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6화. 마무리
“괜찮아?”
주저앉은 류희수에게 다가갔다.
샤샤가 죽으며 능력에선 벗어났지만 몸에 남아있던 힘도 바닥이 난 모양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류희수가 멍한 눈으로 날 올려다봤다.
“어떻게… 안 통한 거야?”
“글쎄.”
어깨를 으쓱이며 류희수를 부축했다.
“그냥 이런 거 통한 적이 한 번도 없거든.”
이유야 짐작이 가지만 이야기하기엔 너무 길었다.
일반적인 개방에 익숙한 류희수에게 카이안이란 존재부터 그 과정까지 하나같이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일 테고 말이다.
“낑!”
앞으론 몸을 앉힌 키도 주변으로 어린 치쿠들이 와있었다.
댕댕이처럼 낑낑대며 키도의 몸을 핥는 치쿠들.
다행히 키도도 크게 다친 거 같진 않았다.
“죄송해요. 키도 님. 제가 방심한 탓에….”
키도에게 다가간 류희수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 류희수를 보며 미소를 그리는 키도.
“네 의지가 아니란 것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우릴 지켜주기 위해 싸우다 그런 것이니 마음에 두지 않아도 된다.”
키도의 말에 동의하는 듯 어린 치쿠들도 류희수 주변을 빙글빙글 돌아댔다.
훈훈하구만.
마음이 간질간질거리는 따듯한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조금 전 열린 문에선 데몬이 나타나지 않았구나.”
키도가 아까 내가 나온 방향을 응시했다.
평소엔 끝도 없이 데몬이 쏟아져 나오던 문인데 이번엔 그러지 않자 의아한 것이었다.
“이제 그쪽 문은 열려도 웬만해선 안 나올 거예요.”
넓게 이어진 만큼 또 다른 놈들이 유입될 수도 있겠지만.
일단 눈이 닿는 곳에 있는 놈들은 모조리 쓸어버리고 왔었다.
“응?”
열심히 끌어당기는 어린 치쿠들에 류희수가 고개를 돌렸다.
“어…?”
류희수의 묘한 탄성에 시선을 따라갔다.
치플린에서 잿빛으로 물들어 있던 곳이었다.
“뭐야. 되돌아오기도 하는 거였어?”
꽃과 나무를 시들게 하고 공기마저 뒤바꿔 놓았던 잿빛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마치 세상이 잃어버렸던 색을 되찾아 가는 느낌이었다.
나를 포함한 키도와 류희수가 멍하니 바라보는 사이.
어린 치쿠들이 되돌아온 공간으로 돌아가 방방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숨이 차 잠시도 머무르기 힘들었던 잿빛 공간.
저렇게 뛰어다닐 수 있는 걸 보니 공기까지 되돌아온 모양이었다.
역시 만악의 근원이구만.
지금 일어나는 현상의 원인을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내가 한 거라곤 연결됐던 곳의 데몬을 쓸어버린 것 밖에 없었으니까.
단지 잿빛으로 물들었던 게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건 몹시 희망적인 부분이었다.
방법이야 어쨌든 후속 조치로도 되살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아 맞다.”
멍하니 바라보던 걸 멈추고 몸을 일으켰다.
“어디 가게?”
“저기 좀 갔다 오게.”
손을 들어 샤샤와 러시아 병력이 넘어왔던 곳을 가리켰다.
얼마나 크게 열어놓은 건지 균열은 아직도 닫히지 않고 있었다.
지들이 넘어갈 거만 생각하고 반대로 누가 올 건 고려하지 않은 듯했다.
“저번에 쫓아가다 놓쳐서 어디에 있는지 모르거든. 갈 수 있을 때 가서 없애놔야지. 그럼 조금 이따 보자고.”
손을 휘적휘적 흔들며 조금씩 작아지는 균열로 걸어갔다.
* * *
‘이런 젠장…!’
이반이 허겁지겁 연구실의 자료를 챙겼다.
무리의 끄트머리에 있다 상황이 묘하게 흘러가는 듯하여 미리 발을 뺐던 이반.
연구실에서 살핀 상황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그 자식이 무기왕이었을 줄은…!’
온 몸으로 소름이 돋았다.
잔챙이 새끼라 생각해 시비 걸었던 놈이 세계에 이름을 떨치고 있는 괴물이었던 것이다.
애초에 팔 한쪽만 부러진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 판이었다.
“자료 다 챙겼다! 준비해!”
“안쪽으로 간 샤샤 님과 솔라 님은….?”
“야이 새끼야! 아까 못 봤어! 다 죽었잖아!”
“그런데 이렇게 급할 필요 있습니까? 어차피 이곳으로 향하는 입구는 없는데요.”
다급한 이반에 남자가 고개를 들어 거의 닫힌 균열을 바라봤다.
저것만 사라진다면 현재 위치한 연구 시설은 안전했다.
애초에 여기로 들어올 수 있는 입구란 게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그렇긴 하네.”
남자의 말에 이반도 한숨을 내쉬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애초에 사막에서 연구소까지 오는 건 전적으로 눈앞의 남자가 가진 능력이었다.
모래를 사용한 단거리 워프 능력.
러시아의 연구 시설을 아무도 침입할 수 없는 밀실 공간으로 만든 능력이었다.
“그럼 밤까지 기다렸다가 자료 다 챙겨서….”
콰앙!!
“!?”
갑자기 들린 굉음에 이반과 인원들의 시선이 균열로 쏠렸다.
닫혔다고 생각할 정도로 좁아졌었던 균열.
그 사이로 수리검 하나가 날아 들어와 있었다.
“뭐, 뭐야!?”
소리 지르는 남자와 달리 이반의 얼굴은 허옇게 질려 있었다.
무기왕에 대한 분석을 본 사람이라면 모를 수 없는 무기였다.
“도, 도망가야 돼….!”
이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수리검이 황금색 빛으로 둘러싸였다.
그리고 잠시 후.
수리검이 있던 자리로 끔찍한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 * *
“이건 갑자기 확 닫히고 난리야. 깜짝 놀랐네.”
손을 털며 완전히 닫힌 균열을 돌아봤다.
넉넉한 크기에 여유롭게 걸어가던 중이었는데.
뜬금없이 빠른 속도로 균열이 작아졌었다.
깜짝 놀라 호다닥 수리검부터 집어던졌고 말이다.
“어쨌든 들어왔네. 오 이반이네.”
식은땀을 줄줄 흘리는 인원 중엔 낯익은 깁스쟁이가 있었다.
이것저것 잔뜩 짐을 챙겨놓은 걸 보니 튈 준비를 한 모양이었다.
“어디 가려고.”
“이… 이 새끼…!”
“이 새끼라니. 얘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네.”
“당장 이동해!!”
크게 외친 이반이 멀뚱히 서 있는 남자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건지 몸 주위로 모래를 일으키는 남자.
“너였구나. 나 물 먹인 놈이.”
이반이 알려준 녀석에게 망설임 없이 수리검을 집어던졌다.
“꺼억…!”
그대로 날아가 벽에 박혀 축 늘어지는 남자에 이반을 포함한 러시아 인원들의 얼굴이 시퍼렇게 변했다.
천천히 솟구치던 모래도 언제 그랬냐는 듯 제자리로 돌아간 상태였다.
“아 혹시 이 새끼가 유일한 이동 수단이었던가?”
아무래도 정곡을 찌른 듯했다.
낭패감이 깃든 이반이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이 멍청한 새끼가!! 여긴 사막의 깊은 지하란 말이다!! 이젠 아무도 나갈 수 없다!”
이반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평생 갇혀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지금 눈앞에 있는 나보다 더 무서운 모양이었다.
“그래? 빨리 말했어야지. 이 새끼들은 맨날 저지른 뒤에나 말하더라.”
“남 일인 것처럼 센 척하지 마! 이 새끼야! 너도 갇힌 거라고!”
“남 일인데.”
“뭐?”
“이제 해 질 때 되지 않았나.”
[이카로스 - 칼데아 윙]
등 뒤로 검은 연기가 솟아났다.
멍한 얼굴로 연기를 바라보는 이반.
그러든가 말든가 들고 있던 수리검을 천장으로 집어 던졌다.
쾅!!
“뭐, 뭐 하는 거야!”
천장에 꽂히며 균열을 만들어낸 수리검에.
연기를 터뜨리며 솟구쳐 올라 수리검을 위쪽으로 밀어붙였다.
콰아아앙!
그대로 구멍이 난 천장에서 밀려 들어오기 시작한 모래.
엄청난 속도로 연구실이 모래에 잠겨갔다.
“뭐 하는 거야 이 새끼야아아!”
“이거? 모래시계. 아 너네는 그 모래에 잠기는 쪽이야.”
공중에 뜬 채로 모래에 잠겨가는 연구실을 바라보다.
연기를 휘둘러 놈들이 가지고 나가려던 자료를 박살 내버렸다.
“이건 제거. 혹시 모르니까.”
누군가 모래를 팔지도 몰랐기에 확실히 흔적을 지운 후.
뭐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이반에게 손을 흔들었다.
놈들은 막을 수 없이 몰려드는 모래에 잔뜩 겁을 집어먹은 상태였다.
“그럼 이만 갈게. 다음 생엔 착하게 살아라. 하지도 못하는 팔씨름 그만하고.”
연기로 정면을 두르며 연구실을 빠져나갔다.
“야이 개새끼야아아아아!!”
뒤에선 분노한 이반의 마지막 외침이 들려왔다.
평소라면 기분 나쁠 만한 욕이지만 지금은 오히려 시원하게 느껴졌다.
콰가가가가가!
이반의 말대로 연구실은 꽤 깊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연기로 한참 모래를 뚫고 나서야 스며들던 달빛과 함께 어둠으로 가득한 하늘이 나타났다.
그대로 모래를 헤쳐내며 하늘로 솟구쳤다.
모래에 둘러싸여 답답했던 몸으로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스으으읍!”
높은 곳까지 올라가 상쾌한 공기를 한껏 들이마셨다.
겉은 물론 속 깊은 곳까지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파하하!”
들이마셨던 숨을 뱉어내며 팔과 다리를 대자로 쭉 뻗었다.
눈은 하늘로 둔 채 몸을 연기에 맡겼다.
“별 보소.”
서울의 하늘과는 달랐다.
이렇게 많을 수 있는 건가 의문이 들 정도로 하늘에 빼곡히 박힌 별의 향연.
별을 바라보며 몸에 묻은 모래를 툭툭 털어냈다.
“가볍게 댕댕이 보러 왔던 건데. 이거 참 쉽지 않구만.”
역시 마가 제대로 꼈다는 걸 다시 한번 체감하며.
빛이 보이는 쪽으로 빙글 몸을 돌렸다.
데몬의 세계에서 덥다고 냅다 버렸던 터번과 상의.
가는 길에 어디 천쪼가리라도 주워 갈 생각이었다.
“이젠 얼음 소녀 찾으러 가야겠네.”
못 봤으면 모를까 한 번 흔적에서 그런 걸 느끼고 나니 모른 척하기가 힘들었다.
깊고 깊은, 심연이라 불러도 부족하지 않을 정도의 외로움.
그곳에서 녀석을 찾아 끌어 올려줘야 했다.
“그 전에 마지막으로.”
입가로 미소를 그렸다.
아직 정리할 게 한 가지 더 남아있었다.
* * *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어둠이 깔린 막사 구석.
게를레가 손톱을 깨물며 잠잠한 핸드폰을 내려다봤다.
이쯤이면 연락이 왔어야 하는데 아무 소식도 없는 것이 여간 불안한 게 아니었다.
툭.
“응?”
바닥으로 떨어진 무언가에 게를레가 바닥을 살폈다.
핸드폰 라이트를 켜 바닥을 훑길 잠시.
“!!!”
눈에 들어온 무언가에 게를레가 헛숨을 들이켰다.
류희수와 함께 온 터번의 남자에게 건넨 지도 대용 기계였다.
그 안엔 위치를 추적할 수 있는 GPS가 달려있었고 말이다.
“러시아 놈들이 상자 안에 숨어든 날 어떻게 찾은 건지 궁금했거든.”
“!?”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돌아볼 순 없었다.
처음 느껴보는 엄청난 불길함이 몸을 얼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거 밖에 없더라고.”
서서히 다가오는 불길함에 게를레가 마른침을 삼켰다.
오랫동안 러시아에게 돈을 받으며 정보를 팔아먹은 게를레.
러시아의 실험 때문에 동료들이 죽어 나갔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어차피 일이 마무리되면 몽골을 떠 러시아로 갈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자 그럼 날 팔아먹은 대가는.”
마음 같아선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몸이 굳어 그럴 수도 없었다.
삐걱거리며 간신히 돌아가기 시작한 게를레의 목으로.
“치러야겠지?”
지독한 불길함이 엄습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