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9화. 합리적 의심
댕댕이들이 살아가는 세계의 이름은 치플린.
알록달록한 색이 주변을 가득 채운 곳이었다.
열심히 두리번거리며 걸어가는 사이 사방에서 방울 소리가 들려왔다.
“인기 보소.”
어느덧 류희수 주변엔 수십 명의 치쿠 족이 방방 뛰어대는 중이었다.
오랜만에 방문해 반가워서인지 쉴 새 없이 점프를 뛰는 건 물론 몸을 숙인 류희수의 손이 닳도록 핥아대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느껴지는 부러움에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봤다.
나한테도 몇 명만 와줬으면 하는 소소한 바람과 함께였다.
“새로운 인간인가.”
치쿠 족 한 명이 내게 다가왔다.
오긴 왔는데 뭔가 류희수 주변에 있는 애들과는 달리 엄청 거대한 녀석이었다.
나보다 두세 배는 더 커다란 크기.
아마 류희수가 성체라고 말한 개체인 듯 했다.
작은 애들은 시츄나 말티즈 같은 아기자기한 댕댕이를 닮은데 비해 눈앞의 녀석은 썰매견인 허스키에 가까운 생김새였다.
한 가지 더 특이한 게 있다면 성체는 강아지처럼 사족 보행이란 점.
커가면서 서서히 변해 가는 모양이었다.
“어… 안녕하세요.”
어색한 얼굴로 손을 흔들자 허스키가 천천히 몸을 숙였다.
치쿠 족의 인사인지 내 이마로 머리를 갖다 대는 녀석.
묘하게 부들부들하고 따듯한 것이 가슴이 몽글해지는 기분이었다.
“특별한 눈을 가지고 있구나.”
킹냥이와 갓댕이다 보니 사이가 안 좋으려나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하며.
페샨 족을 만나 눈을 얻게 된 이야기를 간략하게 해주었다.
“보이지 않는 걸 보이게 해주는 눈이라. 이렇게 귀한 눈을 선물했다는 건 네가 그 종족에 큰 도움을 줘서겠지.”
“문을 비집고 열던 나무를 태운 게 전부지만 조금 도와주긴 했어요.”
고개를 끄덕이던 허스키가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키도. 치쿠 족의 족장이란다.”
“전 백운이에요. 희수와 같은 곳에서 일하고 있어요. 혹시나 도움을 드릴 방법이 있을까 같이 오게 됐고요.”
“말만으로도 고맙구나. 일단 날 따라오거라.”
여유로운 걸음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키도를 따라나섰다.
다리가 워낙 긴 터라 키도는 천천히 걷고 있음에도 난 바쁘게 쫓아가야 했다.
“우리 치쿠 족은 이곳에서 오랜 시간을 살아왔단다. 머나먼 옛날엔 종종 인간의 세계에도 드나들었었고.”
“오 제가 만났던 페샨도 마찬가지였어요. 데몬이 나타나고 인간이 페샨을 두려워하면서 그러지 못하게 됐지만요.”
“우리도 마찬가지란다. 어느 날부턴가 데몬이 나타나 인간을 죽이기 시작했고, 그러다 보니 우리 또한 배척을 받게 됐지. 함께 지내던 이들이 필사적으로 우린 다르다고 말해줬지만 인간들은 듣지 않았단다.”
“그렇겠죠. 맨 처음 데몬의 두려움을 봤던 인간들은 제정신이 아니었으니까요.”
키도가 희미한 미소를 그렸다.
친했던 사람들이 치쿠 족으로 인해 입장이 곤란해지는 걸 보며 더 이상 인간 세계로 나가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과거에도 드나들었던 곳이 지금 이어진 몽골인가요?”
“아니. 나도 그곳이 정확히 어디였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저 눈이 많고 빙산이 가득한 곳이었단다. 엄청난 눈보라가 몰아치던 곳이라 거기에 사는 인간들은 항상 두터운 털옷을 입고 있었어.”
“오호…. 이어진 세계가 변하기도 하는군요.”
새로운 사실이구만 하며 턱을 문지르고 있을 때.
약간 앞서가던 키도가 걸음을 멈추었다.
방금까지 지나온 곳과는 달랐다.
따스함과 알록달록함은 온데간데없이 차가운 잿빛만이 존재하는 장소.
잿빛은 마치 치플린을 침범하듯 영역을 넓혀가고 있었다.
“잿빛이 나타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어. 어느 날 갑자기 예고도 없이 나타났지. 잿빛에 삼켜진 곳에선 시도 때도 없이 데몬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조금 더 걸음을 옮겨 잿빛 영역으로 넘어가 보았다.
“허.”
그리고 알게 되었다.
낯설지 않은 기운이었다.
악귀참도를 찾기 위해 넘어갔던 데몬의 세계에서도 같은 기운이 느껴졌었다.
빠져나오며 다시는 마주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왜 그래?”
인상을 찌푸리고 고개를 흔들고 있자.
어느새 다가온 류희수가 물었다.
“알고 있는 기운이거든. 데몬의 땅에 한 번 갔다 온 적이 있는데 그곳이랑 똑같아.”
내 옆으로 왔던 류희수가 본능적으로 몇 걸음 뒷걸음질 쳤다.
숨을 몰아쉬는 걸로 보아 호흡이 쉽지 않은 듯했다.
그러고 보니 난 전보다 훨씬 편하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어봤다.
여전히 찝찝하기 짝이 없지만 지난번과 비교하면 아주 양반이었다.
그땐 조금만 움직여도 호흡이 가빠지고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었는데.
지금은 기분이 나쁘다 정도지 여기서 못 살겠다 수준은 아니었다.
물론 그렇다고 살고 싶다는 건 절대 아니지만 어쨌든.
무기고의 달이 하나 더 떠오르고 왕의 육체를 얻은 덕분인 듯했다.
“황폐하다 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세계였어요. 온통 데몬으로 가득 차 있었고요. 물론 제가 간 곳도 데몬 세계의 일부분이다 보니 일반화할 순 없지만, 아마 대부분 이런 비슷한 느낌이지 않을까 싶어요.”
데몬 놈들은 단순히 땅만 뺏고 있는 게 아니었다.
세계의 성질 자체를 지들이 사는 곳과 비슷하게 오염시키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마도 보통 인간은 호흡조차 힘든 이런 환경이 데몬이 살기에는 아주 최적인 듯했고 말이다.
“넌 편하게 호흡하는구나.”
키도가 신기한 눈으로 날 내려다보았다.
재의 영역으로 넘어오자 키도도 류희수와 마찬가지로 호흡이 거칠어져 있었다.
치쿠 족도 쳐들어오는 놈들이랑 싸우는 게 쉽지 않겠네.
치플린에 피해를 주지 않고 싸우려면 최대한 잿빛 영역에서 싸워야 할 터.
여기에 호흡까지 버거우니 싸움이 어려울 거란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잠시만 여기 계세요. 한 번 둘러보…!?”
재의 영역 안쪽으로 걸음을 내딛는 순간.
치플린으로 묘한 진동이 느껴졌다.
땅만 흔들리는 게 아닌 주위를 감싼 공기가 요동치고 있었다.
“데몬이야.”
익숙한 상황인지 류희수가 몸으로 염력을 둘렀다.
주변에서 뛰놀던 어린 치쿠들은 잿빛 영역에서 멀어지기 위해 몸을 돌렸다.
방금 밀려왔던 진동이 그치고 얼마나 지났을까.
잿빛 영역 몇 군데가 일렁이는가 싶더니 반투명한 소용돌이가 나타났다.
예전에 민쿠가 안내해줬던 동굴이 떠올랐다.
척사율의 검을 사용해야만 데몬의 땅으로 향하는 문이 열렸던 동굴.
눈앞에 나타나는 문은 그때와 비슷한 형상을 띠고 있었다.
“크르르…!”
점점 커지는 소용돌이 너머로 여러 마리의 데몬이 모습을 드러냈다.
놈들도 문이 열리는 게 익숙한지 기다렸다는 듯 치플린으로 넘어오고 있었다.
“키도 님. 소용돌이 너머로 보이는 세계는 항상 똑같았나요? 대강 눈으로 보기에요.”
“배경은 똑같았다. 넘어오는 녀석들도 비슷한 개체가 많았고.”
[앤 보니&메리 리드 - 리볼버]
양손에 리볼버를 쥐고 앞으로 걸어갔다.
그제야 날 발견한 건지 달려올 준비를 하는 데몬들.
[빛의 구원]
놈들이 발을 떼기 전에 탄을 쏟아부었다.
날아드는 탄에 데몬이 괴성을 지르길 잠시.
앞쪽부터 몸이 분쇄된 놈들이 서서히 뒤로 밀려났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소용돌이 건너편을 살폈다.
이전에 동굴을 통해 갔던 곳과 마찬가지로 데몬의 세계였다.
“배, 백운!?”
리볼버로 데몬을 깔끔하게 밀어버린 후 소용돌이 안으로 고개를 쏘옥 내밀었다.
뒤에서 놀란 듯한 류희수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일단 안쪽을 살폈다.
“여기도 더럽게 많네.”
아주 눈이 닿는 모든 곳에 데몬이 수두룩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모든 녀석이 이 문을 인지한 건 아니란 점이었다.
문 근처의 녀석들만이 괴성과 함께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뭔가 이쪽에 특별한 건 없어 보이는데.
적당히 센 녀석도 몇 마리 섞여 있긴 했지만 그래봐야 B나 A급 따리였다.
헤키리스의 따까리였던 포이카처럼 직접 문을 열거나 할 만한 녀석은 보이지 않았다.
“키라아아악!”
침을 줄줄 흘리며 달려오는 데몬에 밀어 넣었던 고개를 빼냈다.
[라 - 불꽃의 문양]
안쪽으로 불꽃을 한차례 내뿜어 주었다.
달려오던 자세 그대로 새카맣게 태워지는 데몬들.
그사이 열렸던 소용돌이가 점점 작아지더니 어느 정도 지나자 완전히 닫히며 모습을 감추었다.
화륵…!
불꽃을 거둬내며 턱을 만지작거렸다.
딱 한 번 본 거라 당장 확신할 순 없겠지만, 뭐랄까.
지금 치플린에 문이 열리고 있는 이유는 데몬이 아닐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이거 이거… 안쪽이 아니라.”
몽골에서 넘어왔던 문 방향을 응시했다.
“바깥쪽부터 살펴봐야겠는데.”
막무가내로 내린 결론은 아니었다.
여러 경험에 의한 합리적 의심이 피어나고 있었다.
몸에 피어났던 불꽃을 완전히 털어낸 후 키도와 류희수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방금 소용돌이 너머로 고개를 내밀었던 거에 놀란 건지 둘 다 벙찐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느새 몰려온 어린 치쿠들도 벙쪄 있긴 마찬가지였다.
첫인상부터 같은 편인데 이상한 녀석으로 찍히기 딱 좋은 순간이었다.
* * *
손을 흔들며 치플린을 빠져나왔다.
다시 도착한 늦은 밤의 몽골.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자 류희수가 입을 열었다.
“데몬 세계와 치플린의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단 거지?”
“응. 증거는 없지만 본능적인 감각이랄까. 데몬이 나타나기 전엔 항상 그 묘한 진동과 울렁임이 찾아온다고 했었잖아. 그게 좀 의심스럽단 말이지. 그거 때문에 원래라면 활성화되지 않았을 문이 열린 게 아닐까 싶어.”
류희수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난 단순히 데몬이 비집고 들어오는 거라 생각했었어.”
“아까 쭉 둘러보는데 뭔가 그런 능력을 가졌을만한 놈은 없더라고. 문이 항상 열려있는 거면 모를까 주기적으로 그런 묘한 진동을 일으킬만한 게 안 보였단 말이지. 케이스가 좀 다르긴 하지만 전에 넘어갈 때도 내 쪽에서 문을 열었거든. 문이 닫힌 후에 놈들은 넘어오지 못했었어.”
“내일 게를레 님한테 부탁해서 몽골에서 주기적으로 무언가 하는 게 있는지 물어볼게. 뭘 해야 치플린에 그런 영향을 끼치는지 모르겠지만.”
“응. 거기서부터 한 번 알아보자고. 치플린과 몽골이 이어진 게 우연이 아닐 수도 있으니까.”
몽골 밤하늘 아래를 걸으며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당장 증거는 없지만 머릿속에선 오는 길에 봤던 불곰국 녀석들이 떠올라 있었다.
누가 봐도 러시아 정부와 관련 있지만 민간 기업으로 위장해 들어온 녀석들.
몽골에서 무언가 일을 벌이고 있는 게 분명했다.
샤샤라는 여자와 이반 등 덩치들을 봤을 때 일반 회사원 같지도 않았고 말이다.
“난 내일부터 잠깐 혼자 다닐게. 러시아 자식들 뒤를 한 번 밟아보려고. 너는 얼굴이 알려져 있으니까 나 혼자 가는 게 나을 거야.”
날 바라보던 류희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말은 안 꺼냈지만 류희수도 그쪽이 의심스러운 모양이었다.
“만약 놈들이 관련 있으면 다시는 허튼 짓 못하도록 아주 자근자근 짓밟아줘야겠어.”
시건방지기 짝이 없었던 샤샤와 덩치들.
놈들의 얼굴에 주먹을 꽂는 즐거운 순간을 상상하며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