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3화. 마주치다
“비가 왜 이렇게 많이 와.”
나오자마자 하늘이 불안하긴 했었다.
오늘 중에 한 번 쏟아지겠네 라고 생각은 했는데 그게 지금일 줄은.
덕분에 물에 빠진 생쥐 꼴처럼 폭삭 젖어버리고 말았다.
남는 옷 없는지 물어봐야겠다.
대충 물기를 털어내고 대산 건물로 들어섰다.
어제 듀린이들에게 들었던 걸 토대로 범인을 특정해보기 위해서였다.
잘못 짚은 건가.
앓는 소리를 내며 걸음을 옮겼다.
대산으로 오기 전 강태황에게 전화를 걸어 현 관련해서 생각나는 놈이 있는지 물었었다.
오랫동안 현역에 몸 닮았던 만큼 오며 가며 본 적이 있을까 싶어서였다.
- 현이라… 한 번 알아보겠네.
결과는 허탕이었다.
강태황은 물론 헌터청에 있는 사람들도 고개를 내저었기 때문이다.
흔한 무기가 아니다 보니 사용하는 자가 있다면 눈에 확 띄었을 터.
엄한 곳 짚고 있는 건 아닌지 약간 걱정되는 순간이었다.
대산은 부디…!
일전에 소피아가 말해준 적이 있었다.
기업은 서로 상생하면서도 동시에 경쟁하는 관계라 상대 기업에 관해 최대한 많은 정보를 수집하는 게 보통이라고 말이다.
그곳엔 기업에 속한 인물의 정보도 포함이었기에 희망을 걸어볼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백운 님!”
몇 걸음이나 걸었을까.
저 멀리서 찹쌀떡 전수희가 손을 흔들며 달려왔다.
댕댕이 같… 찰싹!
나도 모르게 든 생각에 마음속으로 뺨을 올려쳤다.
그 사이 전수희는 바로 앞까지 달려와 날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 백운 님 무슨 일 있으신 건 아니죠?”
“어휴 무슨 일이라뇨. 오다가 엄청난 소나기에 맞은 거 말곤 없어요.”
잔뜩 놀란 눈을 보니 꼴이 난장판이긴 한 모양이었다.
“뭔가 신기하네요.”
“넵?”
눈동자를 약간 흔들며 전수희가 말을 이었다.
“백운 님도 비를 맞으시는군요.”
“그, 그럼요. 제가 무슨 신도 아니고 비를 무슨 수로 안 맞겠어요.”
전수희가 걸어가며 그건 그렇죠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백운 님이라면 쇽샥! 하면서 다 피하실 거 같아서요.”
“내리는 대로 쇽샥 다 처맞고 왔습니다.”
“올라가서 샤워실 먼저 다녀오시죠! 거기에 남는 옷도 있을 거예요!”
엄지를 치켜세우는 전수희에 나도 따봉을 날려주었다.
샤워한 지 한 시간도 안 지난 터라 약간 귀찮긴 했지만, 이 찝찝한 꼴로 소피아를 만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전수희를 따라 프라이빗 엘리베이터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마침 1층으로 내려오고 있는 엘리베이터.
잠깐 난 짬에 망설이던 전수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집은… 어떻게 되셨어요?”
“운명하셨습니다.”
너무 아무렇지 않게 말해서일까.
순간이지만 전수희가 얼굴이 약간 일그러졌다.
입술을 깨물며 웃음 참기를 시전하는 모습이었다.
“죄송해요. 뭔가 반응이 너무 남의 집처럼 말씀하셔서.”
“거의 남의 집처럼 방치해두긴 했었는데 막상 없어지니 좀 슬프더라고요.”
“지낼 곳 없으시면 일단 대산 숙소로 오세요! 어, 왔네요!”
오늘따라 더 에너지 넘쳐 보이는 전수희.
전수희가 산책을 나와 신이 난 댕댕이처럼 도착한 엘리베이터로 발을 뻗었다.
“어 수희 님! 안에 사람….”
문 너머로 여럿이 타고 있는 게 느껴져 말을 건넸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전수희의 몸이 한 발자국 먼저 엘리베이터 안으로 쏘옥 들어 가버리고, 이제 안에 있는 사람이랑 최소한 스치겠구나 싶은 순간.
둔탁한 소리와 함께 들어가던 전수희가 도로 튕겨 나왔다.
“아!”
외마디 비명과 함께 날아온 전수희를 받아냈다.
전수희는 왼쪽 어깨에 손을 올리고 작게 신음하고 있었다.
“…?”
벙찌는 상황에 고개를 들어 엘리베이터 안을 바라봤다.
안쪽을 안 살피고 들어간 건 전수희 잘못이지만 그렇다고 사람을 이렇게 밀쳐내다니 뭐 하는 인간인가 싶었다.
안쪽엔 방금 느꼈던 대로 열댓 명의 사람이 서 있었다.
모두가 새카만 정장 차림이었다.
화라도 난 건지 하나같이 험상궂은 표정들.
그중 손을 뻗은 놈을 쳐다봤다.
자다 나왔나.
부스스한 머리와 반쯤 감긴 눈을 가진 남자였다.
잠이라도 자다 온 건지 만사가 귀찮다는 얼굴로 나와 전수희를 내려다보고 있는 남자.
방문 목걸이를 가진 걸로 봐선 대산의 손님인 모양이었다.
뒤에 전화 중인 남자를 둘러싼 모양새.
앞에 놈들은 대충 경호원 쯤 되는 듯했다.
“뭐야. 직원이었나.”
어깨를 으쓱인 남자가 웃음을 흘렸다.
“허.”
뜻밖의 반응에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사람이 못 일어날 정도로 쳐놓고 보일 반응이 아니었다.
“허…? 왜? 어이가 없나?”
이 새끼 봐라.
전수희를 부축한 채로 몸을 일으켰다.
처음 본 사인데도 남자는 당연하다는 듯이 반말을 툭툭 내뱉고 있었다.
“어이가 없지. 사람을 그렇게 쳐놓고 반말을 해대는데 어떻게 어이가 있겠어.”
고통이 큰지 전수희는 말도 못 하고 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다.
이런 전수희를 보고 있자니 마음 같아선 쌍욕부터 박고 싶었지만, 대산의 손님인 만큼 최대한 예의를 갖춰 말을 건넸다.
“누가 보면 무기 들고 달려든 줄 알겠네. 평소에도 겁이 많은 편인가?”
전수희가 뭔가를 들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싸움과는 거리가 먼 것도 당연하거니와 그저 엘리베이터로 한 발 먼저 뻗었을 뿐이었다.
“여자 앞이라고 센 척하고 싶은 마음은 알겠는데 말이야.”
남자가 중얼거리자 옆에 있는 녀석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곧이어 내 어깨로 손을 올린 남자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상대가 누군지 봐가면서 하는 게 좋을 거야. 여기가 회사 건물 안이란 걸 다행으로 여기라고. 덕분에 센 척했다고 목숨이 달아나거나 하진 않았으니까.”
“언제 한 번 밖에서 만나고 싶네. 그럼 어느 쪽이 다행인지 알 수 있을 테니까.”
말을 건네며 어깨로 손을 올렸다.
함부로 올린 손을 약간 응징해 줄 생각이었다.
“다음부턴 아무데나 손 올리고 그러지 마.”
“뭐?”
“손모가지 날아가니까.”
남자의 손목을 붙잡은 손에 힘을 주려는 순간.
“그만! 그만!”
전화를 끝낸 남자가 박수를 치며 앞으로 나섰다.
사람 좋은 미소를 띠며 날 바라보는 남자.
“대산에 인사드리러 온 자리에서 싸움이 나서 되겠습니까? 여기까지만 하시죠. 전 유지열이라고 합니다.”
이름을 밝힌 유지열이 내 어깨에 올려진 남자의 손을 직접 치워냈다.
“이런. 여자분이 말도 못 할 정도로 많이 아프신가 보네요.”
나와 전수희를 번갈아 보던 유지열이 품에서 카드 한 장을 꺼냈다.
“어디 큰 병원이라도 가서 좋은 치료 좀 받으시죠. 비용은 제가 부담할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요.”
내 옷 주머니에 카드를 쑤셔 넣은 유지열이 두 손으로 내 어깨를 감싸 쥐었다.
“전 기업 천일의 회장입니다. 제 일분일초는 무척 비싸서요. 이쯤에서 마무리 하시죠. 그럼.”
재수 없게 웃어 보인 유지열이 나와 전수희를 지나쳐 걸어갔다.
그 뒤를 따라 우루루 몰려가는 검은 정장의 남자들.
이놈이나 저놈이나.
고개를 돌려 다시 한번 입을 열려는 순간.
“배, 백운 님. 저 괜찮아요.”
전수희가 애써 미소를 지으며 내 옷깃을 잡아끌었다.
전수희는 몸을 떨며 식은땀을 흘려대고 있었다.
일단 위로 데려가야 할 것 같았다.
뭔가 더 하기에도 괜히 전수희가 곤란해질 수도 있었다.
“그럼 딱 한 마디만 더 할게요.”
낮은 목소리로 전수희에게 말하고 품에 있던 유지열의 카드를 꺼낸 뒤.
쐐에에에에엑!
다트를 던지듯 유지열을 향해 카드를 날렸다.
정장 차림의 남자들 사이로 날아가 유지열의 머리 옆으로 꽂히는 황금색 카드.
“!?”
가장 먼저 유지열이 놀라는가 싶더니 주변에 있던 남자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처음엔 어리둥절 해하더니 이내 상황을 파악한 건지 인상을 구기는 인원들.
그런 녀석들을 향해 미소를 그리며 입을 열었다.
“경호원이면 이런 거나 잘 막아. 엄한 사람 치지 말고.”
“이 새끼가!!”
“그만.”
일제히 달려들려는 남자들에 유지열의 목소리가 낮게 울려 퍼졌다.
여유 넘치던 조금 전과는 달랐다.
여전히 웃고 있었으나 얼굴이 약간 상기된 게 분노를 꾹꾹 누르는 모습이었다.
“이거 참.”
벽에 꽂힌 카드를 빼낸 유지열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없는 것들의 발버둥은 언제 봐도 불쾌하다니까요. 밟아 죽여버리고 싶게요. 아 물론 그쪽이 그렇다는 건 아닙니다. 그냥 그렇다는 거죠.”
고개를 끄덕이며 빙긋 미소를 그려 보였다.
“거 참 싸가지 없는 새끼네.”
“!!!”
“아, 그쪽 말고 뒤에 부스스한 새끼 말하는 거예요. 오해하지 마세요.”
조용히 날 바라보며 몇 번인가 심호흡하는 유지열.
“이건 기억해두죠.”
마지막 말을 남긴 유지열이 빙글 몸을 돌리며 걸음을 옮겼다.
“너… 잊지 않으마.”
부스스 자식도 한 마디 더 거들더니 유지열을 따라나섰다.
으 재수 없어. 올라가서 소금 뿌려야겠네.
멀어지는 놈들에 마음속으로 침을 한 번 뱉은 후.
전수희를 데리고 엘리베이터로 걸음을 옮겼다.
* * *
“이런 개자식이….”
차에 올라탄 유지열이 입술을 깨물었다.
조금 전 일을 떠올리니 화가 치밀어 미칠 것 같았다.
“이젠 별의별 새끼가 다…!”
앞에 있던 술병을 깬 유지열이 한숨을 내쉬었다.
화가 나다 못해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지만 이건 너무 심했다.
천일의 후계자로 태어나 저딴 놈들과는 다른 세상에서 살아온 유지열이었다.
그런데 저딴 반응을 보고도 참아야 하는 현재 상황이 원망스러울 따름이었다.
“하아.”
유지열이 고개를 뒤로 젖히며 눈을 감았다.
지금은 몸을 사려야 할 때였다.
공식적인 수사는 종결됐지만 분명 헌터청에서 며칠 전 침공에 가담한 기업을 추가로 찾기 위해 움직이고 있을 터였다.
‘뭐 하는 새낀지는 몰라도 두고 보자.’
유지열이 입술을 깨물었다.
어차피 아무런 증거도 가지지 못한 헌터청은 천일을 잡아낼 수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 안정이 될 테니 그땐 제대로 되갚아 줄 생각이었다.
“김신 본부장. 저거 뭐 하는 새낀지 알아봐요. 나중에 다시 한번 봐야겠으니까.”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의자로 몸을 파묻는 김신.
김신이 유지열 모르게 오른쪽 소매를 거둬 올렸다.
‘….’
손목에 선명하게 남은 손자국에 김신이 미간을 찌푸렸다.
엘리베이터의 남자가 손목을 붙잡은 아주 찰나의 순간 김신의 본능은 위험을 경고했었다.
하마터면 대산의 건물 내부에서 무기를 꺼내 들 뻔했다.
거기다 정확히 자신들을 지나 유지열의 얼굴 옆에 꽂힌 카드까지.
하나부터 열까지 이해 안 되는 것 투성이었다.
그 자리에선 유지열과 부하들이 있어 내색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으득!
욱신거리는 손목을 잡은 채 김신이 어금니를 깨물었다.
머릿속엔 아까 봤던 남자의 얼굴이 떠올려져 있었다.
‘뭐 하는 새끼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