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8화. 위장 잠입
몽골의 징기스칸 국제공항.
한국행 비행기를 기다리며 이마를 문질렀다.
왜 하필 러시아냐.
키도가 오래 전 기억을 되살려 지역을 특정해준 것까진 아주 좋았다.
다만 그곳이 러시아라는 건 약간 난감했다.
천일과 유지열을 가루로 만들었다고 발광하던 옥시나와 이번 몽골에 관련된 샤샤와 솔라까지.
러시아에서 몽골 일을 어디까지 알고 있을진 몰라도 어찌 됐든 러시아와는 사사건건 부딪히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쉽지 않을 거야.”
옆에 앉아있던 류희수도 한마디 거들었다.
“무기왕이 자주 애용하는 검은 날개는 여러모로 분석된 상태거든. 무단 입국했던 사례도 몇 번 있었고. 아마 너한테 여러 번 물 먹은 러시아다 보니 네가 날개로 들어올 걸 대비해 이것저것 준비해놨을 거야.”
“불곰탱이치곤 대응이 아주 빠르구만.”
약간 자업자득이긴 했다.
날개로 잠입했던 곳에선 결국 해피엔딩이긴 했으나 무단 입국 전례를 남겨버리고 말았으니.
날 혐오하는 러시아 입장에선 미리 대비하지 않는 게 오히려 부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도박할 수도 없고.
옛날처럼 안되면 그만이지란 마음으로 가기도 힘들었다.
이카로스의 날개와 1급 헌터인 무기왕이 연관 지어진 이상 막무가내로 들어갔다 걸리면 국제적인 문제로 번질 것이었기 때문이다.
러시아가 어느 정도의 준비를 한 건지도 모르는 터라 걸릴 위험은 더더욱 더 높았다.
“수영해서 가는 방법이 있긴 한데.”
“그게 오히려 더 위험할걸. 러시아는 원래도 캥기는 게 많은 곳이라 바다 쪽 경계가 장난이 아니거든. 실제로 지금까지 러시아 바다로 잠입해서 성공한 사례가 하나도 없기도 하고.”
“불곰쉨!”
혀를 끌끌 차며 턱을 슥슥 문질렀다.
평소 하던 대로 불법 입국은 힘들어 보였다.
그렇다고 이대로 오이먀콘을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가서 꽝이면 어쩔 수 없지만 실낱같은 연관점이라도 발견한 이상 어떻게든 가서 확인해야 했다.
한참 씩씩대고 있을 때 류희수의 핸드폰이 울렸다.
“류희수입니다.”
헌터청에서 걸려온 전화인 듯했다.
한참 네 네 하며 고개를 끄덕이던 류희수가 내 쪽을 쳐다봤다.
“네. 옆에 같이 있어요. 둘 다 다친 곳은 없습니다.”
몽골에서 있었던 일은 류희수가 곧장 한국으로 보고를 올렸었다.
어느 선까지 닿아있는지는 몰라도 어쨌든 러시아 정부가 연관된 일에 우리가 훼방을 놓았기 때문이다.
“네. 일단 얘기는 해볼게요. 그럼 가서 뵙겠습니다.”
세상 궁금한 얼굴로 빤히 바라보고 있자.
전화를 마친 류희수가 곧장 입을 열었다.
“아저…. 아니, 강태황 장관님인데 몇 시간 전에 러시아에서 공식 루트로 연락이 왔었다고 하네.”
“무슨 연락? 한판 붙자고? 잘됐네. 당장 가자. 다 두들긴 다음에 오이먀콘으로 가게.”
“아쉽지만 그건 아니고. 좀 뜬금없는데 예전부터 한국이 요청하던 걸 들어주겠다는 연락이었다네.”
“응?”
무언가를 검색한 류희수가 내게 핸드폰을 건넸다.
러시아에서 실종된 탐사대에 관련된 뉴스였다.
“꽤 오래전에 있었던 일이야.”
류희수의 설명을 들으며 뉴스를 읽어 내려갔다.
러시아엔 유독 데몬이 출몰하지 않는 지역이 있었는데 그 이유를 조사하기 위해 넘어갔던 한국 탐사대가 모조리 사라진 사건이었다.
여기까진 불행한 사고였지만 문제는 그 이후였다.
러시아의 미적지근한 수색에 보다 못한 한국은 직접 수색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을 했었다.
러시아는 주제넘은 요청이라며 시원하게 이를 거절했었고 말이다.
“공식적으로 발표된 건 없지만 러시아는 수색을 빌미로 한국에 말도 안 되는 것들을 요구했었어. UN을 탈퇴하라느니 미국과 맺은 협약을 깨라느니 등등 하나같이 불가능에 가까운 것들이었지. 한국에서 난색을 표하자 러시아도 그럼 수색은 거절한다며 선을 그었었고.”
이후는 같은 일의 반복이었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못해 매년 같은 요청을 하는 한국과 그걸 갖가지 이유를 둘러대며 거절하는 러시아.
교착 상태에 빠져 영원히 끝날 거 같지 않았던 사안인데 뜬금없이 러시아가 한국의 요청을 수락한 것이었다.
“한국이 러시아의 요구를 들어준 건가?”
“아저씨 말로는 아닐 거래. 워낙 터무니없는 요구들이었으니까. 그냥 아무런 조건 없이 수색을 허락해준 거지.”
“오… 구린내가 보통이 아닌데.”
“그렇지. 타이밍도 그렇고.”
러시아의 몽골 프로젝트가 날아간 지 며칠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이제까지 하는 짓을 봤을 땐 보복을 했으면 했지 오래 묵은 부탁을 들어줄 러시아가 아니었다.
“아저씨도 그렇고 한국 정부도 엄청 찝찝해 하는 중이래. 하지만 거절할 수는 없는 상태고.”
“구린내가 나지만 수색대를 파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한국으로썬 선택지가 하나뿐인 상황이었다.
시간이 몇 년 흐른 만큼 탐사대가 살아있을 확률은 희박하나, 나라를 위해 러시아로 건너갔던 만큼 유해라도 찾아 한국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류희수가 말을 이었다.
“어쨌든 정부에선 수색대를 보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호위를 위해서 헌터청으로 인원 파견을 요청한 상태야.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더 문제는.”
핸드폰을 두들긴 류희수가 새로운 화면을 보여주었다.
이건 조금 전 헌터청에서 도착한 문서였다.
# 러시아 출입 금지 명단.
“이건 또 뭐야.”
아래엔 익숙한 이름들이 적혀 있었다.
1급헌터 비광과 기태랑, 눈 앞에 있는 류희수까지.
이게 끝이 아니었다.
관련된 사업에서 정부와 긴밀히 협업한다고 알려진 대산 측 인원들의 이름도 적혀 있었다.
소피아의 비서 아티라를 포함해 휘하 부대 마틸다와 기둥 중 이름이 알려진 장판석이 그 대상이었다.
“어떻게 생각해?”
“대놓고 날 부르는 기분인데.”
류희수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저씨도 같은 생각이래. 저쪽에서 무기왕이 누군지 알지 못하니까 명단에서 빠진 걸 수도 있지만. 정말 러시아에서 무기왕이 오지 않길 바랐다면 실명이 아닌 닉네임이라도 사용해 명단에 포함 시켰을 거라고.”
“재밌는 친구들이네.”
악수하고 밥이나 먹자고 부르는 건 아닐 터였다.
러시아 대사관 옥시나를 떠올려 봤을 땐 본진으로 불러와 두들기려는 게 분명했다.
“용감하기도 하고.”
국적뿐만이 아니라 사고방식 자체가 다른 게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내가 싸우는 장면은 동영상을 통해 여러 차례 공개됐었다.
본의 아니게 주변을 다 박살낸 적도 있었다.
내가 옥시나였다면 절대 초대하지 않았을 터였다.
내 집을 언제 부술지 모르는 오랑우탄을 들이는 격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대놓고 초대장을 보내다니.
러시아엔 날 잡아낼 수 있다는 강력한 확신이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어쨌든 돌아오는 대로 이야기해 보자고 하시네. 정작 본인인 너는 뭐….”
내 얼굴을 바라보던 류희수가 어깨를 으쓱였다.
“고민할 것도 없이 갈 거 같은 얼굴인 거 같지만.”
“그렇지.”
고개를 끄덕였다.
뭘 준비해놨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다만 거절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신경써서 초대해줬는데 거절하면 되겠어. 초대해줬으면 응해주는 게.”
천천히 착륙하는 비행기를 보며 입가로 미소를 그렸다.
“인지상정이지.”
* * *
인천공항에 내리자마자 마중 나와 있던 차량에 올라탔었다.
그리고 도착한 청라 근처의 호텔.
비밀스러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자 눈앞으로 거대한 회의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반가운 얼굴로 살짝살짝 손을 흔드는 전수희가 보였다.
바로 뒤에 최리아가 앉아있어서인지 깨갱한 채 적극적으로 흔들진 못하는 모습이었다.
눈이 마주친 최리아와 서로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몸을 앉혔다.
일이 있는 회장 소피아를 대신해 실장인 최리아가 온 모양이었다.
“어서 오게. 오늘도 날 실망시키지 않는 복장이구만!”
강태황이 껄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몽골 막사에서 되는대로 주워 입고 온 털모자와 털옷들.
옆에 있는 거울에 비춰보니 역사책에서나 보던 몽골 병사 A가 서 있었다.
“몽골에서 유행하는 패션입니다.”
엄지를 치켜세우며 아무 말이나 내뱉고 나자.
회의실 중앙에 앉은 강태황이 두어 번 헛기침을 한 후 이야기를 시작했다.
“오늘 모인 이유는 다들 아시다시피 수색대 파견 건 때문입니다.”
앞에 있던 스크린으로 한 장의 사진이 떠올랐다.
“일단 정부에선 이 사진에 있는 인원들에게 수색대 임무를 맡겼습니다. 과거 사라졌던 탐사대와 같은 소속인 사람들이죠. 지금은 팀의 이름을 바꾸고 데몬에 관련된 연구를 계속하는 곳이고요. 이제 문제는 이들의 호위를 위해 누가 가냐인데.”
사진이 바뀌며 다수의 인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중엔 군복을 입은 사람도 적지 않게 있었다.
“정부에서 고용한 용병 기업과 군 특수부대 소속 인원들입니다.”
“용병 기업은 조금 의외네요.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보내는 파견인데.”
최리아의 말에 강태황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보셔서 알겠지만 한국에서 이름이 알려진 대부분의 인원이 출입금지 명단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정부에서도 어쩔 수 없이 강수를 둔 셈이죠. 돈이 좀 들지만 러시아 출입금지에 포함되지 않은 전력을 선택하는 걸로요.”
“믿을만할까요? 돈에 움직이는 자들인데요.”
“그래서 정부에서도 요청한 게.”
고개를 돌린 강태황이 날 응시했다.
“헌터청의 무기왕이죠.”
한꺼번에 쏠리는 시선에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종종 처하는 상황이지만 천성이 유물관 찐따인 내겐 영 익숙해지기가 쉽지 않았다.
“오는 길에 들어보니 백운 자네도 러시아에 가고 싶다고 했다면서?”
“네. 러시아에 가서 알아볼 게 좀 있어서요. 가려던 곳도 마침 수색 장소랑 겹치고요.”
오면서 적극적으로 가겠다고 어필한 이유였다.
탐사대가 사라진 곳은 오이먀콘 바로 옆이었다.
아마 탐사대는 오이먀콘에 데몬이 출몰하지 않는 이유를 연구하다 사라진 것 같았다.
“그렇구만. 그런데 정부의 요구는 일단 거절했어.”
넵?
어깨를 으쓱인 강태황이 말을 이었다.
“너무 뻔할 정도로 러시아는 대놓고 자네를 불러들이는 중이고, 난 정부 쪽을 믿지 않으니까. 정부에선 무조건 무기왕을 보내달라는 입장이지만, 난 무조건 반대라고 했다네. 무기왕이 아니면 의미가 없다는 정부에 결국 헌터청에선 이번 수색대 파견에 아무도 동행하지 않기로 했고 말이야. 대신.”
강태황이 최리아 쪽을 바라봤다.
“대산에선 정부의 수색대를 도울 연구가와 그들을 지킬 호위 인원을 보내기로 했지. 명단에 포함된 기둥은 못 가지만.”
여기까지 말한 강태황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곳에 섞여서 가라는 말씀이군요.”
“맞아. 새로운 이름과 소속, 경력 등은 대산에서 만들어 줄 거야. 간단히 말해서 위장 잠입이지. 이것에 대해 아는 건 헌터청과 대산 뿐이고.”
“좋은데요. 그런데 만약 전투가 벌어지거나 하면 힘을 사용해야 할 텐데. 그때 가서 발각되면 곤란해지지 않을까요?”
“그땐 내가 알아서 하도록 하지. 만약 자네가 무기왕임을 드러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면.”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던 강태황의 얼굴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더 이상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닐 테니까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