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6화. 한라산에서
“정원인가 공원인가.”
눈앞으로 펼쳐진 울창한 잔디와 나무를 바라봤다.
밤에 들어올 땐 딱히 관심을 안 뒀었는데.
날이 밝고 보니 초록빛 가득한 숲속에서 깨어난 기분이었다.
이게 대통령 관저 클라스인가.
내가 자고 일어난 곳은 아일랜드 더블린에 위치한 관저.
한국으로 치면 청와대와 같은 포지션인 장소였다.
어제 병원에서 치료받은 뒤 이곳에 도착했었고 말이다.
무슨 스파이 영화 찍는 줄 알았어.
다닐로가 대놓고 날 병원에서 관저로 옮겨온 건 아니었다.
병원의 숨겨진 뒷문으로 검은색 세단이 은밀히 도착했고.
난 아이리와 함께 비상구를 이용해 호다닥 차량에 탑승했었다.
아주 좋았지.
도착해선 아일랜드 대통령이 누리는 식사와 목욕탕 등 모든 걸 밤늦게까지 즐겼었다.
어제 일의 본격적인 난리는 이제부터 시작이겠지만 나를 위해 다닐로가 따로 준비해 준 것이었다.
감사합니다. 대통령님.
닿지 않을 인사를 건네며 관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침 9시밖에 안 됐는데도 관저 내부는 사람이 붐비는 걸 넘어 포화 지경에 이르렀다.
원래도 사람이 적지 않은 곳인데 어제부터 기자와 각종 단체가 몰려든 탓이었다.
파이팅.
아련한 눈으로 돌아보다 아이리가 미리 알려줬던 뒷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당당하게 앞문으로 걸어나가도 상관없겠지만 지금은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지금 정문은 무기왕을 보러 온 사람들로 가득한 상황.
관저의 유일한 한국인인 내가 당당히 걸어나갔다간 나 무기왕이요! 하고 광고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오우.”
뒷문으로 나서기 무섭게 후드를 뒤집어썼다.
붐비는 건 관저뿐만이 아니었다.
이미 밖 도로까지 각종 팜플랫과 팻말을 든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이거 한 장 받아 가세요! 감사합니다!”
누군가 호다닥 지나가는가 싶더니 손에 팜플랫 한 장이 들려있었다.
보통 기술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팜플랫을 읽어 내려갔다.
# 아일랜드를 구한 무기왕. 그는 대체 누구이고 어째서 아일랜드에 머무르고 있었는가? 흑막이었던 로컨을 끌어내린 것도 무기왕?
여러 개 붙은 물음표의 끝엔 진실을 요구한다는 주장이 큼지막하게 적혀 있었다.
무기왕이 영웅인 건 이미 확실하니 당장 국가적으로 합당한 보상을 해주라는 것이었다.
“무기왕을 대통령으로!!”
에?
묵묵부답인 관저가 답답해서일까.
사방에서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대통령이라니.
그렇게 바쁘고 책임 가득한 자리는 공짜로 준다고 해도 사절이었다.
“관저를 당장 아일랜드를 살린 영웅에게 넘겨라!”
이건 나쁘지 않군.
계속 걸으면서도 귀를 쫑긋 세웠다.
상상해보니 나쁘지 않은 주장도 많았다.
물론 아닌 게 대부분이었다.
“어째서 무기왕을 혼자 싸우게 한 겁니까!? 당장 무기왕에게 사과하십시오!”
아니야! 안 해도 돼!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휙휙 내저었다.
사과라면 어젯밤 정말 학을 떼도록 들었었다.
나와 가볍게 술 한 잔을 기울여 주며 다닐로부터 아이리까지 틈만 나면 사과를 했었기 때문이다.
“당장 무기왕에게 합당한 보상을! 더블린 건물 하나는 통째로 줘야 한다!”
어제 다닐로가 건넨 말이 떠올랐다.
실제로 다닐로는 내가 원하는 걸 물었었다.
아일랜드 내의 건물이든 돈이든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건 사비를 끌어와서라도 전부 해주겠단 말과 함께였다.
그리고 난 그런 다닐로에게 추후 한 장소의 출입 권한을 달라고 했었다.
- 검은 얼음이 녹으며 새로운 공간이 나타났어요.
관저로 가기 전 아이리가 해준 말이었고 아주 오래된 유적지로 보인다는 말에 난 눈을 반짝였었다.
아일랜드의 다른 신화 혹은 쿠훌린과 관련된 무언가가 있을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어쨌든 다닐로는 내 손을 덥석 붙잡으며 약속했었다.
당장은 해저인 것도 그렇고, 나라 상황도 그렇고 작업할 여력이 없어 들어가기까진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완료만 된다면 제일 먼저 내가 들어갈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말이다.
안에 뭐가 있는지는 내가 둘러보는 걸 마칠 때까지 확인하지 않겠다는 말도 덧붙였었다.
내가 들어가 뭘 가져가든, 아니면 뭘 가져다 놓든 암묵적으로 묵인하겠다는 의미였다.
위험한 말씀을 하셨어.
킹냥이에게 생선 가게를 맡긴 격이랄까.
만약 안에서 황금빛이 와장창 쏟아지기라도 한다면 유적지 자체가 통째로 사라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얼른 들어갈 수 있으면 좋겠다!
라고 히죽히죽 웃으며.
해안가 쪽으로 속도를 높였다.
* * *
문을 열자 따스한 온기가 얼굴을 감쌌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머물렀던 게 아님에도 정겨움이 느껴지는 장소였다.
“오. 돌아왔군.”
“안녕하세요. 니겔 아저씨.”
점심을 준비 중이었는지 니겔은 식탁으로 그릇을 옮기고 있었다.
“자네… 괜찮은가?”
“네. 그럼요. 괜찮고 말고요.”
내가 말해놓고도 조금 의아하긴 했다.
지금 몸에서 물이 뚝뚝 흐르고 있는 상태가 괜찮은 꼬라지가 맞는 걸까.
갑자기 비가 오고 난리야.
관저가 있는 더블린에서 던도크까지.
날씨도 화창하겠다 찌뿌둥한 몸도 풀 겸 달리기를 시작했었다.
중간 지점까진 아주 상쾌하고 좋았는데 비가 내리면서 다 조져버렸고 말이다.
차 태워달라고 할걸.
뒤늦은 후회를 하며 니겔이 건네는 수건을 받아 몸을 닦았다.
수건이 아주 뽀송뽀송한 것이 햇살에 잘 구워진 것 같았다.
“어? 형아다!”
뒤이어 눈을 비비며 걸어 나오는 코뉴에 나도 모르게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아일랜드에서 한 명은 나보다 부지런하지 않은 녀석이 있구나 하는 안도감이었다.
“우와. 하나도 안 다쳤네.”
“당연하지. 비 따위가 날 다치게 할 순 없으니까.”
“아니 그거 말고! 형아 무기왕이잖아! 어제 그렇게 싸웠는데도 안 다쳤어!”
이렇게 면전에서 대놓고 들은 적이 없어서일까.
약간 뜨끔하며 등 뒤로 땀 한줄기가 흘렀다.
“어이 코뉴.”
물에 빠진 생쥐인 상태로 코뉴에게 어깨동무를 걸었다.
“차가워.”
차갑다고 날 밀어내든가 말든가.
몸을 숙여 엄숙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그건 엄청난 비밀이야. 말하고 다니면 산타 할아버지가 이놈 하면서 선물 안 주실 거니까 비밀로 해야 해!”
“산타 할아버지 없는데? 그거 선물 다 어른들이 주는 거야! 나도 매년 할아버지가 주는데. 형아는 아직도 믿고 있었구나.”
빠, 빠른데.
할 말을 잃은 채 바라보고 있자.
내 어깨를 두어 번 토닥인 코뉴가 식탁으로 걸어가 몸을 앉혔다.
“사실 산타 할아버지는 있어. 그러니까 형아는 계속 믿어도 돼.”
내 순수함까지 걱정해주는 코뉴에.
머쓱해하며 남은 의자로 걸어가 앉았다.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구만.”
니겔이 고기 수프가 가득 담긴 대접을 내 앞에 내려놨다.
“많이 먹게. 저런 큰 짐을 가지고 뛰어오느라 힘들었을 텐데.”
국물보다 야들야들한 고기가 훨씬 많이 든 수프.
수프와 내가 가져온 짐을 번갈아 봤다.
니겔과 코뉴에게 주려고 오는 길에 사온 각종 음식과 물건들이었다.
“할아버지. 내 접시에 고기 많은데 형아 접시엔 이거보다 훨씬 많아. 왜 그래?”
질투하거나 해서 건넨 질문은 아니었다.
그저 순수하게 궁금해하는 코뉴에 니겔의 입가로 미소가 걸렸다.
“어제 할아버지가 뭐라고 했었지?”
반대로 묻자 고민하던 코뉴가 생각났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를 구해 준 사람!”
커다란 깨달음이라는 듯 싱글벙글하던 코뉴가 자기 접시엔 있던 고기를 몇 개 덜어줬다.
“형아 많이 먹어. 고마운 사람이니까.”
“고마워. 그럼 잘 먹겠습니다!”
한 손엔 포크를, 한 손엔 수저를 들고 고기와 수프를 삭제해나가기 시작했다.
국물은 아주 진한 것이 일품이었고 고기도 어찌나 잘 삶아졌는지 야들야들한 것이 쭉쭉 부드럽게 찢어졌다.
“형아 그런데 내 가면이 하나 없어졌어! 어디 간지 알아?”
“….”
깜빡했네.
새로운 걸 구해준다는 게 다른 것만 잔뜩 사와 버리고 말았다.
“사, 산타 할아버지가 가져가셨대!”
기름이 번들거리는 손으로 엄지를 치켜세워준 후.
또다시 질문을 건네려는 코뉴를 피해 접시로 얼굴을 파묻었다.
* * *
제주도에 위치한 한라산.
하얀 눈이 쌓인 산으로 갑주를 걸친 남자가 걸음을 내디뎠다.
“한수 선배. 아무것도 없는데요.”
제주도에서 근무 중인 3급 헌터 이한수가 인상을 찌푸렸다.
뒤따르고 있던 4,5급 헌터들도 한숨을 내쉬긴 마찬가지였다.
두어 시간 전 헌터청으로 긴급 구조 요청이 들어왔었다.
한라산에 급파됐던 구조대에서 온 요청으로 데몬이 나타났다는 것이었다.
“애초에 왜 저희한테 구조 요청을 한 걸까요? 한라산엔 담당 헌터들이 배치되어 있었을 텐데.”
“그러게나 말이다.”
이한수가 답답한 마음으로 고개를 들었다.
제대로 날을 잡은 건지 눈보라가 미친 듯이 흩날리고 있었다.
‘이래서 어디 찾을 수나 있을려나.’
10분만 지나도 지나온 발자국을 다 감춰버리는 눈보라였다.
통신 장비도 먹통이 된 지금 수색을 계속 이어나가는 게 의미가 있을지 의문이었다.
“마지막 위치는 여기 맞지?”
“네. 정확히 여기에요.”
“솔이는 뭐 잡히는 거 없어?”
뒤따르고 있던 탐지 능력 개방자 솔이 고개를 내저었다.
보통 사람보다 몇 배의 오감을 가진 그였지만 눈보라 속에서 능력이 제한되긴 마찬가지였다.
“눈이라도 그친 다음에 와야 하지 않을까요? 이대로 있다간 다 같이 눈사람 될 거 같아요.”
“인원도 더 필요할 거 같습니다. 눈보라가 그친 뒤엔 쌓인 눈 때문에 찾기가 더 힘들 테니까요.”
동료들의 말에 이한수도 고개를 끄덕였다.
긴급 구조 요청을 받고도 돌아가야 한다는 게 그다지 내키진 않았으나.
지금 당장은 방법이 없어 보였다.
“어…? 잠깐만요.”
구조대에 전화를 걸며 탐지 중이던 솔이 두 눈을 감고 몸을 낮췄다.
“엄청 작지만 미세하게 뭔가 들리는 거 같은데….”
말끝을 흐리며 집중하는 솔에 이한수를 포함한 인원들이 숨을 죽였다.
한참 집중하던 솔이 점점 바닥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베, 벨소리! 아래예요!”
“…!”
솔의 말에 인원들이 흩어져 눈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가능한 모든 능력을 동원해 파 내려가길 한참.
“하, 한수 선배!!”
자신을 부른 후배에게 달려간 이한수.
“허.”
이한수의 얼굴이 굳어졌다.
싸늘하게 식어 눈에 파묻혀 있는 시체.
시체는 구조대 옷을 입고 있었다.
가슴은 무언가에 찔린 것처럼 뻥 뚫린 상태였고 말이다.
“선배! 여기도요!”
“여기도 있습니다!”
“여기요!!”
뒤이어 사방에서 이한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파 내려간 모든 곳에서 구조대의 시체가 발견되고 있었다.
잠시 후엔 다른 제복을 입은 시체들도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샹….”
구조대가 한라산 소속 헌터가 아닌 자신들에게 연락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같이 있었구나.’
좁은 지역에서만 수십 구의 시체를 발견한 이들이 이한수에게 모여들었다.
곁으로 모여 멍한 얼굴로 주변에 늘어진 시체를 바라보는 대원들.
‘대체 여기서.’
이한수가 입술을 깨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