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9화. 러시아로
“흠.”
꼴깍!
마른침을 삼키며 거울을 응시했다.
지금 내가 앉아 있는 곳은 대산 홍보실에 위치한 방 안.
내 뒤에 선 전수희가 거울을 통해 비쳤다.
양손에 가위와 빗을 하나씩 들고 깊은 고뇌에 잠긴 표정이었다.
“어떻게 해야 좋을까요.”
“그보다 괜찮은 건가요? 수희 님. 머리 짜를 줄 아시는 건가요?”
“그럼요. 제가 미용 쪽에 관심이 많아서요. 미용 관련 자격증도 있어요!”
“오오!”
“애견 미용이지만. 헤헤….”
“오… 넵? 지금 뭐라고…?”
내 되물음을 애써 무시하며 전수희가 기합을 넣었다.
“정했어요! 어떻게 자를지.”
“아니 그렇게 마음대로 정하지 마시….”
싹둑!
“에?”
사람 말을 끝까지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되돌릴 수 없도록 시원하게 한 뼘 잘라버린 전수희.
걱정 말라며 큰소리친 전수희의 양손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괜찮나 이거.
사실 머리를 제대로 조진 사례는 꽤 있었다.
청라에서 이발소에 들렸을 때도 내 모발의 대부분이 실종됐었고 말이다.
단지 강아지 미용 전문가의 손에 머리를 맡기자니 여간 불안한 게 아니었다.
“백운 님은 아주 인상이 강력한 편이니까요. 최대한 이목구비를 가려야 해요.”
불안해하는 날 진정시키려는 건지 전수희가 요목조목 설명을 이어갔다.
그런다고 해서 내 불안이 줄어들거나 하진 않았지만 어쨌든 설명은 그럴싸했다.
“일단 이 눈썹! 너무 시원하게 뻗어 있어서 눈에 확 띄거든요. 잠입 신분은 눈에 안 띌수록 좋으니까.”
뭔가 약품을 슥슥 바른 전수희가 내 앞머리를 꾸욱 눌렀다.
필살 다운펌이란 작은 외침과 함께였다.
그렇게 한참 애견 미용가 전수희의 이발이 진행되고.
“짜잔!”
활기찬 전수희의 외침과 함께 거울로 처음 보는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
머리를 푹 덮은 앞머리를 제외하고 옆과 뒤는 투블럭으로 시원하게 날아간 상태였다.
나쁘지 않은데.
크게 달라진 건 없지만 내가 봐도 이미지가 확 달라진 것 같았다.
전에는 딱 봐도 약간 날티나는 스타일이었다면 지금은 반에 한 명씩 있을 바가지 머리 모범생의 느낌이었다.
“어떤가요? 백운 님.”
전수희가 두근거리는 얼굴로 물어왔다.
빨리 잘 잘랐다고 칭찬해달라는 얼굴이었다.
“공부 잘할 거 같네요.”
“그, 그걸 의도했습니다!”
거짓말인지 약간 말을 더듬은 전수희가 뒤에 있는 자신의 가방을 뒤적거렸다.
찾아낸 무언가를 물티슈로 슥슥 닦아낸 전수희가 내게 다가왔다.
“여기서 끝이 아니에요. 비장의 아이템이 하나 있거든요.”
전수희가 커다란 뿔테 안경을 내게 씌워주었다.
이젠 정말이지 당장 어디 앉아서 책을 펼쳐야 할 것 같았다.
“첩보 영화에서 나오는 잠입 요원들도 안경은 필수로 끼는 거 아시죠? 도수 없는 거니까 편하실 거예요.”
“이런 건 어디서 난 거예요? 미리 준비하신 건가요?”
“아뇨. 화장 안 하고 편의점 갈 때 제가 쓰던 안경이에요. 방금 잘 닦았으니까 걱정 안 하셔도 돼요!”
대포알 같은 알 덕분에 얼굴 대부분이 가려지는 안경이었다.
거울을 보며 이리저리 얼굴을 돌려보는 사이 전수희가 서류 뭉탱이를 가져왔다.
“백운 님의 새로운 신분은 대산의 유물 연구원이에요. 이름은 김강산. 대산에 입사한 지 3년 밖에 안된 신입사원이죠! 백운 님. 김치! 하세요.”
사원증을 만든다며 순식간에 사진까지 찍어 간 전수희.
어딘가로 사진을 보내며 전수희가 설명을 이어갔다.
“대산에선 저번에 만나셨던 탐사실의 김정윤 실장님이 함께 가실 거예요. 데려가는 직원들은 저번에 백운 님을 도왔던 분들이라 편하실 거고요.”
“좋습니다. 좋아요.”
아직은 어색한 앞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출발은 내일 아침.
러시아가 준비한 비행기를 타며 수색 일정이 시작될 예정이었다.
할 일을 마친 건지 전수희가 묘한 얼굴로 날 바라봤다.
“별일 없었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겠죠?”
“음… 저도 가봐야 알겠지만 아마도요?”
“기둥 한 분도 가시니까 백운 님도 어깨가 조금은 가벼워지실 거예요!”
“오…?”
처음 듣는 얘기에 관심을 표하자 전수희도 콧등을 찡그리며 이번 수색 참가 명단을 살폈다.
“저도 이 중에 기둥이 누군지는 몰라요. 아마 대산에서도 소피아 님만 알고 계실 거거든요. 지금 회사에 계셨으면 아마 백운 님한테는 알려주셨을 거 같은데 안 계셔가지고… 하하.”
“뭐 굳이 제가 알아야 할 필요 있나요. 기둥이 한 명 있다는 게 중요하지.”
전수희가 보여 주는 명단을 쭉 훑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부 측과 합쳐져 작지 않은 규모로 꾸려진 수색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스케일이 훨씬 컸다.
“백운 님께는 쓸데없는 응원일 수도 있지만.”
전수희가 웃으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화이팅입니다!”
그런 전수희에 나도 웃으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화이팅!”
* * *
“하… 이렇게 나오시겠다?”
피식 웃은 옥시나가 고개를 흔들었다.
양손엔 이번 수색과 관련된 문서가 들려있었다.
한 손엔 한국에서 보내온 공식 문서가, 한 손엔 비공식적으로 조사한 문서가 있었다.
두 문서 모두엔 무기왕이 참가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고 말이다.
“참 어이가 없네요.”
문서를 아무렇게나 내팽개친 옥시나가 의자로 몸을 기댔다.
사실 저쪽도 바보가 아닌 이상 어느 정도 러시아의 의도를 눈치챌 거라 생각했었다.
보낼만한 인물을 대부분 출입금지로 지정하며 대놓고 무기왕을 요구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진짜 무기왕을 안 보낼 줄은 몰랐다.
러시아의 의도야 어쨌든 속내를 알 수 없는 곳으로 중요한 인력을 보내는 한국이었다.
이번에 보낸 인원마저 잘못 됐다간 국가 안에서도 질타를 피하기 힘들 터.
이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명단을 제외한 최고 전력인 무기왕이 함께 할 거라 생각했는데 순순히 의도대로 움직여 줄 마음이 없는 듯 보였다.
# 옥시나 대사관. 이젠 어쩔 생각이지?
전화 너머에서 질타에 가까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기왕을 불러들이자는 건 러시아 정부의 제안이었지만, 불러들이는 방법 자체는 전적으로 옥시나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었다.
너머로 들리지 않게 옥시나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따듯한 방에 앉아서 징징거릴 줄이나 아는 족속들.’
마음 같아선 한바탕 욕을 퍼부어주고 싶었다.
책임을 돌리고 질책할 줄이나 알지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무능력한 인간들이었다.
“상관없습니다.”
# 상관없다…?
“찜찜하기 짝이 없는 이번 수색에 군말 없이 참여한 거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아쉬운 건 한국이죠. 이번엔 객기를 부려 무기왕을 안 보냈다 하더라도 다음엔 보낼 수밖에 없을 겁니다.”
너머에선 침묵이 이어졌다.
계속 말해보라는 의미였다.
“몇 년 만에 보내온 수색대마저 실종되면 어떻게 될까요? 한국 정부는 국가 안에서 엄청난 독촉에 시달릴 겁니다. 이번엔 늦지 않게 빨리 찾아오라고요. 이에 그치지 않고 비난의 화살은 무기왕을 보내지 않은 헌터청에게도 향하겠죠. 이번에도 무기왕을 안 보내서 또 다 실종되게 놔둘 거냐면서요. 언제가 될진 몰라도 한국은 결국 국가의 최대 전력인 무기왕을 보낼 수밖에 없을 겁니다. 이번 수색이란 미끼를 덥석 문 순간 한국 정부나 헌터청은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는 최악의 수를 둔 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 이번은 상황을 더 고조시킬 떡밥이란 건가.
“맞습니다. 저흰 그저 무기왕이 올 때까지.”
옥시나의 입꼬리가 올라가며 소름 돋는 미소가 그려졌다.
“오는 족족 다 죽여버리면 그만입니다.”
* * *
이른 새벽의 인천공항.
열린 창문으로 시원한 새벽 공기가 흘러들어왔다.
물론 떠오르는 해 같은 건 볼 수 없었다.
이렇게 일찍 일어난 건 오랜만이라 여전히 비몽사몽 중이었기 때문이다.
“머리 누가 잘라줬어? 내가 장담하는데 널 끔찍하게 싫어할걸.”
옆에서 비광의 저주 실린 말이 들려왔다.
처음 만난 순간 비광은 먹고 있던 사탕을 뱉으며 고개를 저었었다.
이젠 갈 데까지 갔구나 란 말과 함께였다.
“위장은 성공적이군요. 비광 님이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눈도 뜨지 않고 대꾸하자.
“그런 의미에선 훌륭한 미용사라고 볼 수 있겠네.”
바로 납득해버린 모양이었다.
일리가 있다며 역시 대기업은 다르다는 말을 하는 비광.
“도착했다.”
영양가 없는 말을 주고받는 사이 차가 천천히 속도를 줄여갔다.
미리 도착해 기다리고 있던 대산 측 인원들.
그곳에 합류하며 공항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침부터 영 재수없구만.”
비광의 말에 고개를 들자 러시아 쪽 인원들이 눈에 들어왔다.
맨 앞엔 책임자 격인 러시아 대사관 옥시나가 서 있었다.
팔짱을 끼고 짝다리를 짚고 있는 것이 당장 호다닥 달려가 로우킥을 차주고 싶었다.
대충 강태황에게 고개를 까딱인 옥시나가 뒤로 늘어선 인원들을 응시했다.
기태랑과 비광, 류희수 등 1급 헌터와 한가닥하는 2급 헌터들이었다.
“어차피 비행기에 오르지도 못하는 분들이 뭐 한다고 이렇게 우르르 몰려오셨나요. 듣기로는 이번 일에서 손을 뗐다고 들었는데요.”
“그렇죠. 이번 일에는 손을 뗐지만.”
사람 좋게 웃어 보이던 강태황이 옥시나에게 다가갔다.
“엄한 일이 생겼을 땐 우릴 만날 거란 사실을 알려주고 싶어서요.”
“하!”
순간 표정이 굳은 옥시나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장관님 앞에서 여간 싸가지 없는 게 아니었다.
“지금 협박하시는 건가요?”
“경고입니다.”
“대사관에 대한 경고는 러시아를 향한 도발이란 걸 아셔야죠.”
“내가 모르고 하는 말일까.”
출국장으로 무거운 정적이 깔렸다.
강태황의 진심을 느낀 건지 옥시나가 웃음을 지우고 눈을 가늘게 떴다.
“러시아 땅에서 만나 뵐 날이 기대되네요. 강태황 장관님.”
“나도 기대되는군.”
서슬퍼런 말이 몇 마디 더 오간 후.
강태황이 먼저 등을 돌리며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제야 형식적인 인사와 함께 통성명하는 러시아와 한국 측 인원들.
“그럼 탑승하시죠.”
러시아 담당자의 말에 100명에 달하는 한국 수색대가 비행기에 오르기 시작했다.
팔짱을 끼고 고개를 약간 쳐든 채 지나가는 인원 한 명 한 명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옥시나.
날 볼 땐 약간 쫄리긴 했지만 위장이 잘 먹힌 모양이었다.
별 이상한 낌새 없이 옥시나가 다음 인원으로 눈을 돌렸다.
“우와… 비행기 엄청 크네요.”
“그러게요. 제대로 준비해 온 모양인데요.”
공항에서도 제일 큰 비행기에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생긴 건 일반 비행기지만 엄청 튼튼해 보이는 것이 전쟁에 사용되는 수송기 같았다.
비행기에 오르자 기다리고 있던 승무원들이 인사를 건네왔다.
“어서 오십시오. 환영합니다.”
하마터면 헛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승무원 전원이 무장 요원이라니.
빡세게 한 무장과 생글생글 웃는 얼굴 사이의 괴리감이 엄청났기 때문이다.
어쨌든 저들은 대놓고 환영해 주는 느낌이었다.
자신들의 입안으로 들어온 걸 말이다.
이쪽도 환영이다.
승무원들을 향해 나도 밝게 웃으며 고개를 꾸벅였다.
저들처럼 환영한다고 말해주진 못했지만 대신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날 입안에 들인 걸 환영한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