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3화. 혹한 속의 소녀
상의랑 터번 괜히 버렸네.
더위를 먹어 너무 섣불리 판단한 모양이었다.
동굴로 들어서기 무섭게 시작된 엄청난 추위.
당당하게 걸어가려 해도 온몸이 절로 떨려 두 팔로 몸을 감쌀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를 혹한의 재앙이라고 불렀던 칼마도 이 추위에 비하면 혹한 주니어라 봐야 했다.
데몬이 괜히 징징거린 게 아니었구만.
끔찍한 열탕 이후의 냉탕이라 기분이 좋을 법도 했지만.
냉탕의 온도가 과해도 너무 과했다.
한 발자국 나아갈수록 빛은 서서히 강해졌지만 덩달아 추위도 거세지고 있었다.
“오.”
덜덜 떨어대며 나아가길 한참.
눈앞으로 커다란 제단이 펼쳐졌다.
정체불명의 천과 각종 바위로 짓눌려 모습이 감춰진 무언가.
보랏빛은 바위틈에서 새어 나오고 있었다.
천천히 걸어가 제단 앞에 멈춰 섰다.
이게 멀리 있던 나한테까지 보였던 건가.
꽤 깊은 동굴이었다.
그럼에도 동굴을 넘어 바깥의 나에게까지 닿았던 빛.
왠지 모르겠지만 바위틈 사이의 무언가는 필사적이었다.
손을 뻗어 천과 바위를 거둬냈다.
감각이 옅어질 정도로 추위의 강도가 강해졌지만 손을 멈추진 않았다.
필사적으로 울부짖고 있으니 조금이라도 빨리 꺼내 주고 싶었다.
툭.
마지막 바위를 쳐내자 빛에 감싸져 있던 게 모습을 드러냈다.
끝도 없이 혹한의 추위를 내뿜고 있는 것의 정체.
그건 파랗게 변해 있는 누군가의 한쪽 팔이었다.
얼굴이 얼어 있어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니었으면 뜻밖의 등장에 기겁하며 소리 질렀을지도 몰랐다.
“팔이라.”
처음 보는 형태의 흔적에 한차례 심호흡하고 손을 뻗었다.
팔로 손이 닿자 순식간에 주변 공간이 새카맣게 변했다.
흔적에 도달했을 때 공간이 변해 가는 과정.
이젠 익숙해졌다고 해도 무방할 만큼 많이 겪어본 것이었다.
“…?”
하지만 이번엔 무언가 달랐다.
보통은 암흑뿐이었던 공간이 흔적에 맞게 변해가기 마련인데.
한 번 암흑으로 물든 공간엔 어떠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뭐야.”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보이는 것도, 들리는 것도, 느껴지는 것도 없었다.
동굴의 추위가 엄청났던 만큼 흔적 속도 분명 엄청 추울 거라 생각해 얼어 죽지 않으려고 라의 불꽃까지 준비해둔 상태였었다.
“신기하네.”
걸을 때마다 발아래로 물결이 일었다.
검은색 물감 위를 걷는 느낌이었다.
“뭐라도 나와야 하는 거 아닌가.”
설마 무기의 흔적인데 이대로 끝나는 건가 머리를 긁적이고 있을 때.
저 멀리로 묘한 형체가 눈에 들어왔다.
암흑의 한가운데서 서늘한 푸른빛을 두른 상태였다.
다가가자 눈에 들어온 건 한 소녀였다.
많아 봐야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생김새.
파란색 머리를 뒤로 아무렇게나 넘긴 소녀는 한쪽 팔이 없었다.
조금 전 내가 닿았던 무기의 흔적이 이 소녀의 팔이었던 모양이다.
사람… 이겠지.
뭔가 이질적인 생김새였다.
온몸엔 묘한 문양이 가득 채워져 있는 건 물론 몸 자체가 푸른색을 띠고 있었다.
아까 봤던 팔은 잘리며 색이 변한 거라 생각했는데 원래의 색인 것 같았다.
소녀는 가만히 앉아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고개를 들고 있으나 눈은 뜨지 않은 상태.
소녀를 살펴보기 위해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
그리고 시작되었다.
말도 안되는 혹한과 함께.
[외로워. 혼자 있고 싶지 않아. 왜 난 혼자인 거지. 어째서 난 홀로 싸워야 하는 거야.]
머리로 목소리가 새어 들어왔다.
목소리 속엔 깊이를 알 수 없는 원망과 사무침, 외로움이 담겨 있었다.
계속해서 속삭이는 듯 중얼거리는 말도 내용이 거의 일맥상통했다.
어떤 상황인지 모르겠지만 소녀는 외로워하고 있었다.
종종 싸움이라는 단어가 들리는 걸 봐선 어딘가에서 전투를 이어가고 있는 모양이었다.
[혼자이고 싶지 않아.]
잠시 후엔 암흑뿐이던 공간으로 푸른색 얼음 가루가 흩어졌다.
얼음 가루는 주변을 가득 채우며 홀로그램처럼 어떤 상황을 재연하기 시작했다.
방금 예상했던 대로 전장의 한복판이었다.
더럽게 많은 수의 데몬 부대.
그 중앙에 소녀가 홀로 서 있었다.
실시간으로 배경이 바뀌며 오랜 시간이 흘렀음을 보여주었다.
그때마다 둘러싼 데몬과 환경이 뒤바뀌었지만 변하지 않는 게 한 가지 있었다.
바로 전장에서 홀로 데몬을 마주하고 있는 소녀였다.
소녀만이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은 채 계속해서 그 자리를 지키는 중이었다.
왜 눈을 감고 있는 거지.
지금도 그렇고 얼음 가루 속에서도 소녀는 눈을 감고 있었다.
실제 전투 장면은 나오지 않는 터라 저 상태로 어떻게 싸우는 건진 알 수 없었다.
단지 눈을 보고 있자니 소녀의 미묘한 변화를 알아챌 수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소녀는 지쳐가는 중이었다.
데몬 방향으로 들려있던 고개도 어느샌가 서서히 숙여지고 있었다.
어딘가 다쳐서가 아니었다.
소녀 스스로가 자신을 내려놓고 있는 것 같았다.
툭.
어느 순간 한쪽 팔을 잃은 채 무릎을 꿇은 소녀.
그런 소녀에게 기다렸다는 듯이 엄청난 수의 데몬이 달려들고.
죽음을 받아들이는 듯하던 소녀가 고개를 들며 감고 있던 눈을 떴다.
“!!!”
그리고 시작된 엄청난 추위.
몸이 굳어 가는 걸 느낌과 동시에 암흑이었던 공간이 흩어졌다.
순식간에 다시 돌아온 동굴.
제단에 있던 소녀의 팔은 작은 얼음 결정으로 변하며 공기 중으로 흩어져버렸다.
드드드득…!
동시에 날 중심으로 주변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동굴 자체에 있던 추위는 사라졌지만 내가 흔적에서 빠져나오며 더 엄청난 혹한을 묻혀 나온 탓이었다.
몸 역시 움직이기 힘들 정도의 혹한에 둔해지는 게 느껴졌다.
[라 - 불꽃의 문양]
빠르게 불꽃을 주변으로 뿜어냈다.
제일 먼저 몸이 녹았고, 다음으로 주위를 감싸던 얼음과 추위가 소멸해 나갔다.
그렇게 뿜어낼 수 있는 최대치의 불을 뿜어내고 라의 불꽃을 해제했다.
“후우…!”
깊은 호흡을 뱉어냈다.
얼음과 불꽃이 모두 사라진 동굴은 다행히 안정을 되찾은 상태였다.
더 이상 춥지도, 덥지도 않게 된 동굴.
고개를 저으며 손을 들어 올렸다.
아직도 남아있는 것 같았다.
순간 느껴졌던 말도 안 되는 한기가 말이다.
손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약간 아찔한 느낌이 들었다.
엄청난 추위를 두른 소녀는 지금까지 만났던 이들과는 많은 게 달랐다.
실제로 만나야 정확하게 알 수 있겠지만 알 수 없는 깊은 심연에 빠져 있는 듯한 느낌.
머리로 흘러들어온 속삭임만 들어봐도 소녀는 몹시 불안정한 상태였다.
“… 뭐 하는 녀석이려나.”
동굴 밖으로 걸어나가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단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위인이나 영웅 중 한 명은 아니었다.
분명 특징이나 여러 가지를 봤을 땐 생소한 존재였다.
“데몬들이 무서워 한 이유가 있구만.”
대충 봐도 소녀한테 죽었을 놈들이 수십 트럭이었다.
동족을 이 정도로 학살했으니 두려워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했다.
동굴을 벗어나자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아까처럼 푹푹 찌거나 하진 않았다.
그저 데몬의 세계 특유의 기분 나쁜 공기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뭐 하는 녀석인지는 몰라도.”
기억으로 들어가기 전 바위 속에서 새어 나오던 필사적인 빛을 떠올렸다.
“끄집어내야겠구만.”
끝이 보이지 않았던 깊은 심연.
그 심연이 얼마나 깊은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얼마나 깊든 손을 잡아 끌어올리면 그만이었다.
* * *
러시아 측의 연구 시설.
모래바람이 이는가 싶더니 건장한 체격의 한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샤샤 님.”
“어서 와요. 츠크라의 사냥개 여러분.”
고개를 꾸벅인 덩치들의 어깨엔 입을 크게 벌린 개 모양의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츠크라의 앞길에 방해되는 요소들을 깔끔히 제거하기 위한 집단.
그 방법이 워낙 잔혹해 러시아의 지하세계에서도 악명이 자자한 팀이었다.
“솔라 님도 와주셨군요. 감사합니다.”
“제 이름 부르지 마시죠. 혹시나 다른 의도가 있을까 불안하니까요.”
사냥개 사이에서 짧은 분홍색 머리를 한 솔라가 걸어 나왔다.
팔짱을 낀 채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솔라.
솔라의 반응에 샤샤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불편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솔라 님. 하지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러시아 1급 헌터에게 능력을 사용할 정도로 전 주제를 모르지 않으니까요.”
“그런가요?”
솔라가 옅게 웃으며 샤샤를 쳐다봤다.
언제 봐도 기분 나쁜 여자였다.
수틀리면 1급 헌터가 아니고 대통령한테도 능력을 걸 인간이었다.
그런 위험성 때문에 러시아 본토가 아닌 이런 외지 실험실을 돌게 하는 중이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왜 저까지 부른 거죠? 웬만해선 정부와의 연관성을 숨겨야 할 텐데요.”
솔라가 얼굴을 가리던 두건을 끌어 내렸다.
각종 매체로 얼굴이 많이 알려진 터라 웬만해선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오고 싶진 않았었다.
1급이 무조건 필요하다는 츠크라의 강력한 요청이 아니었다면 움직이지 않았을 터였다.
“저쪽에도 1급이 한 명 있어서요.”
“뭐라고요?”
“대한민국 1급 헌터 류희수. 당장 그녀와 싸우는 게 확정된 상황은 아닙니다. 다만 상황이 묘하게 흘러갔을 때 류희수를 상대할 수 있는 전력이 필요해서요.”
“류희수라면 그 짜리몽땅한 헌터군요. 염력 좀 강하다고 1급까지 단숨에 기어 올라간.”
“맞아요. 딱히 외부 노출이 많지도 않아서 여러모로 능력이 1급 수준인지 의심되는 인원이긴 하죠. 그렇다 하더라도 1급.”
샤샤가 주변 인원을 훑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저희만 있다가 류희수와 싸우게 되면 금세 뭉개질지도 모르니까요.”
“어울리지 않게 약한 소리를 하네요. 샤샤. 어쨌든 알겠어요. 작전은 언제 시작이죠?”
“솔라 님만 괜찮으시다면 지금 바로도 가능합니다.”
고개를 끄덕인 솔라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샤샤와 동일 선상에 섰지만 더 가까이 다가가진 않았다.
그곳부턴 샤샤의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그럼 바로 시작하죠. 이런 아무것도 없는 나라에선 오래 있고 싶지 않거든요.”
“알겠습니다.”
샤샤가 손짓하자 대기 중이던 인원들이 각자의 위치로 섰다.
문이 열릴 폭발지엔 평소보다 훨씬 많은 양의 미사일과 폭발물이 배치되어 있었다.
어제까지의 테스트로 향해야 하는 좌표는 파악해둔 상황.
상대로 누가 오든 박살 낼 전력도 갖추어졌으니 이제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시작해요.”
신호와 함께 공간의 온도가 올라갔다.
마찬가지로 미사일을 감싼 쇠가 새빨갛게 달아오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커다란 연쇄 폭발이 시작되었다.
“와우.”
화려한 광경을 솔라와 츠크라의 사냥개들이 감탄하며 지켜봤다.
그렇게 끊임없이 폭발하던 섬광이 잦아들어 갈 때쯤.
공간의 중앙으로 거대한 균열이 생겨났다.
숨 막히는 공기가 아닌, 알록달록한 빛이 새어 나오는 세계로 향하는 균열.
계산대로 열린 균열을 바라보며 샤샤가 얼굴 한가득 미소를 그렸다.
“그럼 가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