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2화. 흔적
어젯밤 손이 퉁퉁 불 때까지 온천을 한 덕분일까.
몸이 아주 날아갈 것처럼 개운했다.
역시 사람은 잘 먹고 잘 쉬어야 돼.
고개를 끄덕이며 헌터청으로 걸음을 옮겼다.
수색을 돕기로 한 만큼 제대로 마음을 먹었었다.
가루로 만들어야 하는 놈들을 최대한 빨리 찾아내기로 말이다.
중앙 문을 열고 들어가자 커다란 덩치의 강태황이 눈에 들어왔다.
날 발견하더니 반가운 미소를 머금는 강태황.
손을 흔들려던 강태황이 시선이 집중될 걸 우려해 엘리베이터 쪽으로 고갯짓했다.
“안녕하세요. 장관님.”
엘리베이터 앞에 나란히 서 고개를 꾸벅였다.
“이거 참 여러모로 면목 없구만.”
“하하… 아닙니다. 제가 원해서 온 건데요.”
오늘 아침 미리 연락했을 때도 강태황은 그렇게까지 무리할 필요 없다고 말했었다.
내가 고집을 부려 기어코 헌터청으로 온 것이었다.
“기태랑은 제주도로 가 있어. 거기서 나타났던 놈들을 수사 중이지.”
“뭐라도 나온 게 있나요?”
“딱히 추가적으로 나온 건 없어. 녀석들은 이미 리스트에 올라온 기업 소속이었거든. 말단이라 무언가를 더 알 거 같지도 않았고.”
몇 명의 인원이 엘리베이터에 타자 잠시 말을 멈추는 강태황.
이내 사람들이 내리자 강태황이 말을 이었다.
“당장 조사는 기태랑과 2급 이상의 몇몇 인원이 진행하고 있어. 나머지는 전부 현장에 나가있고.”
작은 한숨을 내쉰 강태황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실 인원이 부족하던 참이었어. 조사 중인 대기업들이 여러 기관과 얽힌 흔적도 발견되는 중이거든. 헌터청도 예외는 아니고. 그렇다 보니 믿고 조사를 맡길만한 인원이 몹시 제한적이더군. 비광 녀석이랑 희수도 입원 중이고.”
“시켜만 주십시오! 제가 다 잡아오겠습니다!”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내 집이 날아가서 라는 이유는 굳이 덧붙이지 않았다.
지금은 열심히 일하는 직원 포지션으로 충분했다.
“일단 앉지.”
방으로 들어온 강태황이 의자를 권하고 차 한 잔을 내줬다.
매일 네 명이서 만나던 장소인데 둘만 있으니 약간 허전한 느낌이었다.
“지금까지 조사한 자료들이야.”
강태황이 건네준 문서를 꼼꼼히 읽어보았다.
이미 죄가 밝혀진 각 기업의 계좌와 동향을 조사한 것이었다.
문서를 살피다 한 부분을 발견하고 고개를 들었다.
“사라진 사람이 많네요.”
“그게 좀 이상한 부분이야.”
턱을 몇 번인가 문지른 강태황이 눈을 가늘게 떴다.
“거기 적힌 자들은 각 기업의 임원들이거든. 무언가 알만한 위치에 있는 자들이지. 그런데 우리가 찾으려고 하니 다 사라져있더군.”
“데몬한테 죽은 걸까요?”
“그건 아직 확실하지 않아. 시체가 발견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개인적으론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네. 누구보다 더 안전한 곳에 몸을 숨겼을 거라 데몬한테 죽었을 거 같진 않거든. 다만, 그렇다고 살아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아.”
약간 의아한 표정을 짓자 강태황이 한 이름을 가리켰다.
우상의 회장이라 알려진 남자였다.
“데몬이 쳐들어오기 전에 비광이 잡아온 녀석이야.”
“회장이면 많은 걸 알고 있겠는데요.”
“그렇지. 그런데 대답할 수 없게 됐어. 어젯밤 죽었거든.”
나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강태황이 괜히 사람을 가리며 조사를 맡기는 게 아니었다.
비광이 잡아왔다면 분명 헌터청에 수감되어 있었을 터.
그럼에도 죽었다는 얘기였다.
“그리고 그날 당직을 섰던 헌터도 실종됐어. 우리가 데몬과 싸우는 사이 CCTV까지 전부 정리하고 사라졌더군.”
“꼬리 끊기군요.”
“맞아. 누군진 몰라도 정보를 줄 만한 인원들을 없애고 있어. 기업 총수들도 마찬가지고.”
시선을 내려 리스트에 든 기업들을 훑어봤다.
흔적을 지우고 있다는 건 한 가지를 의미했다.
“여기에 없는 기업이 하나 혹은 여러 개 있다는 얘기겠네요.”
이미 올라가 있다면 헌터청까지 손을 뻗어 굳이 증인을 제거할 필요는 없었다.
“맞아. 대놓고 데몬을 도왔던 기업들을 제외하고, 아주 조심성 많은 놈이 하나 이상 있는 거지. 데몬이 패배할 것까지 고려한 녀석이 말이야.”
“아주 뱀 같은 자식이네요.”
책상을 두드리며 여러 기업의 이름이 정리된 리스트를 훑어보았다.
헌터청에서 앞으로 조사할 기업을 뽑아놓은 자료였다.
“일단 자료를 정부 쪽에도 넘겨주긴 했지만 그쪽에선 난색을 표하더군. 찾아야 한다는 의견은 같지만 대기업들의 영향력을 무시할 순 없으니까. 최대한 조용히 처리하길 원하다 보니 청와대 직속 몇 명만 지원이 가능하다고 하더군. 아 그리고 이건 자네 집 근처에서 침몰한 배라네.”
강태황이 자료 하나를 더 건네왔다.
데몬이 나타나기 전 실종된 군의 배에 탑승했던 인원은 전부 사망한 상태였다.
“시체가 오래 방치됐던 터라 상세한 확인은 힘들지만 묘한 상처들을 발견했어.”
그 부분으로 눈을 옮겼다.
대부분의 시체는 거친 이빨이나 외부적인 압력에 의해 생겼지만, 몇몇 시체는 달랐다.
예리한 무언가로 잘게 절단된 듯한 모양새였다.
“지난번 서울에 왔던 데몬처럼 검을 쓰는 케이스도 있겠지만, 이번에는 딱히 보고된 게 없었어.”
로튼과 함께 왔던 칼잡이 데몬 칸을 떠올렸다.
칸이라면 충분히 이런 상처를 만들어 낼 수 있겠지만, 그때 확실히 땅으로 박아 넣었으니 아니었다.
그 이후론 딱히 무기를 잘 다루는 놈을 본 적이 없을 정도로 데몬이 무기를 사용하는 건 흔한 케이스가 아니었고 말이다.
“그럼 제가 인천 부근부터 가볼게요. 어차피 집 근처기도 하니까요.”
고개를 끄덕이는 강태황에 자료를 챙겨 몸을 일으켰다.
더 지체할 것 없이 바로 출발할 생각이었다.
“거기서부터 한 번 쫓아보겠습니다.”
날 올려다보는 강태황에게 빙긋 미소를 그려 보였다.
* * *
하루 만에 돌아왔구만.
인천 바다를 바라보며 준비 운동을 했다.
배가 가라앉아 있던 곳은 굴업리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쿵푸 듀공 배로로족이 있는 만큼 무언가 알고 있을까 싶어 들려보려는 중이었다.
야자수 수영복으로 갈아입은 뒤 입고 왔던 옷들을 방수 가방에 챙겨 넣었다.
“가볼까.”
딱 봐도 추워 보이는 바다로 몸을 날렸다.
배를 좀 얻어타고 갈까도 싶었지만 현무와 이순신 장군님이 계신 굴업리는 최대한 공개하고 싶지 않았기에.
시원하게 몸도 담글 겸 수영을 선택한 것이었다.
더럽게 춥네.
팔을 휘저으며 앞으로 쭉쭉 나아갔다.
아일랜드에서 만난 얼음쟁이의 한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추위였으나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돌아온 지 얼마 안 됐음에도 내 몸은 어느새 한국 기온에 맞춰져 있었다.
굴업리는 괜찮으려나.
헤엄치는 와중에도 약간 걱정이 됐다.
현무가 있고 함께 사는 쿵푸 듀공들도 한 무력하는 만큼 괜찮겠지 라고 생각하곤 있지만.
이번엔 워낙 대규모로 데몬이 몰려왔다 보니 혹시나 다친 쿵듀들이 많은 건 아닐까 싶어서였다.
얼른 가보자.
호흡을 최소한으로 하며 헤엄치길 한참.
보이기 시작한 굴업리에 바다 아래로 깊게 잠수했다.
당장 외관으로 보이는 건 멀쩡했다.
오?
입구가 보이기 시작했을 때쯤.
걱정을 가시게 하는 익숙한 광경이 눈으로 들어왔다.
오동통한 듀린이들의 궁댕이.
오늘도 입구 물가에 모여 헤엄을 치는 중인 듯했다.
다행이네.
미소를 머금은 채 빠른 속도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푸우우우우우…!!
코로 호흡을 뱉어내며 고개를 내밀자.
“듀아아아아아악!!”
“갸아아아아악!”
사방에서 반가운 비명이 들려왔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저 멀리까지 튕겨 나간 듀린이들.
그 중엔 골목대장 모랑도 포함되어 있었다.
“시, 심장이 멈췄슴다!”
“오바할래. 심장 멈추면 죽어. 이리 와봐.”
심장을 쓸어내리는 모랑을 데리고 물을 나섰다.
일단 듀린이들은 다친 곳 없이 멀쩡해 보였다.
“다들 괜찮아?”
“넵! 데몬들한테 목적지가 있었던 건지 굴업리는 다 지나쳐 갔슴돠! 그래도 꽤 오긴 했지만 현무님이 쇽샥 처리해주셨슴다!”
“다행이구만.”
“사실 더 왔어도 문제 없었슴돠!”
듀린이 모랑이 오동통한 주먹을 번갈아가며 뻗어댔다.
“쿵푸 듀공 배로로족의 주먹에 걸리면 데몬이라도 여지없으니까 말임돠!”
원래라면 믿지 않았겠으나 지난번 말랑 할아버지의 필살 정권을 봤던 터라 어느 정도 신뢰가 가는 말이었다.
“여기 앉아봐.”
적당한 곳에 앉아 가지고 온 문서들을 펼쳐 모랑에게 보여주었다.
근처 바다에서 침몰한 배들이었다.
“혹시 이거 관련해서 본 거 없어? 데몬이 우르르 쳐들어왔을 때보단 조금 전일 거야.”
“으음.”
턱을 몇 번 슥슥 문지르던 모랑이 멀뚱멀뚱 서 있는 듀린이 쪽으로 손을 흔들었다.
이내 달려온 몇 명의 듀린이가 차렷 자세로 쭉 늘어섰다.
“너네 이거 봤다고 했었지?”
“응! 근처 바다에서 놀고 있었는데 큰소리가 나더니 배가 침몰했어!”
당시엔 데몬이 많아 다가가지 못했다는 듀린이들.
어느 정도 잠잠해진 후에 혹시나 산 사람이 있으면 구하려고 어른 듀공들과 가봤었다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다 죽어있었어.”
고개를 푹 숙인 듀린이가 잔뜩 풀이 죽은 얼굴로 말했다.
사진으로 봐도 처참한 광경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딱히 더 건질만한 건 없겠구만.
괜히 안 좋은 기억만 되살린 건가 싶어 듀린이들의 어깨를 몇 번 두드려주었다.
아무래도 사고가 난 곳으로 직접 가봐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잠시 토닥이고 일어나려는 찰나.
“딸랑….”
이야기를 해줬던 듀린이가 입으로 소리를 냈다.
“…?”
의아한 표정으로 보자 몇 번인가 더 소리를 내는 듀린이.
무언가 방울이 흔들릴 때 들릴 법한 소리였다.
“조금 멀긴 했는데 방울 소리가 났었어! 아마 배 쪽에서 들렸던 거 같아!”
데몬 때문에 가까이 가진 못했으나 도망치지 않고 멀리서 고개를 내밀어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무언가 촤라락! 펼쳐지면서 배를 덮었어!”
“펼쳐졌다?”
“응! 여러 갈래로 뿌려졌는데 달빛에 비쳐서 반짝반짝 빛이 났어! 엄청 긴 실 같았어!”
실이라.
달빛에 반사됐다는 걸 보면 단순한 실은 아닐 터였다.
낚싯줄이나 피아노의 현 혹은 특수한 소재로 만든 것일 가능성이 높았다.
잠깐.
일어나려던 걸 멈추고 다시 서류를 펼쳐보았다.
한참 서류를 넘기다 한 부분에서 손을 멈추었다.
인양한 배에 남은 흔적을 여러 각도로 찍어 기록한 자료였다.
비슷한데.
다른 걸 기록하기 위해 찍힌 사진이었으나.
근처 기둥에 여러 겹으로 긁힌 듯한 흔적이 있었다.
손톱자국이라 하기엔 너무 가늘었고, 원래 있던 기스라고 하기엔 부자연스러운 형태였다.
듀린이가 말했던 대로 날카로운 현이 나부끼면 만들어질 법한 모양이었다.
배에 이런 흔적을 남길 정도의 힘이라면.
아까 봤던 사체를 떠올렸다.
날카로운 걸로 자른 것처럼 깨끗했던 절단면.
이거라면 가능할 것 같았다.
“잘했어. 듀린이들.”
모랑부터 다른 듀린이까지 모두 머리를 쓰담쓰담 해주고 가져온 디저트까지 챙겨 준 뒤 몸을 일으켰다.
한국엔 수많은 기업이 존재했지만 은근 바닥이 좁은 편이었다.
이런 특이한 무기를 사용하는 자가 있다면 분명 한 번쯤은 입에 오르내렸을 터였다.
“이 자식부터 시작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