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화. 야쿠츠크
음악을 듣는 척하며 천천히 주위를 둘러봤다.
아주 고요하다 못해 정적이 내리깔린 내부.
공항에서 제일 큰 비행기라며 들떠 있던 분위기는 사라진지 오래였다.
“왜 무장을 하고 있는 거예요…?”
“뭐… 우리를 지키기 위한 거라니까 무슨 일 있겠어요.”
여기저기선 불안 가득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비행기에 타자마자 마주한 게 완전 무장 요원이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무장이라면 저희 쪽도 하고 있으니까요.”
“그렇긴 하네요.”
러시아의 자신감이 돋보이는 부분이었다.
놈들은 한국 측 인원들의 무기를 빼앗지 않았다.
정확히는 가지고 타든 말든 별로 신경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지금도 경계를 늦추지 않는 한국 인원들과는 달리 옥시나를 포함한 러시아 측은 여유롭게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쟤는 왜 따라왔지. 와인 처먹으려고 탔나.
팔자 좋게 잔을 기울이는 옥시나를 노려봤다.
꼴에 대사관이라고 공항까지 마중 나오고 돌아갈 줄 알았는데.
옥시나는 자연스럽게 비행기로 올라타 자리를 잡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선 지 안방인 거 마냥 다리를 쭉 뻗고 와인을 처먹으며 호사를 부리기 시작했고 말이다.
“강산 님. 강산 님?”
“아, 네네.”
이번 수색 기간 동안 불리게 될 내 가짜 이름.
아직 익숙하지 않은 이름에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돌렸다.
옆자리에 탄 건 정부 주니어 연구원인 임솔빈.
갈색 머리를 아무렇게나 묶은 임솔빈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신기하다는 듯 날 바라보고 있었다.
“강산 님은 엄청 강심장이시네요. 저랑 비슷한 경력이신데도.”
“넵? 아.”
그제야 말의 의미를 알아채고 호다닥 자세를 고쳐 잡았다.
옥시나를 욕하고 있을 게 아니었다.
나도 모르게 다리를 쭉 뻗고 위스키 잔을 드링킹하고 있었다.
누가 보기 전에 임솔빈이 미리 말해줘서 다행이었다.
어리버리한 신입사원 김강산이 다리를 뻗고 술잔을 기울이다니 절대 안 될 말이었다.
“전 너무 긴장되고 떨릴 때면 오히려 여유로운 척을 하거든요. 하아…! 지금도 손 떨리는 거 보세요.”
아까운 술은 죄가 없으니 시원하게 드링킹한 후 임솔빈 앞으로 덜덜 떨리는 손을 펼쳐 보였다.
“아… 역시 강산 님도 긴장 많이 하셨군요. 하아.”
한숨을 내쉬며 비행기를 훑던 임솔빈이 말을 이었다.
“강산 님은 어떻게 하다 이번 수색에 참여하신 거예요?”
“저야 그냥 회사가 가라고 하니까…? 주니어 사원이 무슨 힘이 있겠어요. 가라면 가야지.”
“아… 그렇겠네요. 성과가 중요한 사기업이니 안 가면 혼나거나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겠어요.”
마음속으로 소피아에게 사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억지로 오신 강산 님을 놀리거나 하려는 건 아니지만, 사실 저한테는 선택권이 있었어요.”
“대단하네요. 그런데도 오셨다니.”
“하하… 대단하다기보단 완전 고집불통이었어요. 집에선 엄청 반대했거든요. 미쳤다고 그런 위험한 곳에 가냐고요. 오늘 아침까지도 엄마가 가지 말라고 하셨어요. 평생의 소원이니까 제발 부탁한다고요.”
약간 한 번 꽂히면 불속성 효녀로 변하시는 편인가 추측하며 경청하는 사이.
물로 입을 적신 임솔빈이 사진 한 장을 보여 주었다.
딱 봐도 화목해 보이는 4인 가족이 찍혀 있었다.
“좋네요. 화목이란 글자가 크게 적혀 있는 느낌이에요.”
최대한 밝게 말하자 임솔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화목했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는요.”
귓가로 목소리가 닿기 무섭게 입을 다물었다.
이제부턴 뭐가 됐든 침묵하며 고개만 끄덕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아버지는 러시아에서 실종된 연구원 중 한 명이에요.”
“…!”
“몇 년 전부터 이쪽 일을 준비하면서 다짐했어요. 만약 기회가 생긴다면 제가 꼭 아버지를 찾겠다고요. 그래서 똑같은 곳에서 가족을 또 잃고 싶지 않다는 엄마의 만류에도 기어코 와버린 거고요. 완전 뷸효녀죠?”
밝게 웃으며 말하는 임솔빈에 호다닥 아니라며 두 손을 저어 보였다.
아까 불속성 효녀라고 떠올린 게 약간 뜨끔한 탓이었다.
“꼭 찾으실 수 있을 거예요. 저도 최선을 다할 테니 둘 다 열심히 수색하죠!”
“… 네! 그래도 강산 님이랑 대화하니까 긴장이 좀 풀리는 거 같아요. 고맙습니다.”
“별말씀을요.”
어찌저찌 훈훈하게 대화가 마무리되어 갈 때쯤.
러시아 승무원 한 명이 나와 임솔빈 옆으로 다가왔다.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승무원이 내민 손엔 작은 팔찌 두 개가 들려있었다.
“러시아에선 이 팔찌를 착용해주셔야 합니다. 여러분이 위험에 빠졌을 때 구조하기 위함이니 부담 가지실 필요는 없습니다.”
팔찌를 건넨 승무원이 앞으로 손을 모으고 나와 임솔빈을 내려다봤다.
둘 다 착용을 완료할 때까지 떠나지 않을 기세였다.
슬쩍 곁눈질하자 팔찌를 차던 대산의 김정윤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기기 쪽에도 빠삭한 김정윤의 반응을 보니 딱히 차면 안 되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고맙습니다. 이런 거까지 준비해주시다니.”
밝게 인사까지 건네며 팔찌를 착용했다.
옆에서 약간 망설이던 임솔빈도 덩달아 팔찌를 손목으로 끼웠다.
“협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제야 몸을 돌린 승무원이 멀어지고.
그런 승무원의 뒷모습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긴급 구조라는 그럴싸한 이유를 붙이긴 했어도 이건 누가 보나 명백한 개목걸이었다.
어딜 가든 위치를 확인하겠다는 심산.
뭐 폭탄은 안 달린 거 같으니까.
손목을 들어 육안으로 팔찌를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착용만 자유지 해제는 저쪽에서 해줘야 하는 것 같았다.
조금만 힘을 줘도 쉽게 뜯어지긴 하겠지만 말이다.
# 안녕하십니까. 대한민국 수색대 여러분. 현재 비행기를 운전 중인 기장입니다. 이제 곧 러시아 아쿠츠크에 도착합니다.
흘러나오는 안내 방송에 창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구름 아래로 내려가자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러시아의 풍경.
하얀색 물감을 쏟은 것처럼 세상이 온통 하얀색이었다.
# 현재 아쿠츠크의 기온은 영하 35도입니다. 해가 지면 영하 40도까지도 내려가니 주의해주시기 바랍니다. 아쿠츠크에서 오이먀콘까지는 러시아에서 준비한 특수 열차를 타고 이동할 예정입니다.
대충 아 춥네요 하고 넘길 기온은 아니었다.
추위 속에서 싸우는 게 익숙한 사람이 아니라면 충분히 행동에 제약이 걸릴 수 있는 기온이었기 때문이다.
홈그라운드라 이거지.
의자에 몸을 기대며 가까워지는 지상을 바라봤다.
이곳까지 들어온 이상 러시아의 손아귀 위에 올려진 상황이었다.
이제부터 관건은 놈들이 언제 이빨을 드러내는가였다.
* * *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솔직히 대단하군요.”
열차에 올라탄 대산의 탐사 실장 김정윤이 어깨를 으쓱였다.
러시아가 설원 한복판에 준비한 건 거대한 보라색 열차였다.
앞뒤로 길다는 걸 제외하면 기존에 봐왔던 것들과는 몹시 다른 생김새.
열차의 표면은 일반적인 철이 아니었다.
약간 거칠면서도 몹시 단단한 재질로 처음 보는 것이었다.
거기다 반듯하게 정돈되어 있다기 보단 울긋불긋하게 솟은 생김새라 그런지 이동수단이라기보단 하나의 성 같은 느낌을 주고 있었다.
“사실 아까 방송을 들으며 약간 의아했었습니다. 제가 아는 한도 내에선 아쿠츠크에서 오이먀콘까지 향하는 열차가 없었으니까요.”
김정윤을 따라 걸으며 열차 주위를 둘러봤다.
한 가지 더 신기한 게 있다면 보통 열차가 달리려면 설치되어 있어야 할 레일이 없다는 점이었다.
“오래 전에 대산으로 정보가 도착한 적이 있습니다. 러시아가 레일 없이 움직일 수 있는 열차를 개발 중이라고요. 개방이 나타나며 불가능이 사라진 세계라고 생각은 하지만서도 내심 힘들거라 여겼었는데. 제 자신을 반성하게 되는군요.”
열차를 둘러보며 혀를 내두른 김정윤에게 바싹 다가가 목소리를 낮췄다.
“그나저나 정윤 님. 혹시 이 팔찌 폭탄이거나 그런 건 아니죠?”
“예. 그건 착용하기 전에 관련 능력 개방자가 확인했습니다. 도청이나 그런 것도 없습니다. 딱 GPS 기능 하나뿐이죠.”
“이거면 충분하다는 건가.”
“글쎄요. 저들의 의도가 무엇일지는 감이 잘 안 잡히네요. 사실 언제 본색을 드러낼지는 저들의 자유니까요. 아무래도 홈그라운드이기도 하고.”
“그런 곳으로 지원해서 오시다니… 대단하십니다.”
전수희가 귀띔해줬었다.
이번 대산 측 책임자인 김정윤은 스스로 수색에 자원했다고 말이다.
“사라진 사람 중 한 명이 제 친한 고향 친구거든요. 둘 중에 한 명이 탐사하다가 실종 당하면 찾아 주기로 했었는데 이제야 오게 됐네요.”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김정윤을 바라봤다.
임솔빈뿐만이 아니었다.
사연을 가지고 러시아 행 비행기에 오른 사람은 말이다.
“그럼 앉을까요?”
“옙.”
자리에 몸을 앉히고 잠시 후.
쿠아아아아아아----!
깜짝 놀랄 정도의 굉음이 들려오더니 열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엔 일반적인 지하철과 비슷하다 싶었는데 점점 빨라지던 열차는 어느새 말도 안 되는 속도로 설원을 가르고 있었다.
“이건 회사에서 말씀드렸던 약품입니다.”
옆자리에 앉은 김정윤이 작은 분무기 통과 손바닥만 한 펜 하나를 건네왔다.
“이걸 뿌려보면 된다는 거죠.”
“예. 혈흔 흔적을 드러내 줄 겁니다. 펜은 의심이 되는 장소에서 사용해주시면 됩니다. 펜이 알아서 공간에 스캔해 관련된 정보를 저희에게 보내올 테니까요.”
“알겠습니다.”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애견 미용사 전수희에게 이발 당한 후 김정윤을 만났었다.
주인을 찾지 못한 업무가 있다는 걸 알게 된 후 자발적으로 지원했었고 말이다.
이번 수색에 참여한 대산은 정부와 관점이 약간 달랐다.
실종자를 찾는다는 목적 자체는 같았지만 동시에 러시아가 사건과 연관되어 있을 거라 가정한 것이었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선 현장을 돌아다니며 정보를 모아 줄 인원이 한 명이라도 더 필요한 상태.
그곳에 내가 지원한 것이었다.
“무리되지 않는 선에서 해주시면 됩니다. 강산 님은 저희 대산이나 정부를 호위하기 위해 오신 게 아니니까요. 거들어 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하하…. 네.”
호텔에서 강태황은 명확히 선을 그었었다.
- 상황이 된다면 도와줄 순 있겠지만, 공식적으로 자네에겐 그들을 지켜야 하는 책임이나 임무는 없어. 어디까지나 자네가 러시아로 가야 한다고 해서 수색대에 포함된 것뿐이니까.
내 할 일을 위해 온 것이니 그것에 집중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대산과 정부 측 인원들의 호위는 기둥과 용병 기업, 군대에게 할당된 임무였다.
받은 것들을 품으로 챙기는 사이.
핸드폰을 든 김정윤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다들 너무 무리한 행동은 하지 말고… 시작하도록 하지.”
나도 주변 눈치를 한 번 스윽 훑은 후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무리 봐도 구린내가 풀풀 나는 러시아 놈들.
놈들이 무얼 숨기고 있는지 이제부터 찾아볼 생각이었다.
바가지 머리 주니어 사원.
가려진 머리 너머로 열차를 바라보며 미소를 그렸다.
출격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