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5화. 꼭두각시가 되다
류희수가 멍하니 정면을 응시했다.
균열에서 나온 불은 아무렇게나 뿜어지는 게 아니었다.
균열을 시작점으로 선을 그으며 만들어진 거대한 불의 장벽.
허공을 가르던 러시아의 공격이 불꽃에 닿기 무섭게 모두 소멸해버렸다.
“뭐, 뭐야!? 저건!!”
쭉 평정을 유지하던 샤샤의 얼굴이 굳어졌다.
얼굴에선 숨길 수 없는 당혹감이 짙게 묻어나오고 있었다.
1급 헌터 솔라와 러시아 병력도 마찬가지였다.
뜬금없이 문이 열리더니 뿜어진 불꽃이라니.
꽤 먼 거리임에도 여지없이 느껴지는 열기가 대신 말해주고 있었다.
저 불꽃에 닿는 순간 모든 게 재가 되어버리고 말 것이란 걸 말이다.
“데, 데몬 아닐까요?”
“가능성이 있습니다. 지금 열린 균열은 데몬이 사는 세계일 겁니다!”
아직 모습을 드러낸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의 마음 속으론 정체불명의 공포가 피어나고 있었다.
러시아의 1급 헌터 등 츠크라의 사냥개라 불리는 전투 병력까지 모였지만.
저런 불꽃을 뿜어내는 데몬이 상대라면 이야기는 달라졌다.
당장 후퇴하는 게 현명한 선택이었다.
‘이런 젠장….’
샤샤가 입술을 깨물며 불기둥을 바라봤다.
실험을 시작할 때부터 어느 정도 염두에 두긴 했었다.
열린 균열에서 엄한 게 튀어나올 가능성을 말이다.
다만 그렇다 하더라도 별 상관은 없다고 여겼었다.
어차피 이곳은 러시아가 아닌 몽골이었다.
뭐가 나오든 실험 중인 자신들만 철수하면 끝날 일이었다.
‘물러나야 하나.’
샤샤가 갈등하며 정면의 치플린과 등 뒤의 균열을 번갈아 봤다.
앞으로 계속 나아가던가 원래 있던 기지로 돌아가던가 선택이 필요했다.
“뭔가 나옵니다!”
“!!”
관측 중이던 인원의 외침에 모두의 시선이 새롭게 열린 균열로 향했다.
“크기는?!”
“불꽃의 열 때문에 정확하진 않으나…. 크진 않습니다! 사람과 비슷한 크기입니다!”
모든 인원이 마른침을 삼켰다.
뭐가 됐든 저런 힘을 뿜어내는 데몬이라면 지금 도망치기엔 늦은 시점이었다.
자신들을 인지하기 전에 공격을 쏟아부어야 했다.
“전원 최대 화력 준비!”
“예… 예!”
“이런 샹…!”
이번엔 솔라도 별 반발 없이 최대로 힘을 끌어모았다.
경험이 많은 만큼 본능이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게 뭐든 튀어나오는 순간 재앙이 펼쳐질 거란 사실을 말이다.
“지금입니다! 나옵니다!”
“퍼부어!”
외침과 함께 균열 앞으로 모든 화력이 쏟아졌다.
주변 지형이 뒤바뀔 정도의 엄청난 공격.
한참 공격을 쏟아붓던 샤샤가 손을 들어 올렸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균열 방향을 살피길 잠시.
뒤덮인 먼지 사이로 서늘한 푸른빛이 반짝였다.
그리고 그 사이로.
“러시아 전부가 그렇진 않겠지만.”
“!?”
“항상 초면엔 싸가지가 없네.”
목소리가 들려왔다.
* * *
되긴 되네.
밖으로 나오며 목과 어깨를 한 바퀴 돌려주었다.
내가 나왔던 지점에 응축시킨 불꽃을 한 방에 터뜨렸었다.
그러자 아주 작게 일렁이는 균열이 생겨났었고 말이다.
그걸 그대로 악귀참도로 갈라버린 뒤 걸어 나왔다.
딱 맞춰 왔구만.
시야가 트이기 무섭게 눈앞 허공으로 수많은 공격 세례가 날아들었었다.
뭔진 모르겠지만 치플린으로 날아가는 거 같아 일단 막고 보자는 심정으로 불꽃으로 선을 그었다.
“누구냐!!”
저 병신 저거.
한심함에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지네가 먼저 공격을 퍼부어 놓고 누구냐니.
지금 내 얼굴을 못 보는 것도 저놈들의 공격이 만든 후폭풍과 먼지 때문이었다.
조금 기다리자 시야를 가리던 먼지가 사라지며 앞에 서 있는 이들의 모습이 드러났다.
얼레.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류희수였다.
어째선지 류희수의 염력은 치플린 쪽을 향하고 있었다.
방향 헷갈린 건가.
묘한 상황이 당황스럽긴 했지만 어쨌든 불기둥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균열이 언제 사라질지 모르니 일단 멀리 떨어지려는 심산이었다.
“누구냐고 물었잖아! 이 새끼야!!”
“저 저 미친년 저거 초면에 악쓰는 거 봐라.”
“뭐…!?”
아무리 봐도 처음 본 사이인데 내게 악을 써대는 여자를 바라봤다.
순식간에 쌍욕이 박혀서인지 약간 벙찐 표정이었다.
여자를 포함해 일제히 벙쪄 있는 놈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대한민국 1급 헌터 무기왕이다. 이 새끼야.”
“!!!”
순간 찾아온 정적에 일단 불꽃을 거둬냈다.
뒤쪽엔 키도가, 앞쪽엔 류희수가 있는 이상 시원하게 불꽃을 뿌려내기도 힘든 환경이었다.
“무, 무기왕이 어째서 여기에…!”
“샤샤. 우리 초면 아니잖아.”
“!?”
그제야 눈치챈 건지 샤샤의 눈이 커졌다.
“터번…!?”
“맞아. 네가 미사일로 날려버린 그 터번. 가루가 됐을 거라 생각했지? 그런데 어쩌냐. 기스도 안 났는데.”
말을 건네며 러시아 놈들 쪽으로 걸어갔다.
놈들의 얼굴에서 당혹감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이젠 확연한 공포만이 자리 잡고 있을 뿐이었다.
“가까이 오면 안…!”
무언가 말하려던 류희수가 입을 다물었다.
정확히는 누군가에 의해 다물어진 듯 했다.
말하려고 애쓰는 중인데도 목소리가 안 나오고 있었다.
키도 님은 류희수의 염력에 당한 거 같고.
대충 상황을 보니 저쪽에 상대를 조종하는 능력자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게 누군지를 따져봤을 때 처음에 악을 쓰던 여자는 제외였다.
내가 나오는 순간 쏟아졌던 바람이 저 여자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럼 샤샤인가.
샤샤와 류희수 사이를 살펴보았다.
몸과 몸을 잇는 무언가가 있을까 싶어 본 건데 딱히 그런 건 없어 보였다.
눈이 마주친 상대에게 능력을 거는 대산의 최리아와 비슷한 계열인 듯했다.
스아아아…!
내가 다가가는 게 영 안 내키는지 머리 위로 류희수의 염력이 쏟아졌다.
“갈기갈기 찢어져라!!”
옆에선 날카로운 바람이 쏘아졌다.
순식간에 사방에서 조여오긴 했지만 상관없었다.
안 맞으면 그만이었다.
[도윤 - 비전 수리검]
수리검을 쓰러져 있는 여자에게 던져냈다.
“솔라 님! 놈은 수리검으로 순간이동이 가능합니다!”
요즘엔 러시아든 어디든 가릴 것 없이 나에 관해 열심히 조사하는 것 같았다.
샤샤의 외침에 솔라라고 불린 녀석이 수리검 쪽으로 바람을 쏘아냈다.
“접근하지 못하게 하면 그만…!?”
“너 한 번에 바람 하나씩 밖에 못 쏘는구나.”
입에 문 면도칼을 손으로 옮기며.
빠르게 솔라 옆으로 접근했다.
“어리석은!”
바람을 몸으로 응축시키나 싶더니 순식간에 터뜨려내는 솔라.
내게 쏟아지는 바람에 수리검 쪽으로 몸을 옮겼다.
그리고 다시 한번 수리검을 솔라 쪽으로 던져냈다.
몸은 수리검과 일직선 상에 두고 달려갔다.
“조금 더 창의적인 방법은 없는 거냐!”
솔라가 다시 한번 몸으로 바람을 모았다.
나와 수리검을 동시에 튕겨낼 심산이었다.
“아니 방금 한 번 보고 나니까.”
아까와 똑같이 바람이 쏘아져 왔다.
하지만 이번엔 피하지 않았다.
“이길만 하겠더라고.”
수리검으로 손을 뻗어 정면으로 솔라의 바람과 힘겨루기를 시작했다.
드드드드득!!
“무식한 새끼….! 그대로 찢어져라!”
저주가 쏟아졌지만 그러든가 말든가.
수리검으로 힘을 집중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내가 찢어지거나 날아가긴커녕 가까워지자 당황하는 솔라.
솔라가 점점 더 바람을 더하는 사이 뒤에서 공격이 쏟아졌다.
“뒤 조심하는 게 좋을 텐데!!”
“내가 더 빠를걸.”
“!?”
파앙!!
수리검으로 바람을 찢어내며.
다른 손으로 솔라의 목을 붙잡고 방향을 바꿨다.
“인간 방패.”
콰가가각!
“끄아…!”
등으로 쏟아진 공격에 솔라의 입에서 피가 솟구쳤다.
“동료애 없는 놈들이네. 같은 편을 이렇게 공격하고.”
으득!
목을 비틀어 솔라의 숨을 끊어내고 몸을 일으켰다.
“소, 솔라 님이…!”
믿던 전력의 이탈 때문인지 이젠 눈에 띄게 벌벌 떨어대고 있는 러시아 병력들.
“가, 가까이 오지 마라! 네놈 동료의 머리를 날려버리기 전….”
[아이작 뉴턴 - 데모닉]
[그라비티 디바이스]
쿵!!
놈들의 총구는 류희수에게 겨눠지지 못했다.
“끄아아아아!”
“뼈, 뼈가…!!”
그대로 땅에 처박힌 놈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땅으로 점점 깊게 박혀가며 뼈 부서지는 소리가 공간을 채워나갔다.
“이야 넌 질기다 참.”
그중 샤샤만이 류희수의 염력을 두른 채 어떻게든 버텨내고 있었다.
[앤 보니&메리 리드 - 리볼버]
중력을 유지한 채로 리볼버를 쥐고 샤샤에게 걸어갔다.
내 중력을 막아내고 있어서인지 샤샤는 류희수의 염력으로 날 공격해오거나 하진 않았다.
그대로 떨리는 눈동자로 날 바라보는 샤샤의 앞에 다다른 순간.
“백운.”
“응?”
샤샤가 내가 밝힌 적 없는 이름을 되뇌었다.
* * *
“하…!”
바로 앞까지 다가와 걸음을 멈춘 백운에 샤샤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자신을 짓누르던 중력도 어느샌가 멈춘 뒤였다.
상대의 본명을 알면 조종할 수 있는 능력.
일정 범위에 함께 있어야 한다는 조건이 있지만 위험한 능력으로 분류되어 본국인 러시아에서도 요주의 인물로 등록된 샤샤였다.
“어리석구나! 네 동료가 어떻게 된지 뻔히 봤으면서도 조심성 없이!”
백운이 다가오기 전.
샤샤는 류희수에게 물었었다.
앞에 있는 남자의 이름을 말하라고 말이다.
그렇게 알아낸 이름으로 백운이 범위에 들어올 때까지 잔뜩 겁먹은 척하며 기다렸다.
“항상 압도적인 힘으로 이겨왔으니 오늘도 그렇게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겠지!”
샤샤가 입가로 조소를 머금었다.
강한 자들의 공통점이었다.
자신은 죽지 않을 것처럼, 무슨 일이 있어도 전처럼 이길 거란 착각.
백운도 마찬가지였기에 능력을 알 수 없는 자신에게 아무런 대책 없이 접근한 것이었다.
“총으로 네 머리를 겨눠라!”
백운이 들고 있던 리볼버로 자신의 머리를 겨누었다.
그 모습을 보며 류희수가 필사적으로 소리 지르려 했지만 여전히 샤샤의 범위 안이라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몸 안쪽부터 솟아오르기 시작한 흥분에 샤샤의 얼굴이 붉게 변했다.
‘내 손으로 무기왕을 죽이다니…!’
무기왕은 러시아의 잠재적인 위험 요소였었다.
그런 무기왕을 죽인다면 새로운 세계고 뭐고 러시아에서 쌍수를 들고 샤샤를 맞이할 터였다.
“방아쇠를 당겨라!”
의기양양한 샤샤의 명령이 떨어졌다.
“…?”
하지만 백운은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다.
대신 여유로운 얼굴로 샤샤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네 능력이 절대적인 줄 알았지?”
“무, 무슨…. 방아쇠를 당기라고! 당장!”
“그만해. 추하니까. 내가 아무 생각 없이 다가왔다고 생각해?”
잔뜩 겁먹은 샤샤에게 걸어온 백운이 총구를 겨누었다.
“아…!”
이마에 닿은 쇠의 서늘함에 샤샤가 마른침을 삼켰다.
“네가 무슨 능력을 가졌든. 나한텐 통하지 않을 걸 알아서 그냥 온 거야.”
“자, 잠깐. 잠깐만 기다….”
방아쇠가 끼릭거리며 당겨지려 하자 샤샤가 급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 백운은 의미 없는 말을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잘 가.”
망설임 없이 방아쇠가 당겨지고.
서늘한 탄의 발사 소리가 공간으로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