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3화. 해가 진다
“!?”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류희수가 뒤를 돌아봤다.
언제 온 건진 알 수 없었다.
허공에 떠오른 데몬이 류희수를 조용히 응시하고 있었다.
‘말하는 데몬이라.’
류희수가 혀를 차며 데몬의 생김새를 살폈다.
2미터는 거뜬히 넘길 듯한 키에 해골의 생김새를 한 데몬이었다.
초록색을 띠는 매끈한 피부에선 묘한 기괴함이 느껴졌다.
“아무것도 하지 말아라. 아직 저 문이 닫혀선 안되니.”
“괴물 새끼가 말하니까 좀 낯서네.”
류희수가 어색한 미소와 함께 말을 건넸다.
데몬 중에도 의사소통이 가능한 개체가 있다는 건 무기왕과 사로카의 싸움 이후로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하지만 직접 만나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단순히 단어만 내뱉는 것도 아니고 인간과 다를 것 없이 언어를 구사하다니.
생긴 것만 좀 달랐다면 인간이라고 착각했을 것 같았다.
“너 어디서 나타난 거야?”
순수한 궁금증에 물어보자 데몬이 소용돌이치고 있는 하늘을 가리켰다.
“…!”
“내가 첫 번째다.”
‘벌써 열린 건가.’
류희수가 입술을 깨물었다.
문이 어디와 연결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단지 데몬이 첫 번째라는 걸 보면 넘어올 것들이 아직 남아있다는 것이었다.
“벌써 한 마리가 기어 나왔으니 얘기는 그만해야겠네.”
류희수가 빛으로 감싸진 손을 들어 올리고.
어째선지 데몬 역시 류희수를 따라 손을 올렸다.
“말했을 텐데.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찰나의 순간이었다.
힘이 데몬에게 닿았다고 생각한 순간 엄청난 파열음이 들리며 류희수의 몸이 튕겨 나갔다.
“…!?”
류희수가 당황한 얼굴로 조금 전의 감각을 떠올렸다.
마치 스스로의 힘을 얻어맞고 튕겨 나간 느낌이었다.
‘염력을 사용하는 놈인가.’
그렇다고 하기엔 힘의 종류가 너무 똑같았다.
“넌 나와 상성이 좋지 않다.”
“뭐?”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한 말투에 류희수가 데몬을 응시했다.
데몬은 언어를 구사하는 것도 모자라 빙긋 미소까지 지어대고 있었다.
“네 힘은 강력하다. 하지만 단순하지.”
“헛소리.”
류희수가 더 강한 염력을 끌어올려 데몬에게 쏘아냈다.
결과는 아까와 같았다.
데몬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는 반면 류희수의 몸은 다시 한번 저 멀리로 튕겨졌다.
‘거울이라도 되는 건가.’
미동조차 않는 데몬에 입술을 깨물었다.
솔직히 당황스러웠다.
염력이 통하지 않는 건 물론 되려 거기에 얻어맞고 있다니.
처음 겪어보는 류의 전투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 궁금한 얼굴이구나.”
갈수록 기분이 나쁘고 재수 없어지는 데몬이었다.
류희수의 머리 꼭대기에 서 있는 듯한 말투였다.
“상대가 가진 힘의 원리와 사용 방법을 분석할 수 있다면 난 그 어떤 공격이든 되돌려 줄 수 있다.”
“이젠 설명까지 해주는 거야?”
“설명이 아니다. 현실을 알라는 거지. 네 힘은 강력하나 단순하기 짝이 없다. 보자마자 따라할 수 있는 수준이지. 내가 따라 하지 못할 힘이 아니라면 아까 얘기했던 대로 아무것도 하지 말거라.”
데몬이 문과 류희수 사이에 위치하며 말을 이었다.
“그럼 너 역시 무사할 테니.”
“그거 참 친절한 말이네.”
데몬은 류희수를 봐주고자 가만히 있는 게 아니었다.
상대가 능력을 사용하지 않는 이상 자신도 공격할 수단이 없어 멈춰있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이거 어쩌지.”
점점 열려 가는 문을 보며 류희수의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튀어나온 게 이런 놈이라면 저 문이 완전히 열리는 일만큼은 어떻게든 막아야 했다.
“난 저 문을 좀 막아야겠는데.”
류희수가 두른 기운의 색이 다채로워졌다.
희미한 보라색에서 연두색으로, 연두색에서 붉은색으로.
시시각각 색이 변하며 다양한 색을 띠기 시작한 기운이 양팔로 모여갔다.
“어디 이것도 한 번.”
기운을 모은 류희수가 데몬 쪽으로 날아가며 입을 열었다.
“튕겨내 봐.”
* * *
서울 청와대에 위치한 벙커.
안에서 헌터들을 지휘하던 강태황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어떻게 된 거냐.’
소용돌이 아래에 도착했다는 걸 마지막으로 류희수의 연락이 끊겼었다.
류희수가 갑자기 나타난 데몬과 교전 중이란 다른 헌터팀의 보고가 방금 들려왔고 말이다.
헌터들은 보고에 덧붙여 말했었다.
상대 데몬에게 류희수의 힘이 통하지 않는 것 같다고 말이다.
‘대응하기 쉽지 않은 힘일 텐데.’
류희수의 강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강태황이었다.
웬만한 상위급 헌터도 한 발자국조차 떼기 힘들게 만드는 류희수인데 고전이라니.
강태황으로선 낯선 단어일 수밖에 없었다.
# 거리가 멀어 잘 들리지 않지만 대화를 나누는 듯했습니다.
“…!”
재차 보고가 들려오자 상황실로 침묵이 감돌았다.
데몬이라고 아무나 말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지금까지 나타난 케이스로 봤을 때 말이 가능했던 놈들은 모두 S급에 버금가는 위험도를 가지고 있었다.
‘비광도 발이 묶여 있고.’
데몬은 말 그대로 끝도 없이 밀려오고 있었다.
다대일 전투에 능한 비광임에도 시원하게 나아가지 못할 정도였다.
‘기태랑도 아직 멀었다.’
헬기가 추락했다는 말과 함께 기태랑과의 통신도 끊겼었다.
단지 직전의 소리로 미루어봤을 때 적을 만난 것 같았다.
지금도 연락이 없는 걸 보면 아직도 전투 중일 가능성이 컸고 말이다.
‘못 올 가능성도 열어둬야 한다.’
기태랑의 위치는 제주도였다.
방해의 수준을 봤을 땐 분명 인간이 얽혀있었기에 제주도에서 빠져나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을 터였다.
“일본에서 지원군이 출발했습니다. 료코 장관이 지휘를 맡고 있다고 합니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뜻하지 않은 곳에서 힘을 보태주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지원을 요청하기도 전에 서울에서 문이 열릴 것임을 알려준 건 물론 급한대로 인원을 꾸려 지원군까지 편성해준 료코 장관과 일본.
여기에 서울 한복판에선 이집트의 최종 병기로 유명한 비칼이 한국 헌터를 도와 데몬을 잡고 있었다.
‘정말 의외군.’
강태황은 이집트 헌터 대표로 온 비칼을 만나본 적이 있었다.
정말 잿빛이란 말이 잘 어울릴 정도로 무미건조한 남자였다.
모든 일에 관심이 없는 건 기본으로 이집트의 위험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으면 어떠한 요청에도 절대 움직이지 않는 남자.
그런 남자가 먼저 나서 한국을 도와주고 있었다.
무기왕에게 빚이 있어서란 이유 하나만으로 말이다.
‘모두가 무기왕으로부터 출발했구나.’
이건 단순히 도움을 받았었으니 도와준다는 걸론 설명이 부족했다.
백운의 성격을 봤을 때 나중의 도움을 약속받고 싸운 건 아닐 터였다.
저들이 원한다면 충분히 모른 척할 수도 있는 상황.
그럼에도 모두가 나서고 있다는 건 한 가지를 의미했다.
어떤 형태인진 몰라도 무기왕을 만났던 사람들은 모두 백운에게 이끌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보고는 계속해서 이 채널로 하도록 해.”
강태황이 헤드셋을 내려놓자 주변의 시선이 쏠렸다.
“강태황 장관?”
사람들의 의아한 시선을 마주하며 강태황이 입가로 미소를 그렸다.
“한 명, 한 명이 아쉬울 때니까요.”
그런 강태황을 조용히 바라보던 대통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1세대 전설의 중심인 강태황.
현장을 떠난 지는 오래 됐지만 지금의 한국엔 전설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조심하세요. 강태황 장관. 아니지.”
대통령이 강태황을 따라 미소를 머금었다.
“조심은 데몬들이 해야겠군요.”
* * *
지하 공당의 내부.
“왜 이렇게 느린 거냐.”
일렁이는 소용돌이를 보며 헤키리스가 얼굴을 구겼다.
포이카를 미리 보내놓기까지 했는데 자신이 나갈 정도로 문이 충분히 열리지 않고 있었다.
그나마 어느 정도 연결은 되어 몇몇 데몬이 먼저 문을 통과하는 중이었다.
“누가 내려가 있지?”
헤키리스의 물음에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던 데몬들이 고개를 돌렸다.
“폰과 드랙이 먼저 내려갔습니다.”
둘 다 공당에서 강한 개체로 뽑히는 데몬이었다.
가진 능력 역시 적 입장에선 생소하고 상대하기 까다로운 것들이었고 말이다.
“아래 상황은?”
헤키리스가 묻자 거대한 구슬 모양을 한 데몬이 눈을 감았다.
아주 작은 틈이지만 그곳을 통해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폰이 인간과 대치 중입니다. 아까 묘한 기운과 함께 문으로 접근했던 인간입니다. 지금은 문은커녕 폰 근처로도 다가가지 못하는 듯하고요.”
일찌감치 폰을 먼저 내려보낸 이유였다.
다대일의 전투엔 취약하지만 일대일의 전투에서 폰을 죽일 순 없었다.
정확히는 이기는 게 불가능했다.
그게 아무리 강한 능력을 가진 존재라 할지라도 말이다.
“무기왕이란 인간은?”
“무기왕으로 보이는 놈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데몬의 보고에 헤키리스가 입술을 깨물었다.
사실상 이번 침략을 계획한 이유인데 아직도 나타나지 않았다니.
만에 하나 자신이 내려갈 때까지 나타나지 않는다면 연창환을 비롯한 모든 인간을 싸그리 죽여버릴 생각이었다.
‘네 나라가 다 가루가 되고 있거늘 어디에 있는 것이냐. 오만한 인간이여.’
헤키리스가 핏줄을 세우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어서 나타나거라. 단숨에 짓밟아 줄 테니.’
* * *
영국 국경을 벗어나 얼마나 온 걸까.
쿨타임으로 들어가는 비늘과 수리검에 산 아래로 몸을 착지했다.
물론 수리검으로 이동할 수 없다고 해서 가만히 멈춰있거나 하진 않았다.
[잭 더 리퍼 - 면도칼]
면도칼을 입에 물고 산을 내달렸다.
잠시도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한국에 가까워져야 했다.
가는 길에 한 번은 더 만나겠지.
우거진 산 지형이 계속되면 만날 일은 없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이제 곧 평지가 나타날 터였다.
그곳엔 이사벨이 말했던 대로 적지 않은 수의 군대가 존재할 테고 말이다.
이제 곧이다.
어둑해진 하늘을 바라봤다.
여기가 어딘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단지 영국에 있을 때보다 확실히 어두워진 상태.
이제 조금 후면 해가 완전히 사라지고 날개를 꺼낼 수 있었다.
“…!”
눈앞에서 번쩍이는 빛에 고개를 틀었다.
평지가 나타나기도 전에 날아든 탄환.
돈의 힘이라고 해야 할지 집요함이 정말 일품이었다.
저쪽인가.
탄이 날아드는 방향으로 약간 몸을 틀었다.
쏴대는 걸 보니 가만히 놔두면 귀찮을 것 같았다.
다양하구만.
평지엔 예상대로 엄청난 수의 병력이 기다리고 있었다.
급조한 듯한 높은 타워도 세워져 있었는데 날아든 탄은 타워 꼭대기에 있는 저격수의 것이었다.
“얼른 끝내자.”
[라 - 불꽃의 문양]
오른손에 불꽃을 휘감은 채로 산에서 몸을 날렸다.
저 아래에서 공격을 준비하는 병력들.
공격들이 내 몸에 닿을 일은 없었다.
“죽…!?”
무언가 외치려던 적의 대장이 말을 멈추었다.
내 불꽃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마.”
다음 지시를 내리려는 놈을 바라보며 말을 건넨 후.
“뭘 하든 살 수 없을 테니까.”
오른손에 둘러진 불꽃을 바닥으로 내리찍었다.
푸화아아아아아아----!
순식간에 퍼지며 일대를 모조리 집어삼키는 라의 불꽃.
불꽃이 어두워진 주변을 환하게 비추었다.
그리고 잠시 후.
드디어.
이렇게 애타게 기다렸던 적이 있었나 싶었다.
완전히 진 해를 확인하고.
[이카로스 - 칼데아 윙]
지체없이 검은 연기를 터뜨려 하늘로 날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