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9화. 결정
‘똑같은 놈이었던 건가.’
김신이 백운을 바라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생각지도 못했다.
대산에서 잠깐 만난 놈이 골목에서 그런 습격을 해왔을 줄은.
그것도 모자라 일부러 여기까지 잡혀오는 자신감마저 내보이다니.
“용기가 가상하다고 해야 할지. 무모하다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군.”
김신을 앞에 두고도 전혀 움츠러든 기색이 없는 백운.
아마 용기에 더 가까울 거라고 김신은 생각했다.
김신이 방을 나서고 일 분도 채 안 된 시간에 저 인원을 다 정리한 백운이었다.
자신의 실력에 스스로 엄청난 자부심을 갖고 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백운 스스로의 판단이었다.
“어느 쪽인 거 같은데?”
물어오는 백운에 김신이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보기엔 무모에 가깝군. 난 너 같은 놈들을 자주 봐왔거든. 지금까지 한 번도 안 졌다고 해서 앞으로도 안 질 거라고 생각하는 부류를 말이야.”
“오?”
“패배를 아는 놈은 강자 앞에서 도망치는 선택을 한다. 누군가는 겁쟁이라 부르겠지만 그게 현명한 선택이지. 못 이기는 상대에게 들이박아서 남는 건 죽음뿐이니까.”
“뭐 패배자 전문가 같은 소리를 하네. 더럽게 많이 지고 다녔나 보다 너.”
너스레를 떤 백운이 잡고 있던 이두석을 김신 옆으로 내팽개쳤다.
희미하게 호흡하며 김신을 올려다보는 이두석.
이두석이 안간힘을 쓰며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보, 본부장님. 저 녀석 보통이….”
으득!
말이 채 끝나기도 전.
김신의 발이 이두석의 목을 분질렀다.
기다리던 놈과 만난 순간이었다.
패배한 개의 불필요한 말로 이 순간이 시끄러워지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백운을 응시하던 김신이 입을 열었다.
“골목에서 날 습격했던 건 증거를 찾기 위해서였겠고…. 그렇다는 건 인천 바다에서 일어난 사건을 조사 중이구나.”
김신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쩐지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죽일 것도 아닌데 골목에서 그런 접근이라니.
현을 끝까지 내보이진 않았어도 백운의 생각에 제대로 놀아나 버리고 말았다.
“거기까진 똑똑했던 거 같은데.”
김신이 품속으로 손을 넣었다.
곧이어 골목에 울려 퍼졌던 방울 소리가 새어 나왔다.
고즈넉한 신사의 풍경에서나 들릴 법한 청명한 소리였다.
“마무리가 아쉽구나. 군대라도 끌고 왔어야지. 그걸 조사 중이었다면 시체를 봐서 알고 있겠지. 곱게는 못 죽을 거라는 거.”
손에 들린 방울에서 현이 뿜어지기 시작하고.
김신의 입가로 미소가 그려졌다.
“5분 안에 끝내주마.”
* * *
“유빈 님. 장소가 좀 그렇긴 한데 여기 계시는 게 안전할 거 같아요. 얘네는 못 일어날 거니까 걱정 마시고요.”
“네…!”
말을 마치고 곧장 김신에게 달려들었다.
주로 고문이나 심문에 사용되는 듯한 방.
그래서인지 방음은 물론 방 자체도 튼튼하게 지어져 있었다.
“나가서 하자고!”
문 앞에 있던 김신에게 다리를 뻗었다.
콰앙!
가드한 김신이 문 너머로 날아갔다.
발바닥으로 느껴졌던 단단한 감촉.
순간 현으로 팔을 감싸 막아낸 모양이었다.
단단하네.
어떻게 줄로 사람을 조각냈나 궁금했었는데 피아노 줄과는 비교도 안 되는 강도의 현이었다.
직접 부딪혀보니 배에 그런 긁힌 자국이 남았던 것도 충분히 설명이 될 것 같았다.
“걱정하지 마라. 여자는 네놈을 조각낸 후에 천천히 죽여 줄 테니까.”
“거참 말 더럽게 흉악스럽네.”
그나마 다행이라면 눈깔이 돈 김신은 송유빈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다.
날 조각내기 전에는 옆에 데몬이 나타나도 신경쓰지 않을 듯했다.
날아가는 김신을 쫓아 달리길 잠시.
눈앞으로 몇 가닥의 현이 뿜어졌다.
몸을 숙이며 옆의 벽을 따라 달렸다.
“신체 관련된 개방자구나!”
다시 한번 현이 눈앞으로 날아들었다.
이건 조금 조심해야 할 것 같았다.
엄청난 강도에 비해 말도 안 되게 가늘어 집중해서 보지 않으면 쉽게 놓칠 정도였다.
얼른 끝내자.
현을 피해내며 공중에 뜬 김신을 바라봤다.
마음 같아선 천천히 차이를 일깨워주며 제대로 찍어 눌러 주고 싶었지만.
뒤에 송유빈이 있는 만큼 질질 끌지 않을 생각이었다.
언제 또 엄한 놈들이 튀어나올지 몰랐고 말이다.
“고작 빠르게 움직이는 거 뿐이라면!”
김신이 더 많은 가닥의 현을 뿜어냈다.
여러 갈래로 교차하며 서서히 하늘을 뒤덮는 현.
촘촘하게 모여 아주 작은 틈조차 보이지 않았다.
“쪼개져 버려라!”
그물 모양으로 펼쳐진 현이 내게 덮쳐왔다.
[유탈라스 - 동기화]
현의 그물이 내게 덮어진 순간.
비늘로 몸을 감쌌다.
김신의 현이 날 제외한 주변을 모조리 박살내며 내려앉았다.
자유자재로 형태를 조종할 수 있어서인지 범위도 보통이 아니었다.
부서진 건물의 자욱한 먼지가 시야를 가렸다.
끝났다고 생각한 건지 김신은 추가로 공격해오지 않고 있었다.
[쿠훌린 - 게이볼그]
내가 가진 무기 중 가장 조용하고 빠르게 상대를 끝장낼 수 있는 게이볼그.
먼지 속에서 김신이 있는 방향으로 핏빛의 창을 겨누었다.
그리고 먼지가 채 걷히기도 전.
[심장을 꿰뚫는 창]
김신의 심장을 향해 창을 쏘아냈다.
스아아아악----!
바람을 가르며 순식간에 김신에게 날아든 창.
“…!”
먼지를 헤치고 나간 곳에 김신의 심장은 없었다.
창에 꿰뚫린 건 심장이 아닌 팔의 일부분.
엉뚱한 방향으로 창을 내지른 건 아니었다.
찰나의 순간이지만 김신이 창이 도착할 장소와 타이밍을 정확히 알고 회피한 것이었다.
“크으…!”
인상을 찌푸린 김신이 뒤로 물러나며 거리를 벌렸다.
팔 하나를 완전히 날리진 못했으나 상관없었다.
꽤 깊숙이 찔러 넣은 덕에 왼팔의 반 정도가 너덜거리고 있었다.
쯧. 역시 예지 쪽인가.
골목에서 김신이 보여준 반응으로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긴 했었다.
일단은 계산 쪽에 비중을 두고 시야가 가려진 먼지 속에서 창을 내지른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해낸 걸 보면 김신의 능력은 시야에 의존적이지 않았다.
그저 무조건적으로 짧게는 일 초, 길게는 이 초 정도의 미래를 볼 수 있는 게 분명했다.
아마 더 길었다면 완전히 피해냈을 터였다.
“너 이 새끼….”
서서히 사라지는 게이볼그에 김신의 얼굴로 놀라움이 번졌다.
골목에서 만난 게 나란 걸 알았을 때도 놀랐지만, 그때와는 다른 놀라움이었다.
“무기왕…!”
“딩동댕.”
귀신이라도 본 듯한 김신의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지난번 대산 침공에 나타나 소피아를 지킨 건 우연이 아니었구나.”
“우연이겠냐.”
상의를 뜯은 김신이 왼팔을 감싸 피를 막았다.
많이 놀라긴 했지만 겁에 질리거나 전의를 상실한 거 같진 않았다.
“얌전히 죽어줬으면 좋겠는데 그럴 생각은 없어 보이네.”
“하…? 좀 놀란 건 인정한다만 시건방진 소리를 하는구나.”
팔을 동여맨 김신이 품에서 새로운 방울을 꺼내 들었다.
아까 꺼냈던 방울과 달리 검은색으로 칠해진 녀석이었다.
“네가 괴물처럼 강하다는 건 알지만, 네놈은 네 생각보다 훨씬 많이 노출됐었다. 그만큼 능력도 많이 분석 당했지.”
몇 번인가 숨을 고른 김신이 말을 이었다.
“낮이라서 날개는 못 꺼낼 거고. 조금 전 내 기술에 상처 하나 없는 걸 보면 그 푸른색 비늘도 사용한 거겠지. 내 팔을 날린 창도 당장은 못 꺼낼 테고. 범위가 넓은 불꽃은 같은 건물에 갇힌 송유빈 때문에 못 꺼낼 테고. 안 그런가?”
“스토커 새끼냐. 소름 돋게 줄줄이 읊어대고.”
일단 욕을 박고 보긴 했지만 놈이 한 말 중에 틀린 건 없었다.
라의 문양은 불꽃이 닿지 않아도 열기가 전해지는 범위가 엄청났다.
정체를 들키고 말고를 떠나 일반인의 몸인 송유빈은 버티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거 알아서 뭐하게? 어차피 넌 나 못 이기는…!?”
느껴지는 기운에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 무너진 천장 너머로 보이는 하늘.
하늘 위로 정체불명의 포신이 만들어졌다.
포신은 정확히 송유빈이 갇힌 방 쪽을 노리고 있었다.
“네 여자친구는 여기까지인 듯하군. 뒤가 구린 놈들은 너보다 송유빈을 더 싫어하는 거 같으니까.”
하늘 한 면은 가득 채운 수백 개의 포신.
잠시 후 포신에서 일제히 불이 뿜어지고 수백 발의 포탄이 방으로 쏘아졌다.
[도윤 - 비전 수리검]
무언가를 생각하고 판단하고 있을 여유 따윈 없었다.
김신을 뒤로하고 곧장 수리검을 방 쪽으로 던져냈다.
수리검이 방문에 도달하는 찰나 비전으로 몸을 옮기며 발을 뻗었다.
“백운 님?”
문을 박차고 들어가자 깜짝 놀란 송유빈의 얼굴이 보였다.
그런 송유빈을 곧바로 안아 방을 빠져나왔지만 쏘아진 포탄이 이미 하늘을 가득 뒤덮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로 촘촘하게 엮어져 내려오는 김신의 검은 현까지.
처음 사용했던 현보다 훨씬 강도가 높아 보였다.
수리검을 다시 꺼내 저 틈을 뚫어내는 건 힘들 것 같았다.
“어…!”
하늘에서 다가오는 죽음에 송유빈이 외마디 비명을 터뜨렸다.
그런 나와 송유빈을 느긋하게 쳐다보고 있는 김신과 청와대 요원들.
아마 저 포탄들은 요원들의 능력인 모양이었다.
고개를 내려 얼굴이 허옇게 질린 송유빈을 바라봤다.
여기까진가.
리볼버를 얻었던 개미굴부터 지금까지.
묘하게 얽히고설키는 과정에서도 어찌저찌 송유빈의 절대 기억력을 피해 정체를 잘 숨겨왔었다.
여기서 정체나 숨기자고 송유빈의 목숨을 담보로 위험을 감수할 순 없었다.
“유빈 님. 말씀드릴 게 있는데요.”
충격 완화를 위해 먼저 입을 열었다.
“네, 네…?!”
송유빈이 동그랗게 뜬 눈으로 날 올려다봤다.
지금 다 죽게 생겼는데 무슨 말을 하려는 거냐는 얼굴이었다.
“제가 무기왕이에요.”
“네…?”
약간 멍해진 송유빈을 뒤로하고.
[아이작 뉴턴 - 데모닉]
어스름한 빛을 띠는 건틀릿을 소환했다.
수십 갈래의 회로에 빛이 돌며 힘을 뿜어낼 준비를 마친 데모닉.
데모닉으로 땅을 짚자 수천 줄기의 스파크가 떨어지는 포탄과 청와대 요원들에게 연결됐다.
포탄과 현이 머리 바로 위에까지 도달한 찰나의 순간.
[그라비티 디바이스]
나와 송유빈을 제외한 존재들의 중력을 없앴다.
그리고 정적이 찾아왔다.
떨어지는 걸 멈추고 우뚝 멈춰서는 포탄과 김신의 현.
순간이지만 세상이 완전히 멈춰버린 듯했다.
“뭐, 뭐야 이건!”
“다시 능력을…!?”
포탄과 현의 중력은 없앤 채로.
청와대 요원과 김신에게 이겨낼 수 없는 중력을 선물했다.
굉음과 함께 요원들이 땅에 처박히고.
“끄아아아아악!”
“끄…끄으으으으!”
끔찍한 비명을 지르는 걸 마지막으로.
우두둑!
괴기한 소리가 들리며 요원들의 숨이 끊어졌다.
“크으으…!”
건물 사방으로 어떻게든 현을 걸쳐 중력에 필사적으로 저항한 김신만이 숨이 붙어 있을 뿐이었다.
[도윤 - 비전 수리검]
수리검으로 포탄과 현의 범위에서 벗어나며 중력 제어를 해제했다.
요란한 굉음이 남산을 가득 채우며 수백 발의 포탄에서 폭발이 솟구쳤다.
귀가 먹먹해지는 소란 속.
내게 안겨 멍하니 올려다보던 송유빈이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백운 님이…. 무기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