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7화. 단서
“생각도 못했어.”
한숨을 내쉰 류희수가 연행되어 가는 게를레를 쳐다봤다.
적지 않은 시간을 함께 싸운 만큼 꽤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이런 류희수와 달리 난 약간의 마른침을 삼키며 쳐다보고 있었는데.
너무 팼나.
적당히 줘팬다고 팬 건데 괘씸죄로 힘을 좀 많이 준 것 같았다.
얼굴 여기저기가 팅팅 부은 건 물론 로우킥을 몇 대 찼더니 게를레는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있었다.
혹시나 몽골 측에서 문제 제기하는 건 아닐까 아주 살짝 땀이 흘렀다.
지금 분위기만 봤을 때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가깝겠지만 말이다.
“저 개자식! 찢어 죽여도 모자란 놈!”
“우리 손으로 죽였어야 하는데!”
“저놈 때문에 대체 몇 명이 죽어 나간 거야!”
게를레의 만행을 들은 몽골 헌터들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었다.
몇몇은 자기 손으로 게를레를 죽이겠다고 달려들다 정부에서 나온 헌터에게 제지당하기까지 했다.
“누군진 몰라도 정말 고맙구만! 저 쓰레기 자식을 흠씬 두들겨줘서!”
“그러니까. 저렇게 박살이라도 안 났으면 정말 분이 안 풀렸을 거야!”
여기저기서 들리는 소리에 류희수가 고개를 돌렸다.
“그렇다는데. 잘 팼네.”
“모두가 행복하다니 만족스럽네.”
엄지를 치켜세우며 류희수와 몸을 돌렸다.
막사에서 마무리해야 할 일은 끝났으니 치플린으로 다시 돌아가려는 참이었다.
“키도 님한테 물어볼 게 있다고 했지?”
“응. 사실 치쿠 족이랑 별 관련이 없는 이야기라 키도 님도 모르실 거 같긴 해.”
어깨를 으쓱이며 공명을 통해 봤던 소녀를 떠올렸다.
소녀의 외형은 분명 인간이었다.
하지만 풍기는 분위기는 인간이라 할 수 없었다.
가진 능력을 떠나서라도 뭔가 인간에서 나올 수 없는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물어보려는 것이었다.
오랜 시간 존재해 온 이세계의 종족 치쿠라면 지나가는 이야기라도 들은 게 있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키도 님도 떠나기 전에 한 번 들려달라고 했었어. 제대로 고맙다는 말도 못 했다고.”
“에이 굳이 그러실 필요 없는데 참.”
머리를 긁적이며 치플린과 이어진 위치로 걸어갔다.
러시아가 열심히 찾아놓은 연구실도 날려버렸으니 이곳이 치플린으로 향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어느 정도 가까워지자 우리가 온 걸 안 건지 어린 치쿠들이 나타났다.
볼 때마다 앙증맞고 아기자기한 것이 여간 귀여운 게 아니었다.
“오.”
처음엔 류희수 주변으로만 빙글빙글 돌아 약간 우울했었는데.
이번엔 적지 않은 수의 치쿠가 내 주변으로 와 열심히 점프를 뛰어댔다.
나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쪼쪼쪼. 이리 오렴. 킹댕이들.”
킹댕이들을 품에 한아름 껴안고 보이지 않는 계단을 올랐다.
다시 들어선 치플린은 확실히 처음 왔을 때보다 밝아져 있었다.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잿빛이 사라진 덕분인 듯했다.
“왔구나.”
들어서기 무섭게 기다리고 있던 키도가 몸을 일으켰다.
“기다리고 있었다.”
따라오라는 몸짓에 키도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키도가 향한 방향은 원래 잿빛으로 물들어 있던 장소였다.
“와우.”
잠시 후 눈앞으로 알록달록한 정원이 펼쳐졌다.
아깐 러시아 놈들을 족치러 간다고 자세히 못 봤었는데.
정원 이곳저곳엔 먹음직스러운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어린 치쿠들은 열매를 따다 열심히 나르는 중이었고 말이다.
“백운. 네가 우리에게 되돌려 준 것들이다. 네가 오지 않았다면 잿빛으로 물들어 영원히 사라져 버렸을 것들이지. 먹어 보아라.”
쪼르륵 달려와 열매를 건네는 어린 치쿠.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준 후 열매를 받아 들었다.
생긴 건 대충 사과인데 알록달록한 것이 맛이 쉽게 가늠되지 않는 녀석이었다.
이세계의 과일이라.
사방에서 쏟아지는 기대 어린 눈빛에 부응하기 위해 알록달록 과일을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
눈이 번쩍 뜨이는 맛이었다.
이가 들어가기 무섭게 폭죽처럼 터지기 시작한 달콤한 과즙.
알록달록한 색만큼 다양한 맛의 과즙이 입을 가득 채워나갔다.
와삭! 와삭! 와삭!
태어나서 처음 맛보는 천상의 맛.
순식간에 하나를 해치우자 어린 치쿠들이 기쁜 듯 주변을 방방 뛰어다녔다.
“아이들이 더 가져다줄 테니 여기에 앉아 있거라.”
키도가 가리킨 곳으로 가 몸을 앉혔다.
옆에선 과일을 한입 베어 문 류희수가 조용히 감탄사를 터뜨리고 있었다.
“뭐라고 감사를 표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해줄 수 있는 건 많지 않으나 필요한 게 있다면 말해보거라.”
“어휴 아니에요. 원래도 죽여야 하는 놈들을 없앤 것뿐인데요.”
열심히 손을 내젓다 말을 이었다.
“별개의 이야기지만 여쭤볼 게 있는데요.”
공명에서 봤던 소녀에 관해 묻자 고개를 끄덕이며 듣던 키도가 눈을 감았다.
무언가를 떠올리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었다.
“아주 오래전에 들었던 이야기가 있단다. 우리 치쿠가 아직 인간 세계와 교류하던 시절이지. 내가 직접 본 건 아니지만 당시 마을의 족장이라는 자가 말했었다. 당시보다 훨씬 전부터 홀로 자신들을 지켜준 존재가 있다고 말이야.”
키도가 기억을 곱씹으며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살이 시릴 정도로 날카로운 추위가 존재했던 곳.
당시 족장이란 자는 이 추위는 자연스러운 게 아니라고 설명했었다.
“어떤 존재에 의해 생겨난 추위라고 하더구나. 모르는 이는 사람이 살기 힘든 추위라고 말하지만, 사실 그 추위는 반대로 그곳에 사는 이들을 지켜주기 위한 존재의 영향이라고.”
턱을 문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공명에선 분명 견디기 힘든 추위가 몰아쳤었다.
실제로 데몬들은 그 추위를 몹시 두려워했었다.
주인 없이 덩그러니 놓인 팔의 추위를 봉인하기 위해 지독한 더위로 찍어 눌러놨던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아무리 용을 써도 결국엔 없애지 못하고 억제하는 게 최대였지만 말이다.
“그게 소녀였는지는 듣지 못했다. 나 역시 실제로 본 건 아니고. 다만 그곳의 족장은 그 존재가 인간과 저주 사이에 태어났다고 말했었다.”
“저주요?”
키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주의 이름은 아직도 기억이 나는구나. 혹한의 저주, 사야.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얼려버리고자 했던 저주라고 족장은 표현했었지.”
사야… 라.
뭔가 연관이 있는 듯하면서도 쉽게 와 닿지 않는 이야기였다.
저주란 건 보통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었으니.
사야란 존재는 저주라고 이름 붙여졌을 뿐 실제로는 특별한 힘을 타고난 인간이거나 다른 세계에 존재하던 종족일 가능성도 있었다.
“어느 날인가 족장은 날 눈이 새하얗게 덮인 산으로 데려갔었다. 그곳엔 나도 처음 보는 문양이 새겨진 커다란 동굴이 있었지. 당시 족장은 그곳을 유실된 이야기가 잠든 장소라고 말했었고.”
“그곳엔 어떤 이야기가 있었나요?”
눈을 뜬 키도가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알지 못한다. 들어가지 못했었거든. 그곳은 엄청난 한기로 가득 채워져 있었어. 밖에 몰아치는 추위가 어린애 장난으로 여겨질 정도였지. 동굴 안에 잠든 이야기를 알고 싶어 날 데려간 족장이지만, 나 역시 불가능하단 걸 알았기에 일찌감치 몸을 돌렸단다.”
궁금하구만.
미간을 찌푸리며 키도가 들어가지 못한 동굴을 상상했다.
내가 본 공명과 키도가 말하는 사야 사이엔 아무런 접점이 없을 수도 있었다.
다만 키도가 저렇게 말할 정도의 한기라면 흔하게 존재할 리가 없으니 확인해볼 가치는 충분했다.
“키도 님은 당시 교류했던 곳이 어딘지 모르신다고 했죠?”
“아쉽게도…. 그렇구나.”
사실 지역명을 알았더라도 오랜 시간이 지나며 바뀌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럼 혹시 모르니까.”
핸드폰을 찾기 위해 품을 뒤적거렸다.
키도가 눈에 익는 장소가 있을까 싶어 눈과 추위로 유명한 장소를 몇 장 보여 줄 참이었다.
… 아 시발. 러시아 불곰 새끼들.
그제야 미사일이 폭발할 때 고장 난 핸드폰이 떠올랐다.
난 핸드폰이랑 연이 없는 건지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박살이 나고 있었다.
“저기… 핸드폰 좀.”
야금야금 과일을 먹던 류희수가 핸드폰을 건넸다.
눈동자가 살짝 흔들리는 걸 보니 순식간에 자기 것도 해 먹는 게 아닐까 걱정하는 듯했다.
그런 눈빛을 애써 무시하며 핸드폰과 함께 키도 바로 옆으로 몸을 옮겼다.
“호오오옥시나 눈에 익는 곳이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고개를 끄덕이는 키도에.
핸드폰으로 지역 검색을 시작했다.
* * *
한국에 위치한 러시아 대사관.
정중한 자세로 전화를 받던 옥시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대한민국 1급 헌터 류희수 말씀이십니까?”
너머에서 들려오는 대답에 옥시나가 미간을 찌푸렸다.
몽골에서 진행하던 중요한 프로젝트가 한국 헌터에 의해 공중분해 됐다는 소식.
덕분에 한국 담당인 옥시나에게 문책이 쏟아지고 있었다.
옥시나 입장에선 마른하늘에 날벼락인 셈이었다.
# 류희수 말고도 한 놈이 더 있었다. 사실상 프로젝트를 박살낸 건 그놈으로 보이고. 이름은 알아내지 못했다고 하더군.
“한 놈이 더 있었다고요.”
옥시나가 입술을 깨물었다.
류희수와 동행할만한 인간은 손에 꼽을 만큼 추릴 수 있었다.
그중 기태랑이나 비광은 얼굴이 잘 알려져 있는 편이었다.
이들을 제외한다면 남는 건 딱 한 명뿐이었다.
홀로 프로젝트를 박살낸 건 물론 파견됐던 러시아의 1급 헌터까지 죽일만한 인물은 말이다.
“무기왕일 겁니다.”
# 뭐…?
“100%는 아니지만 류희수와 동행했으며 그만한 전력을 가진 건 무기왕 뿐입니다.”
순간 정적이 찾아왔다.
무기왕은 옥시나 뿐만이 아니라 러시아 측에서도 이를 갈고 있는 자였다.
막대한 자금과 함께 자신과 관련된 군사 기업의 기밀을 모조리 넘기기로 했던 유지열.
그런 유지열을 죽이며 러시아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힌 장본인이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한국에서 무기왕을 어떻게 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장관인 강태황부터 무기왕의 정체를 꽁꽁 감싸는 건 물론 국가에서도 영웅으로 추대받는 존재니까요. 아무리 압박을 넣어도 무기왕에겐 어떠한 영향도 없을 겁니다. 그렇다고 조용히 제거하는 것도 불가능하고요. 소란이라도 일어나 발각되는 순간 한국을 넘어 각 나라에서 제재를 가해 올 가능성이 높습니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 러시아라면? 무기왕이 러시아로 온다면 제거할 수 있겠나?
눈을 감고 빠르게 계산을 마친 옥시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할 수 있습니다.”
* * *
“확실하진 않지만 이곳이 눈에 익는구나.”
“!?”
키도에게 세계 각 지역의 사진을 검색해 보여 주길 한참.
한동안 아무 말이 없어 역시 이 방법은 무리인가 싶은 찰나 키도가 입을 열었다.
“조금 더 다양한 각도로 보고 싶구나.”
타오르기 시작한 희망의 불씨에 해당 지역의 사진을 여러 장 보여주었다.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가 싶더니 키도가 아까보다 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이곳인 것 같구나.”
뜻밖의 수확에 주먹을 움켜쥐며 핸드폰 화면으로 눈을 돌렸다.
검색창 아래에 첨부된 세계에서 가장 추운 지역이란 부가 설명.
낮은 목소리로 검색했던 지역의 이름을 되뇌었다.
“러시아 오이먀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