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화. 마지막 패
드론을 통한 촬영으로 방송을 이어가고 있는 CBC.
현재 스튜디오엔 방송 인원을 제외하고도 많은 사람이 들어와 있었다.
가용한 모든 공간으로 근처에 있던 민간인들을 대피시킨 것이었다.
“….”
스튜디오엔 무거운 침묵이 깔려있었다.
방송을 보고 있는 이들 중에도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지난번 무기왕 방송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이럴 수가….”
벙찐 얼굴로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는 사람들.
화면에선 거대한 데몬과 헌터청 장관 강태황의 전투가 중계되고 있었다.
“대체 뭐야….? 저 데몬은.”
1세대 헌터 중에서도 전설이라 불리는 존재, 강태황.
나이가 많은 사람부터 적은 사람까지 강태황의 활약을 모르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만큼 강태황이 얼마나 강한지 역시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디서 나타난지 알 수 없는 데몬 하나가 그런 강태황과 비등하게 싸움을 이어가고 있었다.
스튜디오에 무거운 침묵이 깔린 이유였다.
“강태황 장관님이랑 비등하다니 말이 되는 거야?”
“말도 안되지.”
“고작 한 놈이 저렇게 강하다니.”
사람들은 눈 깜빡임조차 최소로 하고 있었다.
모니터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싸움의 스케일이 SF 영화를 아득히 넘어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먹 한 번의 부딪힘에 엄청난 파열음이 들려왔고 동시에 주변에 있던 건물들이 무너져 내렸다.
동급의 강자가 아니라면 접근할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전투였다.
“설마 지는 건….”
“확 그냥! 재수 없는 소리를!”
치열한 접전에 우는 소리가 들리자 중년의 남자가 크게 호통쳤다.
강태황이란 이름이 처음 들려왔을 때부터 꾸준히 응원해온 남자였다.
“장관님이 질 리가 없잖아! 장관님은 살아있는 전설 그 자체라고!”
강하게 꾸짖으면서도 남자의 두 손은 땀으로 축축해져 있었다.
남자가 본 대부분의 전투는 강태황의 압도적인 승리로 막을 내렸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저건 마치….’
마른침을 삼킨 남자가 기억을 되짚어나갔다.
그때뿐이었다.
강태황이 이토록 치열하게 싸웠던 시절은 말이다.
대부분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흔한 개체였지만, 이따금씩 말도 안 되는 게 튀어나오곤 했던 시절.
처음 보는 생김새라 아직 정식 이름이 붙여지지 않았지만 기태랑과 비광, 강태황 같은 1세대 헌터들과 비등하게 싸웠던 데몬을 사람들은 이렇게 불렀다.
‘1세대 노네임드 데몬.’
* * *
‘추억이라고 해야 하나.’
강태황이 공격을 주고받으며 미소를 그렸다.
눈앞의 드랙은 강태황에게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유일하게 죽음을 눈앞에 뒀었던 1세대 시절의 향수를 말이다.
“말이 없어졌구나!!”
강태황이 날아드는 철기둥을 쳐내며 드랙을 바라봤다.
찰나의 순간이지만 분명 드랙의 다리가 휘청였었다.
눈에 띄는 상처는 없어도 치열하게 주고 받은 공방의 대미지가 누적된 것이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지만.’
강태황이 입에서 흐르는 피를 닦아냈다.
투기를 두르고 있다곤 하나 대미지를 아예 안 받을 순 없었다.
“하아아…!”
강태황이 호흡을 내뱉으며 다시 자세를 잡았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눈앞의 녀석은 과거 상대했던 1세대 노네임드만큼이나 강력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자취를 감춰 다시는 등장하지 않았던 존재들.
그 기억이 퇴색될 때쯤 다시 등장한 것이었다.
“이름이 있나?”
강태황이 조용히 묻자 드랙이 입을 열었다.
“드랙.”
“그렇군.”
“누구에게 죽는지는 알고 싶은 모양이구나.”
드랙의 말에 강태황이 웃음을 터뜨렸다.
“반대다.”
“뭐…?”
강태황이 드랙의 왼쪽 다리와 가슴 부근을 살폈다.
신체 강도에 자신이 있는지 드랙은 웬만해선 방어를 하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강태황을 죽이기 위해 공격에 치중된 선택을 하는 중이었다.
“한 번도 무너져 본 적이 없겠지.”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거냐.”
순식간에 다가온 드랙이 철기둥을 휘두르고.
아슬아슬하게 피해낸 강태황이 드랙의 왼쪽 다리로 주먹을 꽂았다.
순간 휘청이며 중심이 흐트러진 드랙.
“!?”
처음 겪어보는 감각에 드랙의 얼굴로 놀라움이 번지고 강태황은 이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곧바로 달라붙어 봐뒀던 가슴 부근으로 주먹을 꽂았다.
콰아아앙!!
“크윽…!”
지금까지 받아낸 공격과 다를 바 없는 강도였지만.
드랙의 몸 전체로 끔찍한 고통이 번져갔다.
“나도 옛날엔 몰랐지만 경험이란 게 중요하더군.”
강태황이 두르고 있던 투기를 오른손으로 집중해나갔다.
뭐가 날아오든 더 이상 방어할 생각은 없었다.
“건방진 소리를!!”
고통이 어느 정도 가라앉자 흥분한 드랙이 몸을 날렸다.
변한 게 아무것도 없음에도 드랙은 강태황으로부터 묘한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아무리 두들겨도 무너지지 않는 존재와 몸을 울리는 고통.
이런 상황은 처음이었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몰라도 이런 생각이 들더군. 꺾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경험해본 자와 해보지 못한 자의 격차는 크다고.”
눈앞으로 거대한 철기둥이 휘둘러졌다.
“자네 입장에선 애석할 따름이야. 경험해보기 전에.”
오른 주먹으로 집중된 투기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죽을 테니까.”
“!!!”
그제야 무언가를 느낀 드랙이 철기둥을 놓고 방어를 위해 두 손을 모았지만.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어느새 가슴 바로 앞까지 도달해 있는 강태황의 주먹.
“어….”
가슴에 주먹이 닿았다는 걸 인지함과 동시에.
공간 전체를 찢는 강렬한 파열음이 터져 나왔다.
“끄어…!!”
몸이 뒤로 날아가거나 하진 않았다.
약해져 있던 가슴이 뚫리며 강태황의 투기가 몸으로 침투했고.
그 자리에서 투기가 폭발하며 상체 절반이 그대로 날아가 버렸다.
입에서 검은 피를 토하며 무릎 꿇는 드랙.
호흡을 고르며 숨이 끊어지는 드랙을 내려다보던 강태황이 몸을 돌렸다.
비광과 류희수가 있는 곳으로 가야 했다.
“승리했다고 생각하나…?”
“…?”
들려오는 목소리에 잠시 걸음을 멈췄다.
“네놈들의 패배다. 문이 열렸다. 그리고.”
숨이 끊어지기 직전.
드랙이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분이 오셨다.”
“!!!”
고개를 들자 어느새 말도 안 되게 커진 소용돌이가 보였다.
드랙에 집중하느라 신경쓰지 못한 사이 문이 열리고 만 것이었다.
‘이런…!!’
몸을 추스를 새도 없이 강태황이 속도를 올렸다.
문이 열렸다는 건 한 가지를 의미했다.
아래서 문을 억제하고 있던 류희수와 그런 류희수를 지키기 위해 싸우던 비광에게.
저벅.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이었다.
* * *
“쿨럭!”
입으로 붉은 피가 솟구쳤다.
비광의 눈앞엔 족히 10미터는 될 듯한 근육질 데몬 하나가 서 있었다.
파란색 피부에 두 개의 뿔을 가진 무지막지한 생김새였다.
숨을 몰아쉬던 비광이 뒤에 있는 류희수를 쳐다봤다.
‘위험하다.’
벽에 기대어 가쁜 숨을 몰아쉬는 류희수.
류희수의 배에선 쉴 새 없이 피가 솟구치고 있었다.
‘무기가 순간 이동이라니.’
처음부터 저 거구의 데몬이 나타난 건 아니었다.
한참 공세를 막아내던 중 하늘로 거대한 창을 가진 데몬이 나타났었다.
뭐하는 놈인가 알아볼 새도 없이 창을 내던졌던 데몬.
말도 안 되는 속도로 쏘아지는 창에 비광은 곧장 패를 펼쳤었다.
하지만.
- 스륵.
날아오던 창은 중간에 모습을 감추더니 류희수의 옆구리 앞에서 모습을 나타냈었다.
류희수 역시 반응할 새도 없이 등장한 창에 속수무책으로 상체를 내어줄 수밖에 없었고 말이다.
- 드드드드…!
류희수가 쓰러지자 문이 열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눈앞의 데몬이 등장했었다.
저 녀석의 뒤를 이어 말도 안 되는 수의 데몬이 나타난 건 물론이었다.
‘저 새끼구만.’
눈앞의 데몬은 한쪽 팔만 색이 달랐다.
파란색인 신체와 달리 기괴한 생김새의 붉은 팔을 이어 붙인 모습.
훗카이도에서 백운이 팔을 날렸다는 헤키리스란 놈이었다.
“끝난 거냐?”
헤키리스가 여유로운 몸짓으로 비광을 내려다봤다.
“흥미로운 능력이었다만 별건 없구나.”
입을 이죽이며 헤키리스가 웃음을 흘렸다.
“거참 패죽이고 싶은 면상이네.”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비광이 난처한 미소를 머금었다.
‘한쪽만 못 때리는 룰이라니.’
헤키리스가 등장한 이후 비광은 갖가지 패를 조합해 다양한 공격을 쏟아부었었다.
하지만 그중 헤키리스에게 닿은 공격은 단 하나도 없었다.
쏘아진 모든 공격이 마치 실체가 없는 것에 닿은 것처럼 그대로 지나쳐 버리거나 소멸해버린 것이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헤키리스가 휘두르는 공격엔 실체가 있어 방어는 할 수 있었다.
‘반칙 아닌가.’
어떻게든 방어해내며 버텨냈지만 한계는 금방 찾아왔다.
헤키리스가 오기 전부터 비광은 이미 지친 상태였다.
류희수를 도우러 오면서, 그리고 이곳에 도착해서 적지 않은 데몬을 상대했었기 때문이다.
하나 같이 어중이떠중이가 아닌 꽤 강력한 개체였던지라 체력의 소모는 더 극심했다.
거기다 방금까지 쏘아지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헤키리스의 공격까지 쏟아지니 더 이상 견뎌낼 재간이 없었다.
“음?”
왼팔을 휘감는 보라색 기운에 헤키리스가 류희수를 쳐다봤다.
“뭘 한 거냐?”
류희수의 염력도 비광의 공격과 마찬가지였다.
헤키리스의 팔에 닿기 무섭게 원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져 버렸다.
“이제 더 보여 줄 게 없다면 이만 죽어라.”
헤키리스가 왼손으로 푸른빛이 감도는 에너지를 모으기 시작했다.
훗카이도를 날려버렸던 에너지와 같은 류의 힘이었다.
“아직 하나 더 남아있긴 하거든.”
비광이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온몸으로 끔찍한 고통이 퍼지고 상처에선 쉴 새 없이 피가 솟구쳤다.
움직여선 안 되는 상태지만 이대로 주저앉아 있을 순 없었다.
“진정한 타짜는 마지막 패를 까지 않는 법이지만…. 특별히 보여주지.”
두 장의 패를 고른 비광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2월은 매화꽃과 휘파람새.”
“음?”
낮게 읊조리자 주위로 바람이 일며 수많은 붉은 매화가 흩날렸다.
순식간에 공간을 덮어나가기 시작한 매화가 모든 이의 시야를 가렸다.
그렇게 무언가 시작되려는 찰나.
“겨우 이딴 게.”
파앙!!
헤키리스의 가벼운 손놀림 한 방에 주변을 둘러쌌던 매화가 흩어졌다.
“네놈의 마지막…!?”
실망했다는 투로 말하던 헤키리스의 눈이 커졌다.
비광의 등 뒤에 쓰러져 있던 류희수가 사라져 있었다.
“큽… 크하하하하하하!”
주변 일대가 진동하는 광소를 터뜨린 헤키리스.
그렇게 한참 웃던 헤키리스가 고개를 흔들었다.
“먼지를 구하기 위한 먼지의 잔재주라… 눈물겹구나.”
“마음껏 지껄여라.”
비광이 고개를 들어 헤키리스를 바라봤다.
지금까지 쏟아부은 것보다 강한 공격패는 남아있었다.
하지만 비광은 그 패를 뽑기 위해 마지막 힘을 사용하지 않았다.
‘어차피 통하지도 않는데.’
현재 주어진 상황에서 가장 최적의 패를 뽑는 것.
도박사 비광이 추구해온 이상이었다.
“여흥은 끝났으니 이만 죽어라.”
붉은 팔이 날카로운 검으로 변하고.
비광이 조용히 들어 올려지는 헤키리스의 검을 응시했다.
이젠 더 이상 패를 뽑을 힘도, 한 발자국 뗄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살면서 항상 최적의 패를 뽑아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내리쳐지는 검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는 비광.
‘마지막에 뽑은 패는 썩….’
비광의 입가로 희미한 미소가 그려지고.
‘나쁘지 않았네.’
푸화아아아악!
허공으로 피가 흩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