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8화. 맹약
‘뭐냐 이건…!’
헤키리스가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봤다.
함께 있던 데몬들도 마찬가지였다.
누가 명령한 게 아님에도 데몬들은 백운에게 달려들던 걸 멈추고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정확히 뭐라고 표현하긴 힘들지만 몸을 얼어붙게 만드는 이질적인 기운이 공간을 뒤덮는 중이었다.
‘이건 마치.’
헤키리스가 백운의 날개를 응시했다.
정체불명의 불길함을 쉴 새 없이 일렁이던 검은 연기의 날개.
저 날개와 비슷한 기운이었다.
스아아아아…!
백운의 손등에서 뿜어지던 빛이 솟아오르는가 싶더니 하늘을 타고 넓게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하늘이 이어져 있는 모든 곳으로 뻗어 나갈 기세였다.
한동안 빛이 퍼져 나가는가 싶더니 주변으로 눈에 띄는 변화가 나타났다.
쿠지지직…!
“!?”
헤키리스와 데몬들의 눈이 커졌다.
백운의 등 뒷공간으로 유리창이 깨지는 것처럼 금이 가고 있었다.
잠시 후엔 실제로 깨진 유리 조각처럼 공간이 떨어져 내렸다.
“무슨 짓을 한 거냐…!”
헤키리스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공간이 떨어져 나간 곳에서 말도 안되는 오한과 불길함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낮은 등급의 데몬은 제대로 서 있지 못하고 무릎을 꿇게 하는 기운이었다.
“숫자 좀 맞췄어.”
고개를 내린 백운이 손등의 문양을 바라봤다.
“오자마자 부르고 싶었는데 시간이 꽤 걸리더라고. 그래서 기다리고 있었다. 문이 준비될 때까지.”
“!!!”
헤키리스의 머리로 시간이 네 편인 거 같냐고 묻던 백운의 말이 떠올랐다.
그땐 궁지에 몰린 백운이 아무 소리나 지껄이는 거라고 생각했었다.
“뭘 불러들인…!!!”
헤키리스의 물음은 끝까지 완성되지 못했다.
정확히는 완성될 필요가 없었다.
떨어져 나간 공간 뒤로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이 세계의 것이라곤 전혀 생각되지 않는 존재들이 말이다.
* * *
등 뒤로 느껴지는 서늘함에 미소를 그렸다.
처음 망자의 세계에 갔을 땐 참 재수 없는 기운이다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부름을 받고 왔다.”
낮고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오는가 싶더니 망자의 왕 카사락이 옆으로 걸어왔다.
여전히 거대한 덩치에 잿빛의 왕관을 쓴 카사락.
카사락이 다가오자 익숙한 불길함이 느껴졌다.
칼데아 덕에 익숙함을 넘어 친근하게까지 느껴지는 감각이었다.
안 오는 줄 알았네.
부르고 한참이 지났는데도 반응이 없어 사기 당한 건가 했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 카사락이 문을 열고 있는 중임을 손등의 문양으로 알려오며 한숨 돌렸었다.
“충분히 데려왔겠지?”
대답 대신 뒤쪽을 바라보는 카사락.
그런 카사락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공간이 깨져 나간 곳은 망자의 세계와 이쪽을 잇는 통로가 되어있었다.
그리고 통로 너머엔 셀 수 없이 많은, 그 끝을 알 수 없는 망자의 군대가 서늘한 안광을 뿜어내며 줄을 지어 서 있었다.
이전에 봤을 때와 마찬가지로 압도적인 숫자였다.
“적은 누구인가?”
카사락이 무미건조하게 물어왔다.
적이 누구든 상관없다는 듯한 말투였다.
“이 세계의 존재가 아닌 모든 것들.”
악귀참도를 들어 헤키리스를 가리켰다.
“저놈만 빼고.”
고개를 든 카사락이 조용히 헤키리스를 응시했다.
언제부턴지 헤키리스의 입은 다물어져 있었다.
눈에 띄게 굳은 건 물론이었다.
사방에 퍼져 있던 데몬들도 마찬가지였다.
카사락과 망자의 군대가 등장하고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고요한 적막이 깔려있었다.
“알겠다.”
나지막이 대답한 카사락이 책을 들어 올렸다.
아까 문양에서 퍼져 나갔던 것처럼 책에서 빛이 쏘아졌다.
그리고 빛이 닿은 모든 공간이 깨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아래로 서서히 걸어 내려오는 엄청난 수의 망자.
한국 전체를 다 뒤덮고도 남을 숫자였다.
“망자들이여.”
망자가 어느 정도 땅에 다다르자.
“맹약의 주인이 택한 적을.”
카사락이 손을 올리며 망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섬멸하라.”
적막이 깔린 장소로 카사락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울려 퍼지고.
“크아아아아아악!”
망자의 거대한 해일이 눈앞의 데몬들을 덮치기 시작했다.
“이런 약한 놈들을 불러서 뭘 하겠다는 거냐!!”
이제야 정신을 차린 건지 헤키리스가 포효하며 밀려오는 망자에게 에너지를 뿜어냈다.
망자를 그대로 통과하고 지나가 버리는 에너지.
“!?”
“왜? 놀랐어?”
멈추지 않고 달려오는 망자에 헤키리스의 동공이 커졌다.
망자에게 헤키리스의 공격이 닿을 리는 없었다.
콰아아아아---!!
“크… 크르륵!!”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데몬이 빠른 속도로 시야에서 사라져 갔다.
망자의 숫자도 숫자지만 카사락의 화력이 엄청났다.
쉴 새 없이 에너지를 뿜어내며 데몬을 쓸어버리고 있는 카사락.
요청한 대로 카사락의 에너지는 건물이나 사람에겐 영향을 주지 않고 있었다.
“끄아아아아아!”
의기양양하던 높은 등급의 데몬 몇 마리가 망자에게 둘러싸여 피곤죽이 되어 갔다.
뛰어난 능력을 가진 개체라도 공격 자체가 닿지 않으니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무슨…!”
자신을 지나치는 망자를 보며 헤키리스가 우왕좌왕하며 대검을 휘둘러댔다.
학습 능력이 없는 건지 전혀 소용없는 짓을 해대고 있는 헤키리스.
한심한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다 앞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제야 둘만 남았네.”
목을 뚜둑 풀어주며 악귀참도를 들어 올렸다.
카사락과 망자들이 헤키리스의 부하를 깔끔하게 치워 준 덕에 더 이상 전투를 방해할 건 남아있지 않았다.
“자 다시.”
연기를 터뜨리며 헤키리스의 바로 앞까지 이동했다.
“시작해보자고.”
* * *
“이게 대체…?”
팔을 내린 류희수가 멍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봤다.
근처에서 새롭게 등장한 S급 데몬을 상대 중이던 강태황도 마찬가지였다.
‘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순간 느껴졌던 서늘함에 강태황은 낭패감을 느꼈었다.
처음 느껴보는 이질감이라 뭐라 설명하긴 힘들었지만, 치솟는 불길함에 강태황은 본능적으로 확신했었다.
상황을 더 최악으로 치닫게 만드는 새로운 적이 도착했다고 말이다.
‘아니었던 건가.’
온몸을 찌릿하게 만드는 서늘함이 느껴지고 얼마 후.
눈앞의 공간이 깨지며 엄청난 숫자의 망자가 쏟아져 나왔었다.
아군이라 생각하기 힘든 생김새였기에 당연히 강태황과 류희수는 망자들을 공격했었다.
연기를 때린 것처럼 허무하게 통과해버린 공격에 낭패감을 느꼈었고 말이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망자는 강태황과 류희수를 피해 데몬을 공격하기 시작했었다.
인식할 수 있는 존재가 데몬 뿐이라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 장관님! 강원도에도 나타났습니다!
망자들은 이곳에만 나타난 게 아니었다.
서울을 넘어 한국 전체에서 망자의 등장이 보고되고 있었다.
이곳과 마찬가자로 다른 곳의 망자들도 데몬을 쓸어버리는 중이었다.
“장관님. 문 아래쪽에서 새로운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지만…. 구울 혹은 망자로 보이는 존재들이 공간을 깨고 나온 건 무기왕의 뒤가 처음이었다고 합니다.”
“뭐…?”
헌터가 보고를 이어나갔다.
“무기왕 뒤에서 망자의 대장으로 보이는 자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무기왕과 몇 마디 대화를 주고받는 듯 했고, 그 자가 손을 들어 명령했다고 합니다. 음질이 안 좋지만 당시 목소리가 녹음된 파일입니다.”
잠시 지직거리더니 서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맹약의 주인이 택한 적을… 섬멸하라.
‘맹약의 주인이라고…?’
상황을 듣고도 쉽사리 와닿지 않는 상황이었다.
뭐라고 정의 내리기도 힘든 존재가 백운에 의해 불려나왔고.
심지어 백운을 위해 데몬들을 섬멸하고 있다니.
직접 보고 있는 게 아니라면 절대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
무언가 생각하던 강태황이 무전기를 집어 들었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상황이지만 무기왕이란 이름을 들으니 뭐랄까.
억지로 납득이 갈 것도 같은 기분이었다.
“전 인원 들어라. 지금 나타난 망자는 적이 아니다.”
# 그럼…!?
“교전하지 말도록. 어차피 우리의 공격이 통하는 존재가 아니다.”
작은 한숨을 내쉰 강태황이 주변을 둘러봤다.
이미 사방을 가득 채운 망자가 해일처럼 데몬들을 쓸어버리고 있었다.
강태황이나 헌터들이 나설만한 틈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전 인원은 전투를 멈추고 인명 구조를 우선하도록. 다시 한번 알린다. 전투를 멈추고 인명 구조를 우선시한다.”
# 알겠습니다!
지시가 끝나자 뒤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이야….”
온몸에 붕대를 칭칭 감은 비광이었다.
비틀거리며 걸어온 비광이 강태황 옆에서 고개를 내저으며.
“이놈은 대체.”
백운이 싸우고 있을 문 아래를 응시했다.
“뭘 하고 다녔던 거야…?”
* * *
“크아아아아!”
비명과 함께 하늘로 푸른 피가 솟아올랐다.
완전히 동강 나 바닥으로 떨어진 헤키리스의 뿔.
발로 뿔을 툭 차버리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 개자….”
서걱!
“끄라아아아악!”
남은 뿔까지 날려주자 헤키리스가 고통스럽게 울부짖었다.
아까였다면 대검이라도 휘둘렀겠지만, 양팔이 사라진 지금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몇 걸음 더 다가가자 입으로 에너지를 모으는 헤키리스.
쏠 때까지 기다려 줄 생각은 없었다.
칼데아로 빠르게 이동하며 놈의 아킬레스건과 무릎 뒤를 베어냈다.
콰아아아아아---!
방향을 잃은 에너지가 하늘로 뿜어지고.
10미터가 넘는 헤키리스의 거구가 쿵 소리와 함께 무릎을 꿇었다.
“끄르… 끄…!”
의기양양하던 헤키리스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지금은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이를 꽉 깨물고 있는 나약한 덩치 한 마리가 있을 뿐이었다.
“말도 안 된다…. 어떻게 이런…. 모든 것의 왕인 내가….!”
쿠드드득!!
“끄라라아아아아악!!”
악귀참도를 꽂아 어깨를 날려버렸다.
다음엔 달아날 수 없도록 두 다리도 완전히 베어냈다.
그대로 뒤로 넘어간 헤키리스를 밟고 천천히 올라섰다.
“더럽게 약하네. 진짜.”
헤키리스는 더 이상 건방지다거나 헛소리라거나 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고통스럽게 울부짖으며 몸을 바둥거리고 있었다.
저벅.
몸을 짓밟으며 헤키리스의 얼굴 바로 앞까지 걸어갔다.
“크으…!”
날 올려다보는 헤키리스를 조용히 내려다봤다.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었다.
녀석의 두 눈동자에 가득 찬 죽음의 공포를 말이다.
“5분도 안 걸렸을걸.”
방해하는 이가 없는 전투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헤키리스의 에너지는 내 악귀참도의 먹이에 불과했고 몸의 움직임 역시 날 한참 하회하는 수준이었다.
천천히 발을 들어 헤키리스의 얼굴 위로 가져갔다.
“으…!”
그리고 아까 말했던 대로 짓밟기 시작했다.
쾅! 쾅! 쾅! 쾅! 쾅!
분이 풀릴 때까지 짓밟고 나자 헤키리스의 머리는 땅 저 아래까지 처박혀 있었다.
“안락하지? 거기가 원래 네가 있어야 하는 자리야.”
“사… 살려…줘. 다신… 나오지 않으… 마.”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아무렇지도 않게 지역 하나를 날려버리려던 놈이 이제 와서 살려달라니.
“팔 하나 날아갔을 때.”
잠시 내려다보고 있다 마지막 말을 건네며.
“조용히 처박혀 살았어야지.”
악귀참도로 헤키리스의 목을 베어냈다.
높은 곳까지 솟아오르는 헤키리스의 푸른 피.
피를 따라 고개를 들자 서서히 밝아져 오는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하아.”
한숨을 뱉어내며 악귀참도와 칼데아를 해제했다.
얼굴로 비쳐오는 희미한 햇살.
오랜 새벽이 끝나고 아침이 찾아오고 있었다.
“아침이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