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2화. 섬멸전
날개를 펼치고 섬으로 향하길 잠시.
눈앞으로 엄청난 수의 포탄과 레이저가 쏟아졌다.
어디 비밀 군사 기지에 비벼도 전혀 손색이 없는 방어였다.
쉴 새 없이 연기를 터뜨리며 포격을 피해냈다.
사방으로 퍼지는 탄막은 연기를 휘둘러 쳐냈다.
태랑 님도 몇 발 맞았겠는데.
순식간에 내리꽂혔음에도 기태랑의 몸에선 몇 번인가 빛이 번쩍였었다.
아마 찰나의 순간 반응한 적의 포대일 터였다.
포격을 피하며 섬을 한 바퀴 둘러봤다.
기태랑과는 조금 떨어진 곳으로 갈 생각이었다.
“무기왕이다!”
“못 내려오게 해라!”
방어 시스템만으론 무리라고 생각했는지 적지 않은 인원이 쏟아져 나왔다.
이런 상황에서도 항복 대신 천일에게 붙어먹기로 한 골빈 녀석들이었다.
내게 능력을 사용하려는 놈들을 향해 날아갔다.
저곳에서 시작하면 숫자도 줄이고 좋을 것 같았다.
“죽여!!”
내가 있는 곳으로 포탄부터 불이 붙은 날붙이까지 다양한 게 쏘아졌다.
한 곳으로 연기를 집중한 뒤 날아드는 포격 방향으로 강하게 뿌려냈다.
연기의 소용돌이가 만들어지며 적의 공격을 휩쓸고 지상으로 나아갔다.
“꽈, 꽉 잡아! 돌풍이다!”
연기의 영향으로 중심을 잡지 못하고 주춤거리는 녀석들.
[앤 보니&메리 리드 - 리볼버]
날개를 집어넣고 리볼버를 꺼내 겨누었다.
아직 높은 곳에 있을 때 한 차례 쓸어버릴 심산이었다.
[빛의 구원 - 작열탄]
양손의 리볼버에서 화염을 두른 탄이 뿌려졌다.
어두운 하늘을 가르며 쏟아지는 푸른색과 붉은색의 탄환 세례.
탄이 도착한 곳으로 폭발이 일어나며 불꽃이 솟구쳤다.
아래로 하강하며 가능한 넓은 범위로 융단폭격을 쏟아냈다.
이제야 좀 조용해졌네.
탄이 바닥날 때쯤 지상으로 발을 디뎠다.
아까 봤던 섬과는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내게 공격을 퍼붓던 놈들은 폭발에 집어삼켜진지 오래였고.
사방에서 쏘아 올려지던 포대와 장비들 역시 조금 전 작열탄에 휩쓸려 더 이상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이… 이 괴물 새끼가!”
살아남은 놈이 있는 모양이었다.
몇 명의 인원이 비틀대며 몸을 일으켰다.
“재밌네. 데몬한테 붙어먹은 새끼들이 괴물이란 단어를 쓰고 말이야.”
“입 닥…!?”
“아직 헛소리하는 거 보니까 덜 구워진 모양이다.”
[라 - 불꽃의 문양]
오른손으로 모은 불꽃을 땅으로 찍어냈다.
순간 폭발하며 사방으로 내뿜어지는 불꽃.
방금까지 무언가를 말하려던 놈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불에 삼켜져 하얗게 변해버린 잿더미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인간이길 포기한 놈들의 재를 뒤로하고 날개를 꺼내 불로 연기를 덮어갔다.
[라 & 이카로스 - 불의 날개]
섬의 중앙으로 고개를 돌렸다.
섬에 있는 것 중 내가 태워서 안 되는 건 없었기에.
불꽃과 함께 이글거리는 연기를 터뜨리며 중앙으로 쏘아져 나갔다.
* * *
강태황이 앞으로 접근한 배들을 단숨에 부셔냈다.
주먹 한 번 휘두르는 것만으로 배를 짓누르고 쪼개버리는 위력.
옆에선 비광과 류희수가 각각의 능력으로 빠르게 길을 열고 있었다.
푸화아아아아악!
그런 세 사람의 앞으로 거대한 불꽃이 솟구쳤다.
꽤 먼 거리임에도 전달되는 화끈한 열기.
불꽃이 터진 곳은 그야말로 불지옥이란 걸 열기가 대신 말해주고 있었다.
“역시 화려하구만.”
비광이 밝아진 하늘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검은색 연기와 뒤섞여 오묘한 빛을 뿜어내는 불꽃.
같은 편의 힘인 걸 알면서도 절대 다가가고 싶지 않은 힘이었다.
“저쪽은 지옥이겠어.”
다가오던 배 한 척을 뽀개버리며 강태황도 고개를 들었다.
항상 느끼지만 말도 안 되는 살상 능력이었다.
엄청난 스피드로 비행하는 것도 모자라 지나간 자리를 불바다로 만드는 힘이라니.
당하는 입장에선 속수무책으로 구워질 수밖에 없었다.
“갈수록 악랄해지는 느낌이랄까.”
비광이 계속해서 패를 뽑으며 말을 이었다.
악랄하다고 표현했지만 이렇게 듬직한 힘이 또 있을까 싶었다.
실제로 안에서 백운이 휘저어 준 덕에 본대로 쏟아지는 화력이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었다.
남은 병력도 섬 중앙을 지원하기 위해 바다 쪽의 방어를 포기한 느낌이었다.
“어때? 류희수. 괴물을 직접 마주한 소감이.”
웃으며 말을 건네는 비광에 류희수가 마른침을 삼켰다.
류희수는 한국에 오기 전부터 백운을 궁금해했었다.
워낙 유명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동영상에서 백운이 보인 능력은 정말 말이 안 되었기에 직접 두 눈으로 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 정도의 힘을 사용할 수 있는 이는 어떤 사람일지 궁금했었다.
‘괜히 입이 마르도록 말한 게 아니었구나.’
다대일의 전투라면 한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류희수였다.
강한 염력의 넓은 범위로 적이 몇 명이든 손쉽게 상대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눈앞에서 펼쳐지는 일방적인 학살을 보고 있자니 뭐랄까.
앞으론 명함 내밀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백운의 힘은 단순히 다대일에 강하다던가 특화되어있다는 표현만으론 부족했다.
그야말로 압도적.
당하는 이에게도, 보는 이에게도 경이로움을 심어 줄 정도로 백운은 막강했다.
‘당하는 녀석이라.’
류희수가 천일의 회장 유지열을 떠올렸다.
이전에 한 번 만난 적이 있었다.
잠깐 한두 마디를 주고받았을 뿐인데도 기분이 더러워지는 인간이었다.
세상에 무서울 게 하나 없다는 듯 쉴 새 없이 실실 쪼갰었던 유지열.
류희수는 궁금했다.
저런 압도적인 존재를 마주하고 있을 유지열의 표정이 어떨지 말이다.
* * *
“이런 씨…!”
벙커에 자리 잡은 유지열이 입술을 깨물었다.
조금 전까지 유지열은 여유롭게 와인을 걸치고 있었다.
확신했었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압박을 받은 한국은 절대 자신을 건드리지 못할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확신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대통령을 어떻게 구워삶은 건지 강태황은 헌터청의 핵심 전력을 이끌고 섬으로 쳐들어왔다.
여기까지도 오케이였다.
섬의 방어 시설과 인원이 엄청나니 러시아의 병력이 도착할 때까지 버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 부, 불꽃이 다가옵…. 끄아아악!
# 푸화아아아아악!
다시 한번 상황을 비추던 카메라와 인원이 불꽃에 집어삼켜졌다.
유지열의 얼굴엔 더 이상 여유란 게 존재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무기왕이 등장하며 섬을 쓸어버리기 시작한 시점부터 깨끗하게 사라져 버렸다.
믿었던 병력은 눈 깜짝할 사이 한 줌의 재로 변했으며 천문학적인 돈을 들인 방어 시스템도 순식간에 파괴돼 무효화 되고 말았다.
심지어 이들은 무기왕의 진격을 단 1초도 늦추지 못했다.
“하…!”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기가 찼다.
수십억을 태웠음에도 1초도 벌지 못한다는 게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러시아 놈들은 언제 도착하는 거야!!”
“아, 앞으로 19시간 47분입니다!”
유지열이 테이블을 내리쳤다.
저들에게 주어졌던 시간은 24시간.
모든 방어를 뚫고 자신에게 도달해 잡아가기까지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으나 이젠 아니었다.
이젠 입장이 바뀌며 그렇게 짧아 보이던 시간이 영원처럼 길게 느껴졌다.
“더 빨리 오라 그래! 약속했던 거 다 취소해버리기 전에!”
“회, 회장님! 한쪽에선 기태랑이 오고 있습니다!”
“오고 있으면 막아! 그러라고 수십억이 갖다 박은 거잖아!”
“그게…. 무기왕이 쓸고 지나간 길만 이용해 오고 있다고 합니다. 병력이 조금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화가 치밀어 올랐다.
침공에서 부상 입지 않은 기태랑이 올 거라는 건 계산 안에 있었다.
하지만 그런 기태랑이 제시간에 도착하는 건 이야기가 달랐다.
원래 계산대로라면 준비해놓은 방어 전력이 막아냈어야 하는데 무기왕이 다 쓸어버리며 지나간 탓에 기태랑을 막을 만한 병력이 남지 않게 된 것이었다.
# 훅훅! 여보세요?
“!?”
유지열이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을 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천일 쪽 통신 장비를 빼앗은 모양이었다.
# 아아! 들리십니까? 들리는 거야 뭐야. 대답이 없어.
기기로 몇 번 인가의 타격음이 들려왔다.
잘 되지 않는 것 같자 기기를 두들긴 모양이었다.
“누구냐?”
# 오!
유지열이 대답하자 반가운 목소리를 낸 남자가 소형 카메라로 얼굴을 들이댔다.
“!!!”
모니터로 보인 얼굴에 유지열의 눈이 커졌다.
구면이었다.
대산의 엘리베이터에서 만났던 남자, 백운.
그냥 주제 파악 못하는 하룻강아지라고 생각했던 자였다.
# 또 만나네. 그때랑 얼굴이 많이 달라졌어.
“이 개자식….! 네놈이 무기왕이었던 거냐!”
# 개자식이라니. 빤쓰만 입고 무릎 꿇어도 죽여버릴 판인데 겁이 없으시네. 참고로 그 부스스 머리 아저씨도 마지막엔 무릎 꿇고 죽었어.
유지열의 얼굴로 놀라움이 번졌다.
남산이 날아간 건 알았지만 유지열은 계속해서 김신에게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유지열의 상식선에서 김신은 절대 질 리 없는 막강한 인물이었다.
무언가 일이 잘못되어 천일이 노출되긴 했어도 어딘가에 살아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 참고로 일대일로 죽였어. 2분 10초만에.
‘2분 10초…?’
낭패감이 느껴졌다.
누굴 상대하든 전투 시간이 5분을 넘기지 않기로 유명한 김신이었다.
그런 김신이 제거되는데 고작 2분이라니 눈앞의 남자가 얼마나 강한지 쉽사리 가늠이 되지 않았다.
# 거기 어디야? 어차피 다 끝장난 마당에 기어 나오지 그래.
“허세 부리지 마라. 러시아 측 병력만 오면 넌 끝이다. 난 그때까지 여기서 버티기만 하면 되고.”
# 걔네 와도 넌 못 살아나가.
“헛소리.”
# 아닐걸. 왜냐하면 내가 너 안 보내 줄 거거든.
백운이 렌즈로 얼굴을 들이댔다.
# 러시아 놈들이라고 날 어떻게 할 수 있을 거 같아?
“…!”
이번엔 유지열도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섬을 휩쓴 무기왕이란 존재가 누군가에게 패배하는 그림이 말이다.
# 아 됐다고요? 어디에요?
“!?”
“회장님! 끊으십시오! 추적 당했습니다!”
# 찾았다. 요놈 새끼.
미소 짓는 백운에 깜짝 놀란 유지열이 통신을 끊었다.
심장이 미칠 듯이 쿵쾅거리고 있었다.
태어나서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항상 모든 이의 머리 위에서 놀던 유지열이었다.
덕분에 유지열이 아는 건 누군가를 짓밟는 법뿐이었다.
반대로 자신을 끌어내리려 한다거나 짓밟으려는 자를 어떻게 해야 하는 지는 알지 못했다.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로얄 로드를 걸어온 자신에게 그런 행동을 하는 자가 말이다.
꿀꺽.
벙커로 정적이 찾아왔다.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섬의 어느 곳보다 안전한 벙커였지만, 이곳으로 무기왕이 오고 있다면 얘기는 달라졌다.
독 안에 든 쥐.
벙커는 도망칠 곳도, 피할 곳도 없는 진퇴양난의 공간이었다.
콰아아앙!!
먼 곳에서 들린 굉음에 유지열이 입을 열었다.
“무슨 소리야!”
“….”
유지열의 물음에도 비서 실장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야 이 새끼야! 무슨 소리냐고 지금!”
“회, 회장님.”
그제야 정신을 차린 비서 실장이 고개를 돌려 유지열을 바라봤다.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새하얗게 질린 얼굴이었다.
“무기왕이…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