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0화. 격차
폭삭 주저앉은 건물의 중앙.
송유빈은 머엉한 것이 반쯤 정신이 가출한 듯한 얼굴이었다.
방금 죽을 뻔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보다 내가 무기왕이란 사실에 더 충격받은 것 같았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판단이 안 서 일단 미소를 그리고 있을 때.
멀지 않은 곳에서 헬기 소리가 들려왔다.
또 천일에서 몰려온 건가 싶어 고개를 들자 익숙한 마크가 눈에 들어왔다.
대한민국 헌터청의 마크.
“어?”
헬기는 착륙하지 않았다.
대신 헬기에서 누군가 뛰어내렸다.
낙하산을 펼치고 말고 할 수 있는 높이도 아니었다.
쿵 소리를 내며 착지한 누군가.
먼지가 좀 지워지자 옷을 털어내며 기태랑이 모습을 드러냈다.
“태랑 님!?”
“오랜만에 보네.”
손을 흔들며 다가오던 기태랑이 걸음을 멈췄다.
안겨있는 송유빈과 마스크 없이 민얼굴을 깐 날 번갈아 보는 기태랑.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건 대체 무슨 상황인지 의아해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됐습니다. 유빈 님. 혹시 일어날 수 있나요?”
“아… 네!”
그제야 정신이 든 건지 송유빈이 깜짝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지금까지 내게 안겨있었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장관님이 천일이 보유한 부동산을 좀 돌아보라고 했거든. 그래서 가까운 남산으로 온 건데 제대로 찾아온 모양이네.”
기태랑이 작은 한숨을 내쉬며 주변을 돌아봤다.
이젠 더 이상 부동산이라고 부를만한 게 남아있지 않은 상태.
대신 한쪽엔 온몸이 으스러져 죽은 청와대 요원들이 누워있을 뿐이었다.
“의외의 놈들도 있는 듯 하고.”
“쟤네들 데려가야 해요. 아마 국회의원도 엮여있는 거 같거든요.”
“내가 가져갈게. 그리고 저놈은…?”
멀지 않은 곳에서 김신이 몸을 일으켰다.
조금 전 중력으로 부상이 좀 있는 듯 했지만 어찌저찌 잘 견뎌낸 모양이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생존력이 훨씬 뛰어난 자식이었다.
“이제 곧 죽을 놈이요. 태랑 님. 죄송한데….”
“유빈 님도 저랑 같이 가시죠.”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기태랑이 송유빈에게 고갯짓했다.
그러자 날 쳐다보던 송유빈이 아주 어색한 인사를 건넸다.
“구, 구해주셔서 가, 감사합니다.”
“앗… 넵. 별말씀을요.”
덩달아 나까지 어색해지는 순간.
다행히 착륙 중인 헬리콥터 소리가 이 어색함을 약간이나마 날려주고 있었다.
“그럼 조금 이따 보자. 내가 필요한 거 같진 않으니까.”
“넵. 태랑 님. 조금 있다 봬요.”
송유빈과 기태랑이 헬기로 올라타고.
다시 상승하는 헬기를 뒤로한 채 김신에게 걸음을 옮겼다.
이젠 정말 거리낄 게 없었다.
김신의 무기 특성상 송유빈을 지키며 싸우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이젠 그럴 필요가 없게 됐다.
“어때? 좀 안 좋아 보이는데 항복할래?”
고개를 든 김신이 무섭게 날 노려봤다.
혹시나 해서 물어본 건데 치켜 떠진 눈깔을 보니 항복할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았다.
“다행이다. 혹시나 항복하면 살려줘야 하나 고민할 뻔했잖아.”
“이거 참 기분이 더럽군.”
뚜뚝 소리를 내며 몸을 푼 김신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 유명한 기태랑을 보냈다는 건 혼자서도 충분하다는 건가? 너도 알고 있을 텐데. 상성 상 기태랑은 내 최악의 적이란 걸.”
“알지. 알지. 네놈 현이 얼마나 튼튼한진 몰라도 다이아몬드를 자를 순 없을 테니까. 그런데 좀 알려주고 싶었거든. 네가 미래를 보든 뭐하든 어차피 나한테 진다는 걸.”
“건방진 소리를…!”
“그런 말 하기엔 지금 꼬라지가 좀 그렇지 않나.”
“이제 사용할 수 있는 무기도 없는 놈이!”
입술까지 깨물어가며 되받아치는 김신에.
[잭 더 리퍼 - 면도칼]
오른손으로 면도칼을 꺼내 들었다.
처음보다 상태가 좀 메롱이라 찜찜하긴 하지만, 그때든 지금이든 달라지는 건 크게 없었다.
10분 만에 죽냐, 5분 만에 죽냐의 차이 정도였다.
“넌 원래도 이거 하나면 충분했어. 자 그럼. 준비됐지?”
말을 건네며 김신에게 파고들었다.
다리와 한쪽 팔은 멀쩡한지 현을 흩뿌리며 회피하는 김신.
그런 김신을 숨 돌릴 틈 없이 바짝 뒤쫓았다.
예상한 대로 김신은 아슬아슬하게나마 잘 피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리 오래 가진 못할 터였다.
비슷한 양상으로 1분도 안 된 시간에 수십 번의 공격을 쏟아냈다.
“학습 능력이 없는 거냐! 다 보인다고 했을…!”
김신이 고개를 옆으로 젖히며 찔러지는 면도칼을 피해냈다.
다만 이번엔 완전히 피하지 못했다.
뺨을 스치며 얇은 핏줄기를 만들어내는 면도칼.
그 모습을 본 김신의 눈이 커졌다.
“호흡이 좀 거칠어진 거 같은데.”
계속해서 압박하며 미소를 그렸다.
인간인 이상, 체력 무한인 능력을 개방한 게 아닌 이상 김신은 지칠 수밖에 없었다.
지금처럼 자신을 상회하는 스피드와 기괴한 각도에서 공격이 쏟아진다면 더더욱 더 말이다.
공격을 할수록 면도칼에 묻어나오는 피의 양이 늘어났다.
몇 초 뒤의 미래를 볼 수 있어 면도칼이 도달한 지점을 알더라도 몸의 반응이 더뎌진 것이었다.
“이런 개…!”
그에 반해 김신은 제대로 된 공격 한 번을 못 하고 있었다.
멀쩡한 팔로 현을 뿌려내려 할 때마다 내 면도칼이 팔이 움직일 공간으로 미리 찔러졌기 때문이다.
“어때? 예지 능력은 없어도 비슷하지?”
이번엔 미처 반응하지 못한 김신의 왼쪽 어깻죽지로 면도칼을 박아 넣었다.
“끄아아아아!”
“패배해 본 적이 없냐고 물었었지? 나도 한 번 진 적 있어. 사로카라는 데몬 새끼였거든.”
면도칼을 뿌리치고 뒷걸음질 치는 김신에 곧바로 쫓아가 양다리의 무릎 뒤를 베어 넘겼다.
쿵 소리를 내며 잔해 위로 무릎 꿇는 김신.
그런 놈의 뒤에서 말을 이었다.
“그때 알겠더라고. 아 이번엔 운이 좋아서 살았지만 다음에 또 지게 되면 얄짤없이 뒤지겠구나.”
“크으으…!”
“실제로 내가 지금까지 해온 싸움은 지거나 도망치는 순간 죽음 확정이었어. 그래서 상대하는 놈이 누구든, 얼마나 강하든 어떻게든 이겨왔다. 네놈은 얼마나 널널한 전장에서 싸웠길래 패배나 도망을 쉽게 운운하는지 모르겠지만.”
“이 개…!”
스악!
현을 뿌리려 김신이 들어 올린 팔을 베어냈다.
“끄아아아아!”
“2분 10초다.”
김신의 목 옆으로 면도칼을 가져다 댔다.
“네놈의 몸이 예지를 못 쫓아가고 내게 무릎 꿇을 때까지 걸린 시간.”
난 5분도 안 걸릴 거라 말한 김신의 말을 떠올리며.
“그럼 잘 가라.”
입가 한가득 미소를 그렸다.
“약한 새끼야.”
푸화아아아악!
* * *
남산을 가루로 만들고 도착한 헌터청.
슬금슬금 주위를 살피며 안으로 들어갔다.
“너 그러다 잡혀간다.”
“갸아악!”
귀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팔에 깁스를 한 비광이 세상 한심한 얼굴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지금까지 여기 앉아서 본 사람 중에 제일 수상했어.”
“비, 비광 님. 여기서 뭐 해요?”
“바람 쐬고 있었는데?”
“아니 바람을 왜 자동문 앞에서 쐬고 있어요?”
“나가면 춥고 안에 있으면 더우니까. 타의로 문이 열릴 때마다 들어오는 바람만 맞고 있었던 거지.”
겁나 이상한데.
“이상한 새끼라고 생각했지?”
“새끼는 아니고요. 앞에는 비슷했어요.”
비광 옆으로 몸을 앉혔다.
“그래서 왜 이렇게 슬금슬금 들어온 건데?”
“이제 끝입니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앞으로 한 시간 뒤면 대한민국 전체로 백운이 무기왕이다! 라고 알려질 거예요.”
“어째서지.”
비광에게 조금 전 있었던 일을 말해주었다.
정체를 밝힐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 놓여 송유빈에게 내가 무기왕임을 알려버렸다고 말이다.
“오.”
비광이 감탄인지 뭔지 모를 소리를 냈다.
“끝났네.”
“그렇죠?”
내 어깨를 두들긴 비광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됐든 방송국 리포터니까. 꽤 오랫동안 뜨거운 감자 부동의 1위인 무기왕의 정체를 알았는데 침묵한다? 그건 불가능이지.”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송유빈은 단순히 국민 여동생이란 타이틀만으로 인기가 많은 게 아니었다.
이번 일에서도 알 수 있듯이 송유빈의 직업 정신은 엄청났다.
위에서 뭐라고 하든 리포터로서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거기가 불구덩이든 물구덩이든 일단 달려들고 보는 송유빈이었다.
남들에게 없는 엄청난 프로 의식을 알기에 사람들은 더더욱 송유빈을 좋아하는 것이었다.
“원래 아는 사이라며. 연락이라도 한 번 해보던가.”
“아니에요.”
사실 오면서 생각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하면 송유빈은 충분히 응해 줄 것 같았다.
난 무기왕이란 이름으로, 대산의 기둥 백운이란 이름으로 송유빈을 여러 번 구해줬었다.
송유빈 역시 이를 마음에 두고 있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걸 알기에 더더욱 연락할 수 없었다.
내 개인적인 욕심 때문에 송유빈이 중요하게 여기며 살아온 무언가를 어기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너 정체 왜 숨기는 거라고 했었지?”
“나중에 혹시나 유물 훔쳐야 할 때 무기왕에 덮어씌우고 백운이란 이름으로 유유히 살려고요.”
“맞네. 그런 어이 터지는 이유였었지.”
다리를 꼬고 몸을 벽에 기댄 비광이 입을 열었다.
“그럼 이번 기회에 정체가 알려지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범죄 예방을 위해.”
“안돼…. 내 완벽 범죄와 함께 하는 노후 라이프가 사라져버려!”
“뭐 어쩌겠어. 운명에 맡겨야지. 기도나 해보라고. 워낙 불순한 의도라 아무 데서도 안 들어줄 거 같긴 한데.”
양심상 기도는 하지 말자 생각하며.
여기저기 붕대를 한 비광을 쳐다봤다.
“그런데 왜 벌써 퇴원했어요? 다 나은 거예요?”
“빨리도 물어보네. 예정보다 좀 일찍 나왔어. 가고 싶은 곳이 있어서.”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자 비광이 고갯짓으로 헌터청을 훑었다.
이제서야 안 거지만 왠지 모르게 헌터청이 텅텅 빈 느낌이었다.
“아까 기태랑 도착하고 장관님 지시 하에 가용한 인원 전부 천일이랑 청와대로 갔거든. 함께 온 송유빈 님이 납치당한 후부터 남산에서 있었던 일까지 전부 다 녹음했더라고. 데려온 요원 시체만 해도 빼도박도 못할 증거긴 하지만.”
역시 송유빈이란 생각이 들었다.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일단 녹음부터 했다니.
대한민국 방송계의 미래가 밝았다.
내 미래는 어두워졌지만.
“청와대 쪽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는데 천일은 누가 미리 알려준 건지 회장 새끼부터 벌써 튀었다 하더라고. 천일 소유 섬으로 들어가서 요새화를 했대.”
“오…. 역시 미친놈이군요. 끝까지 안 뒤지고 싶어서.”
“어. 그런데 이게 쉽지 않은 상황이야. 천일이 러시아 정부 쪽에 줄이 있는 모양이더라고. 러시아에서 섬을 건들지 말라고 으름장을 놨어. 실제로 러시아에서 보낸 인원들이 하루 뒤면 섬에 도착할 거고.”
“설마 가만히 지켜봐야 한다는 건 아니죠?”
“설마. 청와대에서 장관님이 돌아오는 대로.”
고개를 내저은 비광이 입가로 미소를 그렸다.
“섬으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