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4화. 치플린으로 가는 길
“어렵구만. 어려워.”
처음 데몬의 세계로 들어왔던 위치.
그곳에서 한참을 둘러봤지만 딱히 나갈만한 틈은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꽤 지난 만큼 내가 들어왔던 균열도 닫혀버렸고 말이다.
팔짱을 끼고 턱을 문질렀다.
애써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이건 아무래도.
“나 갇힌 건가.”
뒤늦은 깨달음에 등 뒤로 땀이 흘러내렸다.
폭발이 일어나고 기지에서 튕겨 나온 후에도 한동안은 작은 균열이 일렁거렸었다.
아마 악귀참도로 그곳을 그었다면 나왔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 터.
다만 하늘로 떠올랐을 때 흔적을 발견해 균열이고 나발이고 일단 빛의 근원지로 냅다 달려갔었다.
“흐음. 선택에 따른 대가구만. 아주 정당해. 덕분에 새로운 무기에 대한 단서도 얻었으니까.”
애써 합리화하며 고개를 끄덕여봤지만 효과가 그리 오래가진 않았다.
어쨌든 몽골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현실은 여전히 유효했기 때문이다.
“크륵…!”
등 뒤에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어쩐지 한동안 조용하다 싶더라니.
내가 못 나가는 걸 알자 고새를 못 참고 튀어나온 것이었다.
고개를 돌리니 대충 세봐도 백은 넘어 보이는 놈들이 어기적어기적 걸어오고 있었다.
한동안 굶기라도 한 건지 입에선 침까지 뚝뚝 흘리는 중이었다.
“나 맛없는데.”
차라리 혼자 살면 혼자 살았지 저런 놈들과 같이 지내는 건 사절이었다.
꺼내놓은 면도칼을 빙글빙글 돌리며 기지에서 이곳으로 넘어오던 과정을 떠올렸다.
러시아 놈들은 미세하지만 계속해서 위치를 옮겨가며 큰 폭발을 일으켰었다.
그때마다 다른 곳으로 이어지는 균열이 생겨났었고 말이다.
“반대에서도 되려나.”
모든 장소에서 되는 건 아닐 터였다.
문이 열릴 수 있는 조건을 갖춘 특정 장소와 좌표에서만 가능한 일일 터.
어쨌든 한 번 시도는 해볼 셈이었다.
반대쪽에서 다시 열어줄 때까지 기다리는 건 너무 하염없는 기다림일 테니까.
저벅.
어기적 걸어오는 놈들 쪽으로 발을 내디뎠다.
뭔가 미사일처럼 커다란 폭발을 일으킬 만한 무기는 없지만 그걸 뛰어넘는 에너지를 일으킬만한 건 몇 개 떠오르는 게 있었기에.
무기의 쿨타임도 기다릴 겸 일단 방해하는 놈들부터 처리하면 딱일 것 같았다.
“그렇게 기어 와서 어느 세월에 올래.”
자세를 낮추며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잠정적인 위험인 데몬 새끼들.
언제 문이 이어져 넘어올지 모르는 만큼 나가기 전까지 최대한 줄여 놓을 생각이었다.
* * *
“결국….”
말끝을 흐린 류희수가 정면을 응시했다.
서서히 크기를 키워가는 정체불명의 균열.
균열 사이에선 사람의 실루엣이 점점 진해지고 있었다.
우려하던 일이 발생하고 만 것이었다.
“키도 님. 모두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가세요.”
“나도 함께 싸우마. 치플린을 지키는 일이니.”
“아니에요. 제가 위기에 처했을 때 도와주셔도 늦지 않아요.”
고개를 저은 류희수가 키도를 바라봤다.
키도 역시 적지 않은 싸움을 해온 치쿠 족의 족장이었다.
웬만한 데몬에게 당하지 않을 정도로 강한 힘을 가지고 있기도 했고 말이다.
하지만 인간을 상대하는 건 다른 이야기였다.
저들은 전투에 특화된 부대로 이루어져 있을 가능성이 컸다.
키도가 주요 표적이 되는 순간 각종 개방 능력에 화력까지 쏟아져 회복하지 못할 상처를 입고 말 터였다.
“알겠다. 일단 아이들을 대피시키고 오마. 조심하거라.”
몸을 돌린 키도가 치쿠 족을 이끌고 멀어지는 사이.
류희수는 반대편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치플린과 최대한 멀어지기 위해서였다.
염력을 끌어올리자 양손으로 희미한 보랏빛이 떠올랐다.
당장 공격할 생각은 없었다.
말이 통하는 만큼 최소한의 대화는 시도해 볼 생각이었다.
잠시 후 이전보다 커다랗게 열린 균열에서 익숙한 얼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 저놈들인가.’
백운이 예상한대로였다.
처음 보는 얼굴도 많이 섞여 있었지만 모두 러시아 측 인원이었다.
“어라.”
맨 앞에 서 있던 샤샤도 류희수를 발견하곤 미소를 지었다.
“이게 누구신가요! 대한민국 1급 헌터 류희수 님 아니세요? 저번에 만났었죠?”
샤샤가 과장된 몸짓으로 팔을 벌렸다.
예상보다 빠른 만남에 조금 놀라긴 했지만 예상 안이라는 듯한 말투였다.
“츠크라의 샤샤 님… 맞죠?”
“영광이네요. 제 이름까지 기억해주시고.”
“여긴 어쩐 일이신지요.”
“그건 제 쪽에서 묻고 싶네요. 어떻게 여길 들어와 계셨을까. 안 그래도 바쁜 1급 헌터께서.”
“아쉽지만 말씀드릴 수는 없네요. 기밀사항이라서요.”
“어머, 의외네요. 저희도 그렇거든요. 그럼 피차 설명은 못 하는 입장인 거 같고.”
한 발자국 나아간 샤샤가 치플린을 둘러봤다.
“저희는 이곳을 좀 조사해야 할 거 같은데. 괜찮을까요?”
“죄송하지만 여긴 대한민국 작전 지역이라서요. 그건 힘들 거 같네요.”
“풉.”
뒤에서 들리는 헛웃음에 류희수가 고개를 돌렸다.
그제야 쓰고 있던 모자를 벗는 러시아의 1급 헌터 솔라.
‘…!?’
솔라의 등장에 류희수가 미간을 찌푸렸다.
러시아 정부가 연관되었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대놓고 1급 헌터라니.
이건 예상치 못한 등장이었다.
“코딱지만한 나라의 1급 나부랭이가 주제도 모르고.”
솔라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UN이나 다른 강대국에 빌붙어 평화를 유지하는 주제에 너무 당당한 거 아니야?”
“1급 헌턴데 말조심하는 법을 모르는구나.”
노골적인 솔라에 류희수도 존댓말을 멈추고 눈을 가늘게 떴다.
가소롭다는 듯 피식 웃음을 터뜨린 솔라가 말을 이었다.
“다른 놈들 아니었으면 너넨 진즉에 사라졌어. 전쟁나면 하루도 못 버틸 놈들이 건방지게.”
점점 더 열을 올리는 솔라에 지켜보고 있던 샤샤가 어깨를 으쓱였다.
“솔라 님을 화나게 했으니 이젠 저도 모르겠네요. 어쨌든 이쯤 됐으니 희수 님도 아시겠죠? 대화는 여기까지란 거.”
샤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솔라가 팔을 들어 올렸다.
주변으로 서서히 모여드는 정체불명의 바람.
어느 정도 크기가 모이자 보이지 않는 바람이 류희수에게 쏘아졌다.
동시에 류희수도 손을 휘두르며 염력을 뿌려냈다.
콰앙!
허공에서 부딪힌 두 종류의 힘이 서로를 상쇄시키며 커다란 파열음을 만들어냈다.
‘대인 전투에 특화된 1급 헌터.’
계속해서 쏘아지는 솔라의 바람에 류희수가 자리를 옮겨가며 방어를 해냈다.
바람을 압축시켜 터뜨리거나 뿌려내는 것.
공식적으로 알려진 솔라의 개방 능력이었다.
이렇듯 각국 대부분의 1급 헌터의 정보는 비공식적으로 수집되기 마련이었는데 이중에서도 러시아의 솔라는 요주의 인물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날파리처럼 잘도 피해대는구나!”
싸움이 길어질수록, 상대가 쉽게 죽지 않을수록 점점 더 흥분하며 눈이 돌아가는 솔라.
어느 시점에 달하면 솔라는 더 이상 주변에 누가 있는지 개의치 않고 능력을 뿌려댔었다.
덕분에 솔라가 투입된 전장에선 수많은 민간인과 아군 피해가 속출하기 마련이었다.
그럼에도 러시아는 국가에 큰 전력이 되는 솔라를 내치지 않고 사건을 덮으며 보호해 왔고 말이다.
콰아앙!
옆에서 가루가 되는 바위에 류희수가 염력을 손 형태로 만들어 솔라에게 뿜어냈다.
“그렇게 느려 빠져가지고 누가 맞겠어!?”
바람을 두른 솔라가 뒤로 이동하자.
“!?”
대기 중이던 수십 개의 화기가 류희수를 향해 쏘아졌다.
기관총은 기본으로 각종 소형 미사일 및 자주포까지.
무슨 전쟁이라도 나가는 것처럼 제대로 준비를 하고 온 샤샤였다.
‘끝까지 갈 생각이구나.’
샤샤는 적당히 하고 갈 생각이 아니었다.
솔라와 샤샤가 함께 있는 걸 본 류희수를 어떻게든 여기서 지우고 가려는 것이었다.
한손으로 화기를 막아내던 류희수가 다른 손으로 염력을 끌어올려 샤샤에게 쏘아냈다.
“끄아…!”
우두둑 소리를 내며 뭉개지는 화기와 몇몇의 인원들.
샤샤를 제외한 나머지는 솔라의 보호 대상이 아닌 모양이었다.
바람을 씌워 샤샤만을 지켜낸 솔라.
뒤로 물러나라는 솔라의 손짓에 샤샤를 포함한 병대가 조금씩 거리를 벌렸다.
“이쯤이면 안 닿지? 네 염력.”
류희수가 난처한 미소를 그렸다.
몇 번 주고받지 않은 공격에서 류희수의 사거리까지 파악을 마친 솔라.
확실히 전투 경험은 류희수보다 솔라 쪽이 한 수 위였다.
다만 그런 경험과는 별개로.
“건방 떨 시간에 네 다리나 잘 간수하지.”
개방 능력 자체의 강함이나 활용은 류희수가 솔라를 능가하고 있었다.
“…!?”
우드득!
“꺄아아아아아악!!”
솔라가 샤샤를 지키기 위해 한눈판 사이.
아슬아슬하게 최대 범위에 도달한 염력이 솔라의 다리 하나를 낚아챘고.
지금 그 다리가 염력에 짓눌려 뭉개지고 말았다.
“끄으으… 이런 건방진 년이!!”
비명을 지른 솔라가 미친 듯이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쉴 새 없이 염력과 부딪히며 사방으로 흩어지는 솔라의 바람.
바람은 처음보다 훨씬 강력해져 거센 태풍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이번 공격이 끝나면 들어간다.’
바람을 쳐내며 류희수가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겹겹이 쌓이는 공격에 시야는 제한됐지만 이건 오히려 기회였다.
접근해 적들을 사정거리에 두고 한 번에 끝낼 생각이었다.
‘끝났다.’
솔라의 공격이 그치며 류희수가 마무리를 위해 힘을 끌어올린 순간.
트인 시야로 바로 앞까지 다가온 샤샤의 모습이 보였다.
“바람을 이용해 거리를 좁히려 한 건 그쪽만이 아니랍니다. 류희수.”
“…!?”
찰나의 순간이었다.
샤샤의 입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류희수의 몸이 말을 안 듣기 시작했다.
뿌리칠 수 없는 정체불명의 힘.
샤샤의 입꼬리가 찢어져라 벌려졌다.
“1급 헌터라니. 훌륭한 꼭두각시를 얻었네요.”
“이게 무슨….”
“몸 돌리시고.”
저항하려 애써봤지만 소용없었다.
샤샤가 시키는 대로 류희수의 몸이 치플린으로 향했다.
“샤샤 님. 저쪽에서 많은 열 반응이 느껴집니다. 어떻게 할까요?”
“일단 숫자 좀 줄이자고요. 한두 마리만 있어도 충분하니까요.”
“알겠습니다.”
수많은 화기가 키도와 어린 치쿠들이 숨어있는 곳으로 향했다.
위험을 감지한 키도가 달려 나왔지만.
“짓눌러.”
쿵!!
류희수의 염력이 그런 키도를 땅으로 처박아버렸다.
“아….”
류희수가 작은 탄성을 내뱉었다.
믿기지 않는 상황이었다.
이렇게 무기력하다니.
짓눌린 채 류희수를 바라보는 키도의 눈망울이 보였다.
류희수를 원망하거나 하는 눈빛은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힘으론 어쩌지 못하는 이 상황에 절망하는 눈이었다.
“쏘세요.”
샤샤의 말과 함께 수많은 탄과 미사일이 어린 치쿠들을 향해 쏘아졌다.
허공을 가르며 날아가는 러시아의 최대 화력.
화풀이를 하려는 건지 솔라의 거대한 바람도 더해진 상태였다.
“안… 돼….”
속절없이 날아가는 공격에 류희수의 눈동자가 커졌다.
이제 곧 감당하기 힘든 끔찍한 상황이 눈앞으로 펼쳐질 터였다.
드득.
“…?”
그 찰나의 순간.
날아가는 중인 공격 사이로 균열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곳에서.
콰아아아아아아!!
불꽃이 쏟아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