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2화. 첫 번째
거 참.
눈앞의 헬기를 부숴내고 정면을 응시했다.
끝도 없이 몰려온 놈들은 시야가 닿는 모든 바다에 깔려있었다.
더럽게 많네.
처음엔 빠르게 부수고 지나갈 생각이었지만 이마저도 쉽지 않았다.
어중이떠중이들만 모인 건 아닌지 발목 잡는 기술이 예상 밖이었다.
인원이 많다 보니 별의별 능력이 다 튀어나오는 중이었고 말이다.
“으…!”
그나마 다행이라면 남은 놈들이 주춤거리고 있단 사실이었다.
아마 앞에 놈들이 순식간에 박살나는 걸 본 봐서인 듯했다.
“그렇게 쫄아서 주춤거릴 거면 좀 꺼져.”
한숨 돌리고 다시 앞으로 나아가려는 찰나.
“응?”
저 너머에서 엄청난 수의 함선과 헬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까지 튀어나온 놈들과는 달리 체계를 갖추고 다가오는 함단.
이젠 하다하다 군대까지 튀어나온 건가 싶었는데 자세히 보니 영국 국기가 달려있었다.
“뭐야 저건?”
“어, 어….? 지금 포구 우리 쪽으로 향하는 거 아니야?”
날 잡으러 왔던 용병과 기업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앞엔 내가, 뒤에선 딱 봐도 감당하기 힘든 군대가 공격을 겨누자 오갈 데가 없어진 것이었다.
# 영국 항공모함 이튼 호입니다. 현재 전투를 벌이고 있는 인원들에게 알립니다. 이곳은 영국 영해입니다. 당장 무장을 해제하고 복귀하시기 바랍니다.
정신없이 싸우는 와중에도 앞으로 나아갔었는데.
어느덧 영국 영해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 마지막 경고입니다. 당장 무장 해제하지 않으면 영국으로의 공격으로 간주, 대응하겠습니다.
“…!”
고민하는가 싶던 놈들이 하나둘씩 돌아서기 시작했다.
아무리 돈이 좋아도 나라 하나를 상대할 만큼 돌아있진 않은 모양이었다.
이 새끼들 괘씸하네.
평소 같았으면 이렇게 전투를 끝내는 건 이쪽이 사절이겠지만.
지금은 저딴 놈들을 하나씩 처리하는 것보단 한국으로 가는 게 우선이었다.
첫 공격 이후 꺼내 쓴 코뉴 가면2호로 얼굴을 가린 만큼 나중에 귀찮아질 일도 없었다.
탓.
부서진 잔해들을 밟으며 방금 도착한 항공모함 쪽으로 다가갔다.
어쨌든 아일랜드에서 영국 영해로 냅다 넘어왔으니 사정은 말하고 떠날 생각이었다.
뭐지.
얼마 움직이지 않았을 때 커다란 배 한 척이 내게 다가왔다.
속도가 엄청난 걸로 보아 고속정의 한 종류인 듯했다.
“어?”
자세히 보자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배에 타 머리를 흩날리고 있는 에밀리아와 이사벨.
그 밖에도 헌터청이나 왕실에서 마주친 적 있는 상위급 헌터들이 배에 타 있었다.
“백운 님!”
물살을 일으키며 배가 멈추자 이사벨이 빨리 타라고 손짓했다.
“저희가 모셔다 드릴게요!”
이래서 말도 안 되게 빨리 나타났던 거군.
단순히 영해에서 일어난 전투 때문에 온 게 아닌 듯했다.
영국 측에서 현재 한국과 내 상황을 알아차리고 미리 움직여 준 것이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지금은 유탈라스도 쿨타임이라 꺼낼 수 없는 상황.
방금 본 빠른 속도에 방금 같은 놈들의 방해까지 영국이 막아 준다면 거절할 이유가 없었기에 망설임 없이 배로 몸을 날렸다.
“이렇게 빨리 다시 뵙게 될 줄은 몰랐네요!”
가볍게 인사를 건넨 이사벨이 패드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일단 상황부터 말씀드릴게요!”
이사벨이 화면을 바꿔가며 현재 한국의 상황을 알려주었다.
놈들이 말했던 대로 한국은 데몬에게 침략당하는 중이었다.
단순히 한 군데에서 몰려오는 게 아닌, 전국에서 데몬이 들끓고 있었다.
문은 아직이구나.
불행 중 다행이라면 아직 문이 열리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나타난 데몬 중엔 등급이 꽤 높아도 헤키리스로 보이는 놈은 없었고 말이다.
아직은 괜찮다.
한국의 전력은 결코 약하지 않았다.
공격이 닿지 않는 헤키리스만 아니라면 충분히 막아낼 터였다.
“비행기를 준비하려고 해봤는데요.”
이사벨의 브리핑이 어느 정도 끝나자 에밀리아가 미안함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한국까지 직선 경로의 국가들에서 비행기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고 통보해왔어요. 협조도 불가능하다고 알려왔고요. 유일하게 그리스에서만 가용한 병력을 총동원해 적극 협조하겠다고 나섰고요.”
“대체 뭘 받았길래 우호국의 요청까지 무시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당장 중동 지역 쪽에선 대규모 병력이 밀집하는 움직임까지 보이는 중이고요.”
에밀리아의 말을 거들며 이사벨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궁금할 따름이었다.
대체 얼마나 많은 돈을 어디까지 뿌렸는지 말이다.
“비행기는 위험할 거 같아요. 제가 처음에 타고 왔던 게 아일랜드 대통령 전용기였어요. 이륙한지 한 시간도 안 돼서 격추당했고요.”
“네…?!”
이사벨과 에밀리아의 입이 벌어졌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이도영이 속한 청풍이란 회사는 단순히 돈만 받은 게 아닌 듯했지만.
어찌 됐든 이런 또라이가 분명 또 있을 터였다.
“전용기에 바로 미사일을 꽂을 정도로 눈이 돌아간 놈들이에요. 전력도 상당해서 틈이 조금이라도 보이면 무조건 공격하겠죠.”
“국경 문제는 저희가 어떻게 해서라도….”
“아니에요.”
작은 한숨을 내쉬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이사벨의 말대로라면 가는 모든 경로에 적이 있을 터.
이걸 완벽하게 회피하는 방법은 빨리 밤이 되어 칼데아를 꺼내는 것뿐이었다.
한국 쪽으로 갈수록 시차 때문에 해가 빨리 질 테니까.
그전까진 유탈라스와 수리검으로 고속이동해서 최대한 싸움을 회피하며 나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한 번에 무기 두 개가 쿨타임에 걸리다 보니 지금처럼 틈이 생긴다는 문제가 있지만, 이쪽이 더 빠른 길이었다.
“영국 국경까지만 부탁드릴게요. 그곳부턴.”
무기들의 쿨타임을 확인하며 한국 방향을 응시했다.
“저 혼자 갈게요.”
* * *
“문은 언제 열리는 겁니까?”
연창환이 초조한 얼굴로 포이카를 바라봤다.
서울 상공에 소용돌이가 나타나고 시간이 꽤 흘렀음에도 문은 좀처럼 열리지 않고 있었다.
“기다려라.”
포이카가 힘을 끌어올리며 하늘을 주시했다.
점점 강하게 휘몰아치며 그 크기를 키워가고 있는 소용돌이.
겉으로 보기엔 매우 거셌으나 포이카의 예상엔 훨씬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생각보다 많이 소실됐군.’
부서질 걸 고려했기에 넉넉한 비석을 설치했었다.
그마저도 예상보다 많이 부서져 지체되고 있는 중이었고 말이다.
‘빨리 열려라.’
연창환만 초조한 게 아니었다.
실제로 헤키리스의 무결성이 깨지는 걸 직접 봤던 포이카 역시 그 누구보다 빨리 저 문이 열리길 바라고 있었다.
“내가 말했던 건 어떻게 됐지?”
포이카의 물음에 연창환이 들고 있던 패드를 살폈다.
실시간으로 세계 곳곳에서 보고가 들어오고 있었다.
“녀석은 제때 도착하지 못할 겁니다. 이제 영국에 도달했으니까요. 오려면 아직 한참 남았습니다.”
그나마 제 할 일은 하고 있는 연창환에 포이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아무리 강하다 한들 쑥대밭이 된 곳에 도착해 홀로 할 수 있는 일은 없을 터였다.
“한 가지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말해라.”
포이카의 눈치를 살피던 연창환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물어볼까 말까 고민하던 내용이었다.
“어째서 무기왕의 도착을 늦추라고 하신 겁니까? 헤키리스 님은 조금이라도 더 빨리 만나길 바라시는데요.”
당시엔 두려워 묻지 못했지만 연창환은 궁금했었다.
인간인 자신이 봐도 헤키리스란 존재는 대적불가란 말이 떠오르는 절망적인 데몬이었다.
직접 손을 대지 않고도 함께 갔던 이들의 머리통을 날리는 등 정체불명의 능력을 사용했기도 하고 말이다.
그럼에도 포이카는 무기왕을 경계하고 있었다.
최대한 티 내려고 하지 않았으나 연창환은 그 속에서 포이카의 불안감을 엿봤었다.
“….”
포이카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무기왕을 떠올렸다.
‘질 리는 없겠지만.’
헤키리스가 가진 건 상처 입지 않는 무결성뿐만이 아니었다.
헤키리스는 지금까지 포이카가 봐온 그 어떤 데몬보다도 강력한 신체와 전투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지난번은 방심했기에 공격당한 것이며 실제로 마주한다면 헤키리스는 상대가 누구든 절대 질 수 없는 존재였다.
하지만 뭐랄까.
포이카의 마음속 깊은 곳엔 정체 모를 불안감이 존재했다.
단순히 헤키리스의 팔이 잘려서만은 아니었다.
무기왕이 하늘로 쏘아졌던 불길한 검격.
그것은 처음 보는 류의 힘이었고 그런 힘을 사용하는 인간이 또 어떤 변수를 가지고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그저 예방 차원일 뿐이다. 그놈이 일찍 도착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스스로의 마음을 다스리며.
포이카가 조용히 열리고 있는 문을 응시했다.
“저 문이 열리는 순간. 인간에게 남겨진 건 절망뿐이다.”
* * *
1급 헌터 류희수가 데몬들을 짓뭉개가며 소용돌이 쪽으로 접근했다.
‘운도 더럽게 없네.’
항시 한국에 대기 중인 기태랑과 비광과는 달리 해외에서 주로 임무를 수행하는 류희수였다.
맡고 있던 임무를 끝내고 오랜만에 돌아온 건데 오자마자 이 꼬라지라니.
아무래도 액운이 제대로 낀 모양이었다.
“크라아아아!”
류희수가 귀찮다는 듯이 한쪽 손을 들어 데몬을 짓눌렀다.
‘귀찮네. 정말.’
개방과 동시에 강한 염동력을 갖게 된 류희수.
20대 중반이란 어린 나이였지만 막강한 능력을 인정받아 금세 1급 헌터가 된 케이스였다.
그렇다 보니 흔히 사람들이 전설처럼 말하는 강태황과 기태랑, 비광 등 1세대들이 벌였던 전투를 직접 보지 못했었고 말이다.
‘옛날에도 이랬었던 건가.’
엉망이 된 주위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사람 사는 곳이 맞나 싶을 정도로 많은 수의 데몬이 들끓고 있었다.
여기까지 오며 꽤 처리했는데도 눈으로 보기엔 수가 전혀 줄어들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무기왕은 아직인가.’
류희수가 한국으로 돌아온 또 다른 이유였다.
해외임무가 끝나서도 있지만 얼굴을 보고 싶었다.
9급 헌터에서 바로 1급이 된 것도 모자라 세계에서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무기왕의 얼굴을 말이다.
기태랑과 비광에게 어떤 사람인지 물어봐도 마음에 안 드는 대답만이 돌아왔었다.
이상한 놈인데 착한 놈, 정신 나갔는데 멀쩡한 놈 등 온통 알아들을 수 없는 대답뿐이었다.
‘그건 그거고…. 저거부터 어떻게 해야겠네.’
류희수가 하늘을 응시했다.
이곳으로 온 이유는 간단했다.
하늘로 모이고 있는 저 힘을 염력으로 억제해보기 위해서였다.
‘일단 한 번 치우고.’
몰려드는 데몬에 류희수가 손 위로 모은 염력을 폭발시켰다.
순식간에 생겨난 에너지의 폭발로 휩쓸려나가는 데몬들.
귀찮게 하는 것들이 없어지자 하늘로 떠오른 류희수가 두 팔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힘을 쏘아내려는 순간.
“가만히 두거라.”
등 뒤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