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9화. 싸움이 끝나고
# 나타났던 데몬은 모두 사라졌습니다. 당장 육안으로 구분되는 개체는 없습니다.
들려오는 보고에 강태황이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들으면서도 쉽사리 믿기지 않는 보고였다.
두어 시간 전까지만 해도 사방에서 데몬이 들끓었는데 이젠 보이지 않는다니.
망자가 나타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의 일이었다.
‘데몬 입장에서도 속수무책이었겠군.’
비광이 헤키리스란 데몬에게 손 놓고 당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같았다.
공격이 닿지 않아 막을 수 없는 존재.
그런 존재가 수십 배 많은 수로 밀고 들어왔으니 금세 쓸리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만약 적이었다면….’
상황을 그려보던 강태황이 고개를 내저었다.
의미없는 상상이었다.
애초에 싸움이란 개념이 성립될 수 없는 관계였다.
‘저쪽도 순식간에 끝났군.’
망자의 등장보다 놀라운 건 백운이었다.
비광을 데리고 나올 때 헤키리스와 마주했었던 강태황.
찰나의 순간이지만 강태황은 느낄 수 있었다.
눈앞의 헤키리스는 단순히 덩치만 큰 게 아니란 것을 말이다.
공격이 닿지 않는 특성을 제외하고라도 헤키리스는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백운과의 전투에서 헤키리스가 보여준 엄청난 움직임과 파워는 보는 이로 하여금 혀를 내두르게 했다.
가진 특성까지 고려하면 그야말로 끔찍한 존재.
하지만 그런 존재조차 백운 앞에선 그저 한 마리 평범한 데몬에 불과했다.
‘저 정도로 강했던 건가.’
강태황이 작은 한숨을 내쉬며 가만히 서 있는 백운을 응시했다.
망자가 데몬을 쓸어버린 뒤.
강태황은 다대일로 싸우고 있을지도 모르는 백운을 돕기 위해 이곳으로 왔다.
도착했을 땐 이미 헤키리스와 백운의 전투가 한창이라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고 말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눈앞의 전투에 강태황은 자기도 모르게 넋을 놓고 말았다.
무기왕이, 백운이 강하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수많은 동영상을 봐왔고 기태랑과 비광에게 전해 들은 것도 많았기 때문이다.
개방 능력은 다양해서 예측이 힘들며 말도 안되게 강력해 대응이 불가능에 가깝다…. 이것이 지금까지 강태황의 머릿속에서 정리된 백운이었다.
‘한참 모르고 있었군.’
강태황이 고개를 흔들었다.
조금 전 전투를 보며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까지 알고 있던 건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검까지 저렇게 다룰 수 있었던 건가.’
오랜 헌터 생활을 해오며 검과 관련하여 개방한 이들을 자주 봐왔었다.
그중엔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검의 천재들도 있었다.
그러나 백운의 검술은 그들을 압도했다.
마치 변화무쌍한 파도를 보는 것 같았다.
찰나의 순간에 맞춰 유연하게 변화하며 적이 질식할 때까지 쉴 새 없이 몰아치는 파도 그 자체.
여기에 백운이 보여 준 전투 센스 또한 엄청났다.
적이 위라고 생각하면 좌측에서, 위라고 생각하면 우측에서.
매 순간 헤키리스를 압도했던 움직임은 날개의 유무나 신체의 강약, 혹은 경험의 정도만으론 나올 수 없는 것이었다.
‘재능.’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무기왕 백운은 지금까지 강태황이 봐온 그 어떤 이보다 천재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사락.
강태황이 옆을 스쳐 지나가는 망자들을 바라봤다.
목표했던 데몬을 전부 제거해서일까.
망자들은 백운이 서 있는 위치로 돌아가고 있었다.
‘장관… 이군.’
현재 상황에 장관이란 표현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었다.
허나 이 단어 말고는 눈앞의 광경을 설명할 단어가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백운을 중심으로 모여드는 서늘한 안광의 해일.
그들은 마치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자신들을 부른 존재가 돌아가는 걸 허락해주기를 말이다.
* * *
망자들이 모여드는가 싶더니 카사락이 옆으로 다가왔다.
어디 하나 상한 곳 없이 나왔던 그대로의 모습.
예상은 했지만 눈으로 다시 보니 참 보통이 아닌 존재란 생각이 들었다.
“그대가 말한 적은 섬멸되었다. 도망치거나 숨어버린 것들이 있지만 그것까지 찾아내는 건 불가능하다.”
카사락이 들고 있던 책을 보여주었다.
그곳에선 푸른 기운으로 만들어진 회중시계가 있었다.
천천히 흘러가는 초침은 정중앙에 닿기 직전이었고 말이다.
망자라고 해서 무한정 다른 세계에 머물 수 있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충분해.”
고개를 끄덕이자 카사락이 내 손등을 바라봤다.
맹약의 문양이 그려진 곳이었다.
무엇을 원하는지 알기에 먼저 말을 건네며.
“맹약은 제대로 이해되었다.”
순순히 손등을 들어 주었다.
“가져가.”
잠시 날 응시하던 카사락이 내 손등 위로 자신의 손을 가져다 댔다.
푸른빛이 두 손을 감싸는가 싶더니 이내 손등의 문양과 함께 사라졌다.
“그대와 나의 맹약은 종료되었다.”
나지막이 읊조린 카사락이 손을 들어 올렸다.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빛이 퍼져나가며 열리기 시작한 문.
문 너머로 낯설지 않은 망자의 세계가 보였다.
저런 곳에서 지냈다니.
그리 오랜 시간을 보낸 건 아니지만 다시 봐도 참 별로인 장소였다.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그런 장소.
문이 열리자 망자들이 먼저 망자의 세계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해일처럼 밀려가는 안광을 보고 있자니 뭐랄까.
저런 놈들 전부를 상대로 검 한 자루 들고 싸웠던 건가 싶어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심지어 녀석들의 본진에서 말이다.
“너도 알다시피 세계 간의 간섭은 금지되어 있다. 이번은 맹약에 의해 행하여진 일. 두 번 다시 이런 일은 없을 것이다.”
다시 보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길게 늘여 하는 카사락.
내가 또 온갖 핑계를 대며 붙들고 늘어질까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알겠으니까 다시 만나지 말자고.”
손을 흔들자 마음이 놓인 걸까.
몸을 돌린 카사락이 망자의 세계로 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가고 싶어도 못 가는데.”
멀어지는 카사락의 뒷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이젠 길을 이용할 수 있는 로인도, 좌표가 찍힌 아테네의 목걸이도 없었다.
오라고 초대해줘도 못 가는 상황이었다.
“방법이 없어서 다행이긴 하네.”
조용히 미소를 머금었다.
카사락이 걱정하는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했다.
순식간에 밀려들어 데몬을 쓸어버린 망자의 부대.
탐날 수밖에 없는 전력이었다.
콰아아아아…!
카사락을 마지막으로 세계를 잇는 문이 닫혀갔다.
방금까지 모든 곳을 가득 메웠던 망자도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졌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주변을 훑어보았다.
갖가지 데몬의 시체가 사방에 널브러져 있었다.
치우는 것도 한 세월이겠네.
한국의 피해도 적진 않았다.
전투의 여파로 박살 난 건물이 수두룩했다.
이에 비례해서 사상자도 꽤 많을 터였다.
나도 모르게 깊은 한숨이 나왔다.
딱히 애국심 같은 게 있는 건 아니지만 내가 살던 곳이 박살 난 광경을 보는 건 씁쓸한 일이었다.
일단 돌아가볼까.
멀지 않은 곳에서 날 지켜보고 있는 강태황.
비광의 상태나 각 지역의 상황도 궁금했기에.
옷에 묻은 피를 대충 털어내고 강태황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말도 안 된다.’
땀으로 온몸을 적신 포이카가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되는, 정확히는 불가능한 일이 벌어졌다.
공당에서 쏟아져 나온 데몬은 정체불명의 존재들에게 학살당했으며 포이카의 왕인 헤키리스는 조금 전 백운에게 목이 달아나고 말았다.
그 막강한 헤키리스가 손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죽어버리다니.
충격적이고 압도적인 패배였다.
‘이길 수 없다.’
남은 데몬을 끌어 모을 순 있겠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망자가 사려졌다고 해도 저 괴물 백운이 남아있었다.
헤키리스마저 압도하는 괴물을 포이카나 다른 데몬이 어찌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지금은 후일을 도모하는 걸 떠나 백운이 없는 곳으로 도망가는 게 우선이었다.
망자들이 사라질 때까지 숨죽이고 있던 포이카가 손을 들었다.
혹시나 망자가 자신의 문을 알아차릴까 그들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린 것이었다.
“포이카 님…!”
함께 충격에 빠져있던 연창환이 포이카에게 다가왔다.
그나마 인간 중에선 냉정한 판단을 내리던 연창환이었으나 지금은 완전 넋이 빠진 모습이었다.
“이젠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연창환이 뭐라고 하든 포이카의 귀엔 들리지 않았다.
최대한 집중하여 빠르게 문을 만들어낸 포이카.
이곳으로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포이카가 열린 문으로 발을 내디뎠다.
“어디 가냐.”
“!!!”
그 순간 들린 서늘한 목소리에.
걸음을 옮기던 포이카의 몸이 굳어졌다.
* * *
걸음을 멈춘 데몬을 바라봤다.
강태황에게 가던 중 묘하게 낯익은 감각이 느껴져 와봤는데.
웬 데몬 한 마리가 문으로 도주하고 있었다.
“너구나. 홋카이도랑 이곳에 문 열어재낀 새끼가.”
잠시 굳어 있던 녀석이 곁눈질로 날 바라봤다.
“이대로 조용히 떠나겠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허.”
헛웃음을 터뜨리고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벌써 다 개판을 내놨으면서 뭘 이제 와서 조용히 떠나.”
“헤키리스 님만큼은 아니지만 쉽지 않을 거다. 내 능력은 이 장소에 더 많은 피해를 낼 수도 있다. 넌 무사할지언정 이미 만신창이인 다른 녀석들에겐 치명적이겠지.”
나름 책사 역할이라도 했던 걸까.
데몬임에도 끌어다 쓸 수 있는 건 다 내뱉고 있었다.
“그거 참 무서운 소리네. 그런데 할 수 있겠어?”
“무슨 말이냐?”
[쿠훌린 - 게이볼그]
[심장을 꿰뚫는 창]
“죽기 전에 할 수 있겠냐고.”
“무슨 소…!?”
뚝.
이제서야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는 피.
그리고 그 피가 흐르는 장소가 어딘지를 말이다.
“어… 어느새…!”
입에서 초록 피를 뿜은 데몬이 무릎을 꿇었다.
동시에 열리고 있던 문도 사라졌다.
“이 괴…물 새….”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한 데몬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문 여는 게 메인이고 전투 능력 자체는 나약한 놈 같았다.
“그나저나.”
데몬 앞에 서 있던 남자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쪽은 왜 여기에 있어? 그것도 데몬이랑 같이.”
예의상 물어보긴 했지만 뭐하는 새낀지는 대충 짐작이 갔다.
이번 일은 데몬 혼자서 벌인 게 아니었다.
무슨 목적인지는 몰라도 여러 기업이 연관되어 있을 터.
아마 눈앞의 놈도 그중 하나일 게 분명했다.
“… 발뺌할 순 없겠군.”
예상 외로 침착한 놈이었다.
순순히 무릎을 꿇더니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리는 남자.
“협상을 요구한다. 이번 일에 관련된 이들의 정보를 건네겠다. 나쁜 거래는 아닐 테지.”
조용히 남자의 얼굴을 쳐다봤다.
죄책감이나 후회 따위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얼굴이었다.
“확실히 나쁜 거래는 아닐 거야. 수사하는 입장에선.”
천천히 남자에게 다가갔다.
남자의 생각대로 수사기관은 제안을 받아들일 테고 이놈은 해봐야 감옥에 갇히는 게 전부일 것이었다.
돈과 권력이 적지 않은 만큼 언제 어떻게 풀려날지 알 수 없었고 말이다.
“내 경험상 말이야. 너 같은 놈은 살려두면 두고두고 똥을 싸더라고. 이전에 했던 게 잘못인 줄도 모르고.”
“뭐 하는 거지? 무기왕 너 역시 1급 헌터다. 국가에 귀속된 자가 자국민을 상대로 살인이라도 하겠다는 거냐.”
뚫린 입으로 술술 말하는 남자에 쓰고 있던 가면을 벗었다.
“…?!”
“내 이름은 백운이야. 무기왕이지. 난 내 얼굴을 본 놈을 살려두지 않아. 정체를 숨기고 싶거든.”
“지금 무슨…!”
남자의 얼굴을 붙잡으며.
“그리고 내 기준에서 넌 사람 새끼가 아니므로 이건 살인이 아니다.”
[라 - 불꽃의 문양]
입가로 미소를 그려주었다.
“정화지.”
푸화아아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