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1화. 열차 안에는
일직선으로 이어진 열차를 거닐었다.
출발할 때까지만 해도 돌아다니는 러시아 쪽 인원들이 잔뜩 보였었는데.
지금은 어째선지 가만히 자리에 앉아 자기 할 일에 몰두하는 모습이었다.
그들을 지나 화장실을 가는 척 옆으로 난 통로로 걸음을 옮겼다.
성처럼 커서인지 열차는 단순히 일자로 이어져 있지 않았다.
중간마다 옆으로 갈 수 있는 길이 나왔다.
대게는 식당이나 창고 등으로 이어지는 길이었고 말이다.
“정윤 님 말씀대로네.”
처음 열차에 타고 김정윤이 고개를 갸웃거린 부분이 있었다.
21세기에 어딜 가든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것 중 하나인 CCTV.
열차라면 당연히 있을 법한 CCTV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조금 더 알아봐야 확실해지겠지만, 레일 위에서 움직이는 게 아닌 만큼 러시아의 열차는 전기로 움직이는 게 아니며 이 때문에 CCTV나 각종 전자기기가 없는 거일지도 모르겠다고 김정윤은 말했었다.
“뭐 덕분에 움직이기야 편하지만. 어쨌든 여기도 별 거는 없는 거 같네.”
지나가다 들린 화장실에 김정윤이 건넨 액체를 뿌려보았다.
한 번이라도 혈흔이 묻은 적이 있다면 형광색을 띨 거라고 했었다.
옛날에 수사 드라마에서 본 루미놀 검사가 액체 하나로 합쳐진 느낌이었다.
딱히 아무 색도 안 띠는 화장실을 나와 이번엔 약간 어둑한 통로 쪽을 거닐었다.
감시하는 인원도 없는 걸 보면 열차에 캥길만 한 걸 남겨두지 않은 건가 싶기도 했다.
음?
휘적휘적 걸어가던 중.
묘한 이질감에 몸을 돌렸다.
외부와 달리 열차 내부는 흔히 볼 수 있는 철판으로 둘러져 있었는데 묘하게 한쪽 면의 철판이 다른 부분과 두께가 다른 느낌이었다.
마치 새로운 철판으로 덧댄 것처럼 말이다.
손을 해당 부분으로 가져가 슥슥 문질러 보았다.
만져보지 않으면 모를 정도지만 확실히 철판 하나가 더 솟아 올라와 있었다.
사면을 고정해놓은 나사도 약간 느슨한 상태.
근처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한 후 손으로 나사를 풀러 철판을 떼보았다.
“…?”
그 안엔 아무렇게나 구겨진 작은 메모장 크기의 종이가 있었다.
급했던 건지 대충 구겨 넣은 뒤 철판을 다시 끼워 넣은 듯했다.
이건 뭐 액체 뿌려보고 말고 할 것도 없겠네.
원래는 하얀색이었을 종이는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조심스럽게 종이를 꺼내 펼쳐보았다.
종이에 쓰인 건 한글.
펜이 없었던 건지 피로 다급하게 휘갈겨 쓴 글씨였다.
“이들은 우릴 돌려보낼 생각이… 없다?”
러시아 정부 소유의 특수 열차 내부.
관광객이나 일반인은 탈 수 없는 열차였다.
그런 곳에 이런 쪽지가 있다는 건 많은 생각이 들 수 밖에 없는 상황.
지나가는 통로라 설마 싶었지만 무언가에 홀린 듯 주변으로 액체를 뿌려보았다.
공기 중으로 퍼지며 서서히 벽으로 내려앉는 반응 액체.
조용히 선 채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하….”
나도 모르게 탄성이 터져 나왔다.
주변이 온통 형광색 천지였다.
피가 묻었다거나 뿌려졌다거나의 수준을 넘어 사방에 끼얹어진 수준이었다.
“통로 하나를 다 채울 정도면 한두 명이 아닌데.”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액체가 마르며 형광색이 옅어졌다.
누가 죽은 건지는 정확지 않으나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건 분명했다.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다 지나온 통로 쪽을 바라보았다.
이런 흔적이 남지 않게끔 완전히 지웠다고 방심해서일 수도 있겠지만.
아무리 봐도 이런 열차에 태워놓은 것 치고는 러시아의 경계가 너무 허술했다.
경계는커녕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자기 자리에 앉아 꼼짝하지 않고 있었던 러시아 측 인원들.
주변에 움직이는 사람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단지 그 숫자를 가늠해봤을 때 김정윤의 지시 아래 움직이는 대산 직원과 열차를 둘러보는 정부 쪽 인원일 가능성이 높았다.
뭔가 꼬롬한데. CCTV 같은 감시 수단도 없는데 가만히 앉아있기나 한다?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든 상황에 자리로 돌아가고자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 순간.
벽에서 느껴지는 움직임에 고개를 돌렸다.
“키아아아…!”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너무 깜짝 놀라 속으론 시발이라고 열 번은 넘게 외친 뒤였다.
철판 벽면이 꿀렁이는가 싶더니 서서히 형태를 갖춰 가는 무언가.
데몬의 일종인지 뭔지는 알 수 없었다.
찰흙처럼 묘한 질감을 가진 녀석은 먹이를 찾는 듯 고개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눈이나 코, 귀가 존재하지 않는 녀석.
놈은 내가 움직이지 않자 좀처럼 내 위치를 인지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이런 샹.
머리를 스친 생각에 곧장 김정윤이 건넸던 무전기를 집어 들었다.
“김강산입니다. 다들 움직이지 마세요. 지금 자세 그대로 가만히 있어요.”
# 벽에서 무언가…!
“안 움직이면 돼요. 지금 그대로 멈춰요.”
무전기 너머로 대답과 함께 크게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행히 누가 당하거나 하는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내가 백운이란 걸 아는 인원들이라 더 묻지 않고 시키는 대로 한 모양이었다.
“키아아아악.”
몸을 움직여서인지 벽에서 솟아 나온 놈이 내게 몸을 날렸다.
벌어지는 놈의 입안엔 상어처럼 날카로운 이빨이 수십 개 돋아나 있었다.
접근한 놈의 머리를 붙잡았다.
“키아…?!”
소리 지르지 못하게 입을 틀어막고 손아귀에 힘을 줬다.
드드득거리며 진동하더니 이내 찰흙 녀석의 머리가 부서지며 녹아내렸다.
곧장 아까 봐둔 어둑한 창고로 걸음을 옮겼다.
이젠 선명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벽을 헤치며 다가오는 놈들의 기척이 말이다.
아마도 열차에서 유일하게 움직이고 있는 날 쫓아 사방에서 몰려드는 것 같았다.
특정 조건이 갖춰지면 생명을 갖게 되는 건가.
벽이 꿀렁이기 전까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었다.
놈들이 기척을 잘 숨기거나 해서는 아니었다.
움직이는 순간부턴 놈들이 가진 기척이 선명하게 느껴졌었기 때문이다.
그저 특정 순간부터 생명을 새롭게 부여받은 것 같았다.
창고에서 최대한 큼직큼직하게 움직이며 놈들을 유인해냈다.
“키아아아…!”
“카아아아!”
의도한 대로 주둥이를 쩍 벌린 찰흙들이 창고를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데몬인 거 같으면서도 묘하게 다른 느낌을 가진 녀석들이었다.
“이야 너네 더럽게 많구나.”
꽤 넓은 공간이었는데 이젠 좁다고 느껴질 정도로 놈들이 모여들었다.
“러시아 새끼들 봐라 이거. 이래서 꼼짝없이 처앉아 있었구만.”
뭐랄까.
이젠 묘한 존경심마저 들 것 같았다.
어쩜 하는 짓마다 이렇게 줘패버리고 싶게 얄밉고 사악한 걸까.
[잭 더 리퍼 - 면도칼]
손으로 면도칼을 쥐며 팔을 위로 쭉 뻗었다.
하도 앉아있기만 해서인지 우드득하며 시원하게 풀리는 뼈 소리가 들려왔다.
“키아아아….”
“쉿. 열차 안에선….”
쉴 새 없이 울어대는 놈들에 천천히 면도칼을 들어 올렸다.
“조용히 해야지. 이 새끼들아.”
* * *
창고에서 놈들을 다 아작낸 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걸어 자리로 돌아갔다.
미리 신호를 줘서인지 자리를 떠났던 대산 인원들도 각자의 자리로 앉고 있었다.
“무슨 일이…?”
김정윤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날 바라봤다.
무전기로 다짜고짜 가만히 있으라고 하더니 잠시 후엔 됐다고 자리로 돌아가자 했으니 궁금해하는 게 당연했다.
“아까 돌아다니다가요.”
김정윤에게 조금 전 있었던 일을 말해주었다.
우연히 발견한 쪽지와 피로 물들었던 통로, 그리고 갑자기 등장한 정체불명의 적까지.
이야기를 들은 김정윤이 눈살을 찌푸렸다.
“러시아는 어느 타이밍에 그놈들이 나타나고 누구를 타겟으로 삼는지 알고 있었어요. 어떻게 맺어진 관계인지는 모르겠지만요.”
“그렇군요.”
“어쨌든 이 열차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긴 했어요. 이걸로 끝이 아닐 수도 있고요. 앞으로 어떻게 하실 건가요? 저는 신경쓰지 않으셔도 돼요. 여기까지 온 이상 어떻게든 오이먀콘으로 갈 생각이라서요.”
말을 건네며 김정윤을 바라봤다.
사실 난 열차에 무슨 위험이 있든, 러시아가 뭘 준비했든 개의치 않았다.
손을 뻗으면 꺾고 이빨을 드러내면 부수면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정윤과 다른 인원들은 달랐다.
대놓고는 아니더라도 이미 러시아가 한차례 이빨을 들이댄 상태였다.
확정적인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계속 나아갈지 선택해야 했다.
“저희도 선택지는 딱히 없을 거 같습니다.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해봐야 러시아는 발뺌할 테니까요. 그리고 지금 이곳은 통신도 안 터지는 영하 40도의 러시아 한복판. 괜히 저들이 본색을 드러내는 시점을 앞당기는 격이 되겠죠.”
김정윤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저 또한 여기까지 와서 그냥 돌아갈 순 없습니다. 뭐가 됐든 그 날의 진실을 알아야 하니까요.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기둥 한 분도 저흴 지켜주고 계시니까요. 모른 척하고 계속 가보겠습니다. 이 열차도 조사가 필요해 보이고요.”
미소를 지어 보이고 의자로 몸을 기댔다.
고개를 들자 자리에서 일어나는 러시아 측 인원들이 보였다.
최대한 티 내지 않으려는 듯하지만 분주함을 숨길 수 없는 움직임이었다.
창고로 가보라고 말해주고 싶네.
피식 웃으며 눈을 감았다.
그곳에 가보면 알 터였다.
망부석처럼 가만히 앉아있던 건 헛수고가 됐음을 말이다.
* * *
조금 전 백운이 떠나간 창고.
“하아?”
창고로 들어선 옥시나가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런 소란도 일어나지 않은 고요한 열차 안.
옥시나가 의도한 상황이 아니었다.
의도대로라면 옆자리 동료가 사라졌다며 한국 측에서 한바탕 난리가 났어야 했다.
하지만 난리가 나긴커녕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열차는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열차 벽에 잠들어 있던 쿠츠는 전부 깨어났습니다. 전부 죽었고요.”
흘러내린 시체를 살피던 남자가 고개를 저으며 말을 건넸다.
“여기서 다 죽은 건가요?”
“그건 아닙니다. 약 70% 정도입니다. 나머지는 여기서 조금 떨어진 통로에서 죽었습니다.”
“대체 어떤 놈들이….”
조금 전 보고를 받았었다.
한국 측 용병 기업이나 군이 탄 칸에서 움직인 사람은 없었다.
당시 자리를 떴던 건 대산 쪽 인원뿐이었다.
공식적으론 연구에 관련된 인원만 보내온 대산이었다.
그럼에도 이런 상황이 나왔다는 건 러시아에서 놓친 인원이 있다는 것이었다.
움직이는 모든 걸 사냥하는 쿠츠를 반대로 사냥해버린 인간이 말이다.
“눈에 띈 인원은?”
“추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비슷한 순간에 적지 않은 인원이 움직였고 동선상 모두가 이곳을 지나갈 수 있었습니다.”
눈을 가늘게 뜬 옥시나가 손톱을 물어뜯었다.
‘한 곳도 아니고 두 곳에서 쿠츠들이 죽어 나갔다라.’
이게 의미하는 건 한 가지뿐이었다.
러시아가 놓친 건 한 명이 아니었다.
최소 두 명.
대산의 연구원으로 위장해 숨어들어온 존재가 있었다.
쿠츠를 약간의 부상도 없이 사냥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들이었다.
‘두 명이나 놓치다니.’
대산의 인원들이 탄 칸을 바라보는 옥시나.
자신이 놓쳤다는 생각에 옥시나의 미간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대체 어떤 자식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