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4화. 무기왕은
강태황이 예상보다 강한 어투로 말해서일까.
옥시나가 입술을 깨문 채 조용히 이쪽을 훑었다.
쫄아서 더 말은 못하지만 얼굴을 다 기억해두겠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하실 말씀이 더 없다면 이만 가보겠습니다.”
한 번의 꾸벅임조차 없이 돌아서는 강태황.
기태랑과 비광, 류희수도 그 뒤를 따라나서고 나 역시 걸음을 옮기며 옥시나를 지나쳤다.
“어디에서든 가면을 쓰고 다니시는군요.”
“네?”
지나치려는 순간 옥시나가 말을 걸어왔다.
목소리엔 마음에 몹시 안 든다는 투가 가득했다.
딱 봐도 강태황에게 얻어맞은 화풀이를 나한테 하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은 모두 정체를 밝히고 활동하는데 왜 안 그러는 건가요? 자신 없어서인가요? 다른 이가 찾아와서 해코지할까 봐? 모두가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 싸우는데 당신은 숨으려고만 하는군요.”
기관총처럼 다다다 쏘아지는 말에 하마터면 귀로 손을 올릴 뻔했다.
막으려는 건 아니고 혹시나 피가 나진 않았나 확인해보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거창한 이유는 아닌데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완벽 범죄를 위한 숨김이었으니까.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옥시나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팔짱까지 끼며 눈을 찌푸린 채 날 바라보는 옥시나.
“그럼 뭔가요? 정체는 숨기고 싶지만 겁쟁이라 불리는 건 싫은가 보네요.”
평소라면 욕을 한 바가지 퍼부어줬겠지만 상대는 러시아 대사였다.
최대한 예의를 갖추자는 생각에 불타고 있는 섬을 가리켰다.
“얼마나 걸렸을 거 같아요?”
“뭐라고요?”
“이 섬 저렇게 만드는데 얼마나 걸렸을 거 같냐고요.”
섬을 한 번 둘러본 옥시나가 더 깊게 인상을 썼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의아한 모양이었다.
“30분.”
“…!?”
“믿든 안 믿든 상관없어요.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건…. 뭔가 의심스러운 게 있다면 나중에 제 반대편에 한 번 서보시라고요. 그럼 알게 해드릴게요.”
옥시나 쪽으로 얼굴을 가까이하며 말을 이었다.
“해코지를 두려워하며 벌벌 떨어야 하는 건 어느 쪽인지요.”
눈을 크게 뜨며 무언가를 더 말하려는 옥시나에 빙글 몸을 돌렸다.
더 말을 섞어봐야 내 시간만 아까울 것 같았다.
“이걸로 끝이라 생각하면 큰 오산이에요!!”
뒤통수에 대고 끝까지 말을 박아 넣는 옥시나에 손을 휘적휘적 흔들어주었다.
저런 비슷한 말은 하도 지겹게 들어서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였다.
하도 똑같아서 어디 초면 도발 어록이라도 있는 건지 의심이 들었다.
“뭐라고 하든?”
웃으며 물어오는 비광에 고개를 돌려 옥시나를 바라봤다.
옥시나는 눈에서 레이저라도 쏘려는 건지 여전히 날 노려보고 있었다.
“멍멍! 이라고 하던데요.”
그런 옥시나에게 마지막 미소를 지어준 뒤 대기 중인 헬기로 올라탔다.
* * *
이것이 세금의 맛인가.
헌터청에 위치한 상급 헌터 숙소.
커다란 욕조에 누워 뻥 뚫린 하늘을 바라봤다.
하다 하다 건물 안에 노천탕이라니 아주 훌륭한 숙소가 아닐 수 없었다.
“집은 또 언제 구하냐.”
한국을 떠나기 전에 집을 구할 예정이었다.
지역은 딱히 정하지 않았으나 바닷가는 피하기로 했다.
뭐랄까.
바다에 마가 낀 느낌이었다.
근처에 샀다가는 또 얼마 안 가 뽀개질 것 같았다.
아주 제일 안전한 서울 한복판이 나을 거 같기도 했다.
문제가 있다면 더럽게 비싸다는 거지만 말이다.
“하아… 만사가 귀찮구만.”
뜨신 물에 첨벙거리고 있자니 몸이 추욱 늘어졌다.
집이고 나발이고 그냥 이대로 잠들고 싶었다.
머릿속에선 그냥 여기에 눌러앉을까 하는 유혹이 들기도 했다.
여기서 종종 쉬는 헌터는 있어도 눌러사는 사람은 없어 건물도 한산했다.
지금도 거의 전세를 낸 것처럼 혼자 노천탕을 즐기는 중이었다.
그나저나 언제 방송하려나.
고개를 들어 너머에 있는 모니터를 응시했다.
채널은 CBC로 고정되어 있었다.
당일에 바로 터뜨리지 않을까 싶었는데 CBC는 예상 외로 잠잠했다.
얼마나 제대로 준비해 대대적으로 뿌리려는 건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새로운 루트를 준비해야겠구만.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이제 유물을 훔치고 무기왕 이름에 덤탱이 씌우는 건 물 건너갔다.
어디 땅굴을 파놓던가 밀림에 저택을 짓거나 해서 도피처를 만들어야 할 것 같았다.
이번 천일 놈들이 한 것처럼 외딴 섬 하나를 통째로 사던가 말이다.
아. 그건 개부자들이나 하는 거지.
섬을 못 사면 서럽구나 하며 첨벙첨벙대는 사이.
CBC 뉴스를 진행 중이던 아나운서가 다음 코너를 안내했다.
# 다음은 국민 리포터이자 CBC의 마스코트인 송유빈 리포터의 기자회견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송유빈 리포터는 이번 천일과 관련된 조사를 진행했었는데요. 그 과정에서 천일에 납치당하는 등 위험천만한 상황이 펼쳐졌었다고 합니다.
담갔던 몸을 벌떡 일으켰다.
드디어 올 게 와버렸다.
지금은 가장 많은 시청자가 몰리는 황금 시간대였다.
거기다 리포터가 기자회견이라니.
각 방송사의 기자를 CBC로 불러들여 회견하는 모습을 CBC 방송에서 송출하는 신박하면서도 임팩트 있는 방식이었다.
모니터로 인터뷰 준비를 마친 송유빈의 얼굴이 떠올랐다.
리포터인 송유빈도 이렇게 많은 카메라 앞에 서는 건 처음인지 꽤 긴장한 얼굴이었다.
드륵!
마른침을 삼키며 보고 있을 때 노천탕 문이 활짝 열어젖혀졌다.
뒤를 이어 비광과 기태랑이 들어왔다.
아마 시작한 방송을 보고 달려온 모양이었다.
“벌써 보고 있었네.”
“무기왕의 정체가 밝혀지는 역사적인 순간이구만.”
“팝콘이 없는 게 아쉽구만.”
비광이 낄낄거리며 옆으로 자리를 잡았다.
역사적인 순간을 당사자와 함께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런 두 사람을 향해 힘없이 엄지를 치켜 보였다.
“저 먼저 갑니다.”
그러자 비광과 기태랑도 덩달아 엄지를 치켜세웠다.
“멀리 안 나간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주고받은 후.
입을 여는 송유빈에 세 사람의 시선이 모니터로 집중됐다.
* * *
“안녕하세요. CBC의 송유빈입니다.”
인사를 건네자 여기저기서 반가운 답례가 들려왔다.
같은 업종에 근무하며 수도 없이 마주쳐 온 사람들이었다.
라이벌이면서도 동시에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
오늘처럼 CBC 방송국에 모이게 되는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국장님이 이를 갈고 계셨네.’
보통이라면 진행될 수 없는 방식의 기자회견이었다.
다른 방송국에서도 달가워하지 않을 게 분명했고 말이다.
하지만 국장은 다른 방송국에 선택지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이번 일과 관련되어 납치까지 됐던 당사자의 정보를 조금이라도 얻고 싶으면 국장의 의도대로 이곳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VCC 방송국의 김건우입니다. 천일에 납치당했다가 풀려났다고 들었습니다. 당시 상황을 간략하게 말씀해주실 수 있는지요?”
고개를 끄덕인 송유빈이 동기 유미리의 일부터 갇히기까지를 상세히 설명했다.
여기저기서 탄식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서로 경쟁할지언정 위험한 곳에 팔아먹는 등 선을 넘지 않는 게 불문율이었는데.
유미리는 그걸 시원하게 어겨버린 것이었다.
“유미리 씨는 송유빈 리포터를 납치당하게 한 직후 실종됐다고 들었습니다. 도주한 걸까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송유빈이 고개를 저었다.
유미리는 차에서 내린 후 방송국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경찰은 입막음을 위해 천일이나 청와대 요원에게 처리당했을 거라고 말했었다.
“다음 질문으로. 송유빈 리포터가 납치당했던 장소가 남산이라고 들었습니다. 이번에 숨겨져 있던 건물과 일대가 폭삭 내려앉은 곳이죠. 당시 현장엔 대한민국 헌터청 소속 1급 헌터 기태랑 님과 무기왕이 있었다는 첩보가 있었는데요. 사실인가요?”
“네 맞습니다.”
질문을 하던 기자가 잠시 뜸을 들이더니 다시 말을 이어갔다.
“헌터청에서 헬기로 출발한 건 기태랑 님 뿐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무기왕은 원래부터 송유빈 리포터와 함께 있었다는 얘기가 되는데요.”
이 부분에선 모두가 숨을 죽였다.
송유빈 역시 다음 질문이 무엇일지 알고 있었다.
“송유빈 리포터. 1급 헌터 무기왕의 얼굴을 보셨나요?”
송유빈이 안긴 채 올려봤던 백운의 얼굴을 떠올렸다.
하늘에서 수백 발의 포탄과 날카로운 현이 무서운 기세로 떨어지던 순간이었다.
- 제가 무기왕이에요.
기묘한 경험이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어째선지 세상의 시간이 멈춰버린 기분이었다.
아주 짧고 간단한 문장이었지만 그만큼 송유빈에겐 의미가 컸다.
슬쩍 고개를 돌리자 송유빈을 바라보고 있는 국장과 팀장 조영천이 보였다.
두 사람은 송유빈이 별말을 하지 않았음에도 무기왕의 정체를 알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래서였다.
기자회견 전에 국장은 송유빈에게 강력히 주문했었다.
생방송 기자회견에서 질문이 들어오면 무기왕의 정체를 공개하라고 말이다.
CBC 방송국 창립 이래 최대 이슈 몰이가 될 거라고 국장은 확신하고 있었다.
“송유빈 리포터는 절대 기억력을 개방했습니다. 한 번 본 건 절대 잊지 않을 텐데요. 질문을 조금 더 단도직입적으로 하겠습니다. 대한민국 헌터 무기왕은 누구인가요?”
국장이 송유빈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말하라는 것이었다.
조영천은 묘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알아서 하란 신호였다.
송유빈도 알고 있었다.
지금 무기왕의 정체를 말하면 자신은 방송계에서 대스타가 될 거란 사실을.
평소의 송유빈이라면, 무기왕과 관련된 게 아니었다면 아마 거침없이 말했을 터였다.
명성은 둘째 치더라도 리포터로서 두 눈으로 본 걸 못 봤다고 거짓말하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심호흡한 송유빈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날 죽게 놔둘 수도 있었어.’
하지만 백운은 그러지 않았다.
정체가 알려질 걸 알면서도 송유빈을 구해냈다.
마지막 포탄이 떨어질 때도 백운 혼자였다면 무기를 꺼내 무기왕이란 걸 드러내지 않고도 충분히 피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무기를 꺼낸 건 송유빈이 조금이라도 다칠 상황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였다.
이 밖에도 여러 번 있었다.
가짜 무기왕에게 납치당했을 때부터 기업 해신의 암살자가 송유빈을 찾아온 것까지.
백운이 아니었다면 송유빈은 이미 몇 번 죽은 목숨이었다.
“저는….”
눈을 뜬 송유빈이 마이크로 입을 가져다 댔고 회견장으로 정적이 깔렸다.
리포터로서의 프로 의식과 직업 정신은 지금도 송유빈에게 무척 중요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송유빈에게 있어 그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건.
“무기왕의 얼굴을 보지 못했습니다. 당연히 이름도 모르고요. 결론은…. 저 또한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존재이자 자신을 대가 없이 몇 번이나 지켜준 무기왕이었다.
받은 것에 비하면 보잘것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송유빈은 다짐했다.
이번엔 자신이 무기왕을 지킬 차례라고 말이다.
“무기왕이 누군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