하고 지독하다는 것을 말이다.
푸화아아아아아아악!!
* * *
풍덩!
그대로 처박힌 탓에 잠시 꼬로록거리다,
“파하!”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숨을 뱉어냈다.
떨어지는 중간에 칼데아를 꺼냈어도 될 일이지만, 뭐랄까.
만사가 다 귀찮았다.
“아이고. 되다 되.”
앓는 소리와 함께 바닷물에 몸을 맡겼다.
그렇게 동동동 떠다니며 아일랜드의 밤하늘을 응시하길 잠시.
구름이 걷힌 건지 반짝이는 별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렇게 예쁜 하늘이었다고? 칼마 이 쌍놈의 새끼 아주 그냥 하늘도 다 가리고.”
보통 얼음 때문에 먹구름이 끼고 그러나 의아하긴 했지만.
어쨌든 별이 안 보였던 건 칼마 탓이겠지 하며 작은 한숨을 뱉어냈다.
“어째 나타나는 새끼들이 점점 세지는 거 같아.”
다 같이 합을 맞춰서 상향 평준화라도 한 것 같았다.
우카론부터 이번에 만난 칼마까지.
어쨌든 박살내긴 했으나 까다로운 적인 건 분명했다.
더군다나 칼마는 라의 불꽃과 쿠훌린의 게이볼그가 아니었다면 죽이는 게 쉽지 않았을 테고 말이다.
“에취!”
재채기를 하기 무섭게 누운 채로 콧물이 줄줄 흘렀다.
왕의 육체를 가지고 감기에 걸려 콧물을 흘리다니.
이래도 되나 하는 생각을 하며 슥슥 코를 닦아냈다.
꼬로록!
뒤이어 배에서 우렁찬 소리가 들려왔다.
생각해보니 기록소로 향했을 때부터 제대로 먹은 게 딱히 없었다.
아이리와 있을 때도 제대로 된 식사보단 빵이나 디저트류를 주워 먹었었고 말이다.
“뒤지게 배고프네.”
오히려 칼마와 싸울 때보다 더 위험한 거 아닐까란 생각이 들 정도로 배고팠다.
이대로 눈을 감았다간 필시 배고파 죽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헤엄칠 힘도 없고.”
고개를 약간 들어 아일랜드 도심 방향을 쳐다봤다.
“누가 좀 건지러 안 오나.”
그 어느 때보다 도움이 절실한 상황.
건져줄 거 아니면 빵이라도 한 봉다리 던져줬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타다다다다다다다---!
“오?”
내 간절한 바람이 누군가에게 닿은 걸까.
귓가로 헬기 소리가 들려왔다.
싸우던 중간에 왔으면 위험하게 왜 왔어! 라고 미간을 찌푸렸을 거 같은데.
지금 들으니 또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마치 천상의 하모니를 듣고 있는 기분이었다.
반짝.
밝아져 오는 빛에 고개를 약간 들었다.
바다 너머에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햇님.
햇님은 찬란한 빛을 뽐내며 한기로 물들었던 바다의 어둠을 밀어내고 있었다.
따시네.
칼마의 심장을 뚫어낸 걸로 쿠훌린이 약간이나마 온기를 되찾았기를 바라며.
스륵.
기분 좋은 햇살과 함께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