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기왕이 헌터로 회귀했다-371화 (371/473)

371화. 잔당

“뭐야 시발.”

욕조에 뜨신 물을 받아 몸을 푹 담근 후 시원한 맥주 한 잔을 때려 넣으려고 했었다.

얼마 전까지 멀쩡히 세워져 있던 내 오피스텔이 사라진 걸 발견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어디 갔어.”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눈을 몇 차례 비볐다.

별의별 걸 다 겪으며 사는 중임에도 영 현실성이 없는 순간이었다.

집이 사라지다니.

정확히는 조금 남아있긴 했다.

한때 집이었던 것의 철근과 골자 시멘트들이 말이다.

“여기에 사시던 분인가요?”

편의점 봉다리를 들고 호달달 떨고 있어서일까.

현장을 통제하던 남자가 다가왔다.

얼굴엔 안타깝다는 빛이 한가득이었다.

“바다 근처라 제일 먼저 대피가 시작된 곳이었어요. 닿아있는 해변 쪽에서 엄청나게 몰려왔거든요. 다행히 일찍 대피를 시작한 덕에 인명피해는 없었고요.”

다친 사람이 없다는 건 당연히 다행인 일이었다.

하지만 입에서 약간 앓는 소리가 새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솔직히 사놓고 싸돌아다니느라 몇 번 잔 적도 없었다.

대충 차로 따지면 새로 뽑은 뒤 몇 번 못 타고 폐차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일부러 노린 건가.

더 어이가 없는 건 내가 살던 오피스텔만 박살 났다는 것이었다.

누가 노리고 데몬을 갖다 던진 게 아니라면 이럴 수가 있나 싶었다.

내게 원한을 가진 사람을 떠올리고자 하니 너무 많아서 헤아려지지도 않았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실 순 없고요. 가실 곳이 없으면 임시 대피소라도 안내해 드릴까요?”

“아,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고생하시란 말을 남기고 몸을 돌렸다.

약간 멍한 상태라 내가 제대로 걷고 있는지도 의문이었다.

보험 들어져 있나.

살 때 뭔가 보긴 했는데 정확히 떠오르진 않았다.

애초에 집이 통째로 날아가는 걸 대비한 보험이 있을까 싶기도 했고 말이다.

재수가 없으려니 집이 날아가네.

헛웃음을 터뜨리며 터벅터벅 걸음을 내디뎠다.

어제 하룻밤을 보냈던 중앙 헌터청으로 다시 가야 하나 고민됐다.

불가능이야.

지금 머릿속엔 뜨끈한 물에 몸을 담그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어제 대충 샤워하긴 했지만 그것만으론 몸에 쌓인 피로를 완전히 제거할 수 없었다.

한참 걸어가다 보니 한적한 곳에 위치한 모텔이 보였다.

저 너머로는 조금 멀지만 유명 5성급 호텔이 있었다.

소시민인 만큼 원래라면 모텔로 가야겠지만 오늘은 뭔가, 뭔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얼마 있지.

그렇다고 마냥 현실을 외면할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잔고를 확인하기 위해 옆에 있는 가게로 향했다.

요샌 한국에 머물렀던 적이 거의 없어 잔고 확인을 안 한 지가 한참 됐었다.

돈 한 푼도 안 쓰고 잘 얻어먹고 다녔다.

스스로의 생존력에 감탄하며 ATM기로 손을 뻗었다.

하도 부서져서 더 이상 사지 않고 있었던 액션캠.

덕분에 동영상을 안 올린지도 꽤 되어 후원금이 쌓여 있길 기대하기도 힘들었다.

삐빅.

신호음이 들려오고 잠시 후.

“시발…?”

조금 전과 다른 의미로 욕이 나왔다.

화면엔 생각지도 못한 금액이 떠올라 있었다.

“17억? 왜…? 어째서?”

뭔가 잘못 들어온 건가 싶어 빠르게 이체 내역을 훑어봤다.

만약에 잘못 들어온 거라면 냅다 뽑아 마늘밭에 묻어둘 생각이었다.

“오. 1급 되면서 월급 많이 올랐고.”

눈부신 월급이었으나 이것만으로 17억이란 금액은 불가능했다.

“홀리 슅.”

이체 내역은 다 읽어볼 수 없을 정도로 길었다.

그리고 월급을 제외한 나머지 내역은 모두 동일했다.

예전에 올려뒀던 동영상에서 쌓인 후원금이었다.

“옛날 동영상에 후원금을 쏜다고?”

당장 쭈그리고 앉아 한튜브에 접속해 내 동영상들을 살폈다.

올린지 한참 됐음에도 각 동영상에 엄청난 수의 댓글이 달려있었다.

바로 몇 초 전까지도 말이다.

# 성지 순례 왔습니다! 또 다시 한국을 구한 무기왕! 후원금도 살포시 두고 갑니다! @ 100,000.

돈을 놔두고 간다고?

이런 댓글이 동영상을 올리지 않은 시점부터 수천 개는 쌓여 있었다.

그 돈이 모여 저런 비현실적인 금액이 잔고에 찍히게 되었고 말이다.

멍하니 잔고와 댓글들을 살피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등 뒤로 땀이 흘렀다.

새삼스레 불로소득의 힘을 깨닫게 된 순간이었다.

“….”

그렇게 잠시 굳어 있다 무릎을 탁 치며 몸을 일으켰다.

잔고를 확인하기 전과 똑같은 외관이었으나 조금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확연히 달랐다.

어깨는 당당히 펴졌으며 얼굴론 여유가 감돌고 있었다.

아까 보이던 모텔은 시야에서 깨끗하게 사라진 상태였다.

“자 호텔 드가자.”

고민을 지운 후 저 멀리 보이는 호텔로 걸음을 옮겼다.

* * *

“요즘엔 이런 호텔도 있구만.”

술 한 잔을 기울이며 여유롭게 주변을 둘러봤다.

공간을 원형으로 감싼 대나무와 그 중앙에 돌을 쌓아 만들어낸 탕.

이곳은 무려 개인 야외 온천이 딸린 호텔이었다.

가격은 더럽게 비쌌지만 잔고를 확인한 후 뽕이 찬 상태였기에 망설이지 않았다.

룸서비스도 훌륭하고.

옆에 쌓인 꼬치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

꼬치 하나에 치킨 한 마리 가격을 자랑하는 녀석이었다.

우물거리며 단숨에 해치우고 텅 비어버린 꼬치를 응시했다.

“이 돈이면 그냥 치킨을….”

짜악!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하다 뺨을 올려쳤다.

호텔을 결제하며 이러지 않기로 했는데 본능적으로 가성비를 따지고 말았다.

띠링.

때마침 울리는 핸드폰을 확인했다.

전수희가 집 부서진 거 말하는 걸 깜빡했다고 보낸 톡이었다.

괜찮아요. 수희 님. 말해줬어도 안 믿었을 거야.

집으로 가는 중에 집이 사라졌다는 톡이 오면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직접 보지 않으면 절대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아.”

다시 술 한 잔을 기울이고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탕에 널브러져 있으면서도 마음이 마냥 편하진 않았다.

뭘 해야 하나.

내가 헌터청에 머무른다고 해서 딱히 할 일도 없는 상태.

강태황도 얼른 가서 쉬라며 내 등을 떠밀었었다.

한국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말과 함께였다.

쿄스케도 집에 갔고.

여유가 된다면 얼굴이라도 보려고 했는데 상황이 종료되자마자 쿄스케는 호다닥 돌아가 버렸었다.

히메지 성을 오래 비울 수 없어 같이 왔던 료코와 함께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대산도 바쁘고. 헌터청도 바쁘고.

뚫린 천장으로 맑은 하늘을 바라봤다.

이렇게 있자니 이틀 전에 박 터지게 싸웠던 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이 기분을 뭐라고 해야 하나.

뭔가 항상 무기라는 커다란 도착지를 목표하며 움직였다 보니 지금은 약간 붕 뜬 느낌이었다.

언제부턴가 이게 당연한 일상인 것처럼 살아왔다 보니 더 그런 것 같았다.

물론 묘한 기분이라고 생각하는 와중에도 다음은 어디로 가볼까 고민하는 중이었지만 말이다.

저 아래쪽으로 가볼까.

아직 떠나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매번 가던 유럽 쪽 말고 남미 쪽으로 향해볼까란 생각이 들었다.

여러 문명이 있는 만큼 뜻밖의 무기를 찾게 될지도 몰랐다.

유물을 보여주겠다고 약속했던 그리스나 아일랜드도 나중에 한 번씩은 들려야 했다.

“… 나중에 생각하자.”

뜨끈한 물을 떠 얼굴을 적셨다.

인천 한가운데인 만큼 진짜 온천수인지 의심되긴 했으나.

피부에 좋은 온천이겠거니 하면서 말이다.

“그나저나 이 새끼들은 다 잡았나.”

강태황은 이후 헌터청이 대응할 부분에 관해 말해줬었다.

당분간은 데몬이 휩쓸고 간 상처를 치유하는데 전념해야겠지만.

어느 정도 정리가 된 후엔 이번 일에 가담한 놈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찾아내 대가를 치르게 해줄 예정이란 것이었다.

아마 더럽게 많겠지.

아일랜드에서 한국까지 오는 동안 날 방해했던 수많은 세력.

대충 봐도 기업 한두 개에서 나올만한 자금력이 아니었다.

각 국가에 미리 승인되어 있던 것만 봐도 돈 이외에도 힘이 꽤 막강할 듯했고 말이다.

아주 박살을 내줘야지.

강태황은 쉬라고 했지만 내일부턴 나도 수색 작업에 참가할 생각이었다.

오는 길에 받았던 방해만 떠올려도 이가 갈렸다.

그것 때문에 하마터면 비광이 잘못될 뻔했었다.

시간이 더 지체됐다면 비광이 아닌 다른 이들까지도 잘못될 수 있었던 상황.

내가 신도 아니고 모든 사람을 지킬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이런 가능성을 제공한 놈들을 가만히 놔둘 생각은 전혀 없었다.

거기다 내 집도…!

눈가로 핏줄이 세워지는 게 느껴졌다.

때려죽여야 하는 이유가 쉬지 않고 튀어나오는 녀석들.

당장은 누군지 모를 녀석들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딱 기다리고 있어라.”

* * *

“이거 정말 큰일이군!”

“청풍이랑 몇 개 기업은 이미 헌터청에게 정리당했다고 하네!”

“우리 회사도 마찬가지야. 나만 간신히 몸을 피했지.”

남산에 위치한 거대한 벙커.

호화로운 장식이 꾸며진 공간에서 기업 총수들이 미간을 찌푸렸다.

모두 이번 데몬 침공에 가담한 사람들이었다.

“이제 어쩌면 좋겠습니까?”

한 남자가 말하자 모든 이의 시선이 중앙 의자로 향했다.

그곳엔 벙커에 있는 이 중 가장 젊은 남자가 앉아있었다.

시원한 스포츠 머리에 양쪽 귀에 금귀걸이를 한 남자였다.

“연창환 이사도 연락되지 않습니다. 아마 죽은 거겠죠.”

“이제 유회장님뿐입니다!”

유회장이라 불린 남자, 유지열이 싱긋 미소를 머금었다.

흡사 뱀을 닮은 가느다란 눈으로 자리에 앉은 사람들을 살피는 유지열.

‘쓸모없는 늙은이들 밖에 안 남았군.’

유지열이 마음속으로 혀를 찼다.

그나마 독기가 잔뜩 올라있던 연수정과 연창환이 쓸만했었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다 죽어버리고 말았다.

그들이 관리하던 늙은이들은 지금 눈앞에서처럼 어찌할 줄 모르고 우왕좌왕하는 중이었고 말이다.

“자금들은 어떻게 하셨나요?”

유지열의 물음에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던 이들이 입을 열었다.

“챙길 수 있는 건 최대한 가져왔네. 현금이나 다이아 혹은 금괴 같은 것들은 말이야.”

“나도 마찬가질세.”

역시 돈에 정신이 나간 탐욕스러운 늙은이들이었다.

당장 잡혀가도 모자랄 마당에 그런 것들은 챙겨오다니.

“잘하셨습니다.”

“그럼 다음은 어떻게 해야겠나? 이대로 평생 숨어 지낼 수 만은 없지 않은가!”

“맞네! 뭐가 됐든 좋으니 방법을 얘기해보게!”

재촉하는 총수들에 유지열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이제부터 계획을 세워봐야겠지만,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오오…! 벌써 계획한 게 있는 거군. 그게 뭔가?”

입가로 희미한 미소를 지은 유지열이 말을 이었다.

“쓰레기 청소죠.”

“쓰레기 청소라? 누굴 말하는 거지? 헌터청을 말하는 겐가?”

물음에 아랑곳하지 않고 유지열이 조용히 총수들을 응시했다.

“…?”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총수들의 얼굴이 허옇게 질려가기 시작했다.

“자, 잠깐! 유회장! 아니, 지금 무슨….”

“제가 총수님들을 살려둬서 좋을 게 뭐가 있나요? 잡히는 순간 제 이름을 불 게 뻔한데요. 아시다시피 기업 천일은 조심성 없는 총수님들과 달리 노출되지 않았습니다. 지금 당신들은 제게 있어 그저 위험요소일 뿐이죠.”

몸을 일으킨 유지열이 망설임 없이 입을 열며.

“김신 본부장.”

천천히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처리하세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