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7화. 몽골
몸으로 둘러진 보라색 기운을 바라봤다.
뜨듯한 거 같으면서도 약간 답답한 거 같기도 한, 뭐라고 설명하기 힘든 오묘한 기분이었다.
“답답하거나 하진 않아?”
“응. 아주 좋은데.”
그거 다행이네란 얼굴로 류희수가 고개를 돌렸다.
지금 난 류희수와 함께 바다 한가운데를 날아가고 있었다.
한밤중이긴 했지만 칼데아를 꺼내거나 하진 않았다.
류희수의 염동력에 업혀 편히 이동하는 중이었다.
곁눈질로 슬쩍 류희수를 바라봤다.
편하게 팔다리를 쭉 뻗은 채로 실려가고 있어서일까.
나도 모르게 잠이 솔솔 쏟아지고 있었다.
왠지 옆에서 운전하는데 처자는 느낌이라 최대한 버티는 중이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막 날아서 가도 괜찮아? 난 한 번 경고 받았었거든. 무단 입국이니까 비행기 타고 다니라고.”
“난 미리 몽골에 연락해뒀어. 임무 수행하면서 몽골 헌터청에 바로 연락할 수 있는 라인을 만들어뒀으니까.”
“그, 그렇구나.”
미리 연락이란 걸 해뒀다니.
나처럼 가고 싶다고 냅다 날아가는 게 아니었다.
나도 나중엔 미리 연락하고 가야지 생각하는 사이.
“이제 곧 몽골 땅이야.”
“오.”
류희수의 말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내가 지금껏 간 나라에 비하면 가까운 편인 몽골.
가까운데도 한 번도 가보지 못했었다.
“이곳이 징기스칸의 나라구먼.”
딱히 몽골에 대해 더 할 말은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몽골에 관해 아는 게 징기스칸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가까워지는 육지를 보며 징기스칸이 무슨 무기를 사용했었나 떠올려보았다.
사실 칸의 특별한 무기라 할 만한 건 내가 알기로 없었다.
단지 몽골군이 주로 사용하는 활과 휘어진 외날검이 있을 뿐이었다.
“여기부턴 걸어가자. 우리가 가야 할 곳은 출입금지 구역이거든.”
육지에 도착하며 류희수가 힘을 풀었다.
절차를 하나같이 잘 지키는 류희수를 보고 있자니 뭐랄까.
내가 생각보다 훨씬 더 무법자처럼 돌아다녔다는 게 느껴졌다.
어느 정도 걸어가자 너머로 환하게 불이 밝혀진 기지가 눈에 들어왔다.
낮은 층으로 이루어진 막사 느낌의 기지였다.
“희수 님!”
어두운 평야 아래.
저 너머에서 반짝이는 빛이 좌우로 흔들거리고 있었다.
조금 전 염력의 보랏빛을 본 모양이었다.
“이거 쓰고 다녀. 밤엔 모래바람이 세서 원래 많이 쓰고 다니니까.”
류희수가 건넨 터번으로 얼굴을 둘렀다.
나름 정체를 숨기라고 챙겨준 것이었다.
“한국 헌터청에서 같이 온 동행 정도로만 소개할게. 괜찮지?”
많은 걸 신경 써주는 류희수를 보고 있자니 묘한 기분이었다.
어딜 다니든 밝혀지면 어쩔 수 없는 거지 뭐! 란 주의였는데.
나보다 오히려 더 내 정체를 신경 써주고 있었다.
“나야 고맙지.”
어쨌든 숨길 수 있다면 최대한 감추는 게 좋으니 흔쾌히 승낙했다.
“어서 오십시오! 다치셨다고 들었는데 회복하신 건가요?”
“네. 이젠 괜찮아요. 밤늦게 갑자기 온다고 해서 죄송해요.”
“아닙니다. 희수 님이 오신다면 새벽 중에라도 나와야죠. 옆에 계신 분은…?”
“한국 쪽 기관에서 조사를 도와주시기 위해 오신 분이에요.”
“그렇군요! 전 몽골 소속 헌터 게를레 라고 합니다. 몽골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류희수는 상당히 신뢰받고 있는 듯 했다.
터번으로 얼굴을 둘둘 멘 나를 더 캐묻는 것 없이 받아주는 걸 보면 말이다.
게를레를 따라 차에 몸을 실었다.
말이나 낙타 같은 걸 타고 갈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현대식이었다.
“아 참. 희수 님. 지금 몽골로 러시아 측 인원이 들어와 있습니다.”
“러시아요?”
러시아란 단어에 귀가 솔깃해졌다.
“공식적인 소속은 러시아의 민간 업체입니다만…. 이들의 신분을 보장한 게 러시아 정부입니다.”
“그럼 러시아 정부와 연관됐을 확률이 높네요.”
“예. 그래서 더 께름칙합니다. 숨길 것 없는 용무였으면 굳이 민간 업체로 포장할 필요가 없었을 테니까요.”
구린 짓을 많이 하는 국가에서 종종 많이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민간 업체로 꾸며 침입시키고 무언가를 들키면 자기들과는 상관없다며 꼬리를 자르는 방식.
여기에 세계 각지에서 애먼 짓을 하다 많이 걸린 러시아다 보니 더 의심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일단 러시아의 입김 때문에 몽골 정부도 어쩔 수 없이 허가를 한 상태입니다. 기지에 함께 있는 터라 마주칠 수도 있습니다.”
“네. 먼저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덤덤하게 대답한 류희수가 의자로 몸을 기댔다.
굳이 부딪히지만 않으면 된다는 주의 같았다.
“도착했습니다.”
차가 아까 멀리서 봤던 기지 한복판에 멈춰 섰다.
꽤 늦은 시간임에도 막사 곳곳엔 불이 밝혀져 있었다.
뭘 하는 건지 사람들은 분주하게 움직이는 상태였고 말이다.
“최근 들어 데몬 출현이 갑자기 잦아져서요. 대기조를 더 촘촘하게 운영하는 중입니다.”
“갑자기 늘어난 건가요?”
나란히 걷던 게를레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대체 뭐가 달라진 건지는 수색 중이긴 한데 쉽지가 않네요.”
데몬이 나타나는 거야 세계 각지에서 발생하니 이상할 건 없지만.
그 빈도수가 갑자기 눈에 띌 정도로 증가한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었다.
이번 한국의 경우처럼 갑자기 데몬이 힘을 합쳐 몽골을 공격하자 라고 한 게 아니라면 말이다.
“한밤중의 손님인가.”
류희수가 머물던 막사로 걸어가던 중.
옆에서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목소리에 어울리는 우락부락한 근육몬들이 앉아있었다.
이미 거나하게 한 잔 걸친 건지 얼굴은 시뻘개져 있었다.
“뭐야. 이런 막사에 초등학생도 올 수 있는 건가?”
“군사 기지라고 생각했는데 초등학교였나?”
낄낄거리는 놈들에 오히려 내가 류희수의 눈치를 살폈다.
비광의 말에 의하면 평소에도 초등학생이니 뭐니 놀림을 많이 받아 은근 발작 버튼이라고 했었는데.
지금 곧장 염력으로 놈들을 뭉개버릴까 걱정이 되어서였다.
다행스럽게도 류희수는 딱히 신경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냥 저 날벌레들은 뭐지란 표정으로 놈들을 쳐다보는 게 다였다.
“대한민국 1급 헌터 류희수 님입니다. 말씀을 주의해주시죠.”
“허! 몽골에 대한민국 소속 1급 헌터가 있다더니 이런 꼬맹이였나.”
게를레가 뭐라고 한마디 더 하려는 찰나.
머리를 빨갛게 물들인 덩치가 입을 열었다.
“1급 헌터든 0급 헌터든 국가 소속이 아닌 우리가 주의해야 할 필요는 없다. 불만이면 우리의 출입을 허가한 러시아 정부에 클레임 걸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지.”
“못하겠지만 말이야.”
말하는 꼬라지를 보니 아까 게를레가 말했던 불곰국 놈들인 것 같았다.
보통이면 국가의 보증을 받고 남의 나라에 왔으면 조심하기 마련인데 그러긴커녕 더 날뛰는 꼬라지라니.
당장 달려가서 닭벼슬처럼 세워놓은 머리를 무 뽑듯이 뽑아버리고 싶었다.
“아이! 뒤에 키 큰 놈은 또 뭐야? 뭐 비밀요원이라도 되는 건가? 한밤중에 왜 터번은 칭칭 감고 있어? 초면인데 예의가 없구만.”
“초면부터 술 냄새 풀풀 풍기면서 아가리 터는 거 보단 나은 거 같은데.”
“뭐!?”
낄낄거리며 말을 건네던 놈들이 미간을 찌푸렸다.
“아 신경쓰지 마세요. 그쪽한테 한 말 아니니까. 제가 꼴 뵈기 싫은 놈들 보면 혼잣말하는 습관이 있어서요. 아이고! 이놈의 주댕이 너무 솔직해서 탈이라니까.”
손을 들어 입을 톡톡 두들겨 줬다.
아무래도 지들이 놀림 받는 건 익숙하지 않은 놈들인 것 같았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험악해지며 약간의 정적이 찾아왔다.
“하하하하! 한국에도 재밌는 친구가 있었구만!”
그러던 중 상황을 지켜보며 잠자코 술을 홀짝이던 덩치가 웃음을 터뜨렸다.
다른 이보다 유난히 팔의 근육이 두꺼운 녀석이었다.
그렇게 한참 웃어재낀 덩치가 미소를 그렸다.
묘하게 콧수염이 거슬리는 자식이었다.
“난 이반이라고 하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서로 너무 인상쓰지 말자고!”
“그럴까요? 전 인상 쓴 적 없지만. 하하하!”
옹졸하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내 마음속에서 저놈들은 이미 슈퍼 비호감이었다.
애초에 옥시난가 뭔가 하는 애 때문에 러시아 이미지도 안 좋은데 만나자마자 도발 시전이라니.
아무 눈치 볼 거 없는 황야 한가운데였다면 뺨따구를 좌우로 30번은 후려쳤을 터였다.
“그나저나 만나서 반가운데 인사 차원에서.”
이반이 거대한 팔로 테이블을 쓸어버렸다.
덕분에 놓여 있던 술병들이 떨어지며 와장창 깨져 버렸다.
깔끔해진 테이블 위로 두터운 팔을 올린 이반이 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팔씨름 한 번 어떤가?”
갑자기?
약간 벙찐 상태로 이반을 바라봤다.
각국마다 인사 방식이 다양하다는 건 알았지만 다짜고짜 팔씨름이라니.
“하지 마십시오. 조금이라도 자기 마음에 안 들었다 하면 팔씨름하자며 팔을 부숴놓는 놈입니다. 저희 인원 중에도 도발에 넘어가 깁스하고 있는 사람이 여럿이고요.”
게를레가 조용히 속삭였다.
그나마 쿨하고 시원시원한 놈인가 싶었는데 그 나물에 그 밥이었다.
아주 옹졸하기 짝이 없는 자식.
“왜? 무서워서 못 하겠나? 무서우면 조용히 사과하고 꺼져. 처음부터 입을 조심히 놀렸어야지.”
가만히 보고 있자 이반이 본색을 드러냈다.
내가 한 말이 심기를 제대로 건드린 모양이었다.
“쫄아서 굳어버린 거 같은데?”
“확인해봐야 하는 거 아니야? 지린 거 같은데.”
옆에서 낄낄거리는 놈들에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마가 낀 건지 가는 곳마다 조용하게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대기 중인 이반 쪽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아…!”
“괜찮아요.”
말리려는 게를레의 어깨를 두들기고 이반 앞으로 가 앉았다.
“허 용기는 가상하구만.”
호탕하게 웃은 이반이 들어오라는 듯 손을 까닥였다.
“지면 그 터번 벗고 정중하게 사과하라고. 말을 할 수 있는 상태일지는 보장 못 하겠지만 말이야.”
“너도 지면 뒤에 덩치 놈들이랑 같이 땅에 대가리 박고 사과해. 그럴 수 있는 상태일지는 나도 보장 못 하겠지만.”
“푸하하하하하하! 좋다! 제대로 사과하도록 하지!”
고개를 끄덕이는 이반에 올려져 있는 손을 붙잡았다.
최대한 빨리 놔버리고 싶을 정도로 우악스럽고 기분 나쁜 손이었다.
“자! 손님이니까 특별히 선공권을 주도록 하지!”
“오?”
“먼저 힘줘서 넘겨 보라고! 난 힘 빼고 있을 테….”
이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쥔 손으로 힘을 주며 이반의 팔을 힘껏 젖혀버렸다.
콰앙!
찰나의 순간 이반의 손등과 먼저 만난 테이블이 박살났지만 거기서 힘을 풀진 않았다.
내 목표는 테이블보다 더 밑인 땅이었기에 붙잡은 손에 끝까지 힘을 주며 아래로 내리꽂았다.
콰가가가가!!
“끄아아아아아악!”
이반의 손을 땅으로 충분히 꽂아 넣은 뒤.
“후우!”
힘을 풀며 몸을 일으켰다.
덩치들은 한창 낄낄거릴 땐 언제고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뭐해? 니네 대장이 약속했잖아.”
그런 놈들을 향해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빨리 대가리 박아. 돼지 새끼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