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2화. 열차의 아래엔
“다행히 별일은 없군요.”
우물거리던 걸 멈추고 김정윤을 바라봤다.
“그런 불길한 말씀을…? 거의 해치웠나? 급의 말씀이셨어요.”
“아 죄송합니다. 이놈의 입이 주책이네요.”
서로 웃으며 다시 포크를 움직였다.
열차를 타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자리로 식사를 가져다준 러시아.
곰과 순록 고기라고 하는데 야들야들한 것이 입에서 녹는 중이었다.
물론 혹시나 무슨 짓을 했을까 사람들이 먹기 전 내가 기미상궁 역할을 자처해 고기를 흡입해 보았고 말이다.
“항상 궁금했던 건데 독 같은 걸 먹어도 멀쩡하신 건가요?”
김정윤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에 존재하는 독을 다 먹어본 건 아니지만 지금까진 괜찮았어요.”
시작은 만년삼을 먹은 후부터였다.
사람들이 흔히 겪는 배탈이나 잔병치레를 전혀 하지 않게 된 것은.
왕의 육체를 얻고 나서는 독에도 딱히 반응을 하지 않게 되었다.
실험 삼아 독버섯 등 이것저것 먹어보며 얻게 된 결론이었다.
“독버섯을 먹어도 아무렇지 않다니. 부럽군요.”
“하하. 맛있게 생겼지만 더럽게 맛없다는 걸 알게 된 계기였죠. 그 이후론 멀쩡한 버섯만 먹고 있습니다. 훨씬 맛있더라고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마칠 때쯤.
아주 작지만 그냥 넘기기엔 찝찝한 소리가 들려왔다.
“왜 그러시나요?”
“잠시만요.”
고개를 두리번거리다 창문 쪽으로 눈을 돌렸다.
열차는 새하얀 설원을 달리고 있었다.
아까와 달라진 것 하나 없는 풍경.
하지만 소리는 분명 저 새하얀 눈 어딘가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눈보라 때문에 잘 안 보이지만 이쪽으로 뭔가 오고 있어요.”
“일단 준비하라고 하겠습니다.”
눈살을 찌푸리고 창 너머를 살피길 한참.
다가오는 것의 형체가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동상이라도 걸린 것처럼 온몸이 시퍼렇게 물든 녀석이었다.
전체적인 생김새는 대충 삐쩍 마르고 군데군데가 썩은 게 좀비를 닮은 모습.
놈들은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열차를 노리며 내달리고 있었다.
“데몬이에요.”
“조용히 대비하라고 하겠습니다.”
나지막이 말하는 김정윤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대산엔 나와 기둥 한 명을 제외하곤 전투 가능한 인원이 없었다.
이제 곧 일어날 소란에 대비해 다치지 않도록 준비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전원 지금은 티 내지 말고 대기해라.”
김정윤의 지시에 인이어 너머에서 나지막한 대답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의 변화를 눈치챈 건 나뿐이었다.
보통이라면 여전히 흩날리는 눈만 보일 터.
이쪽에서 먼저 발견했다는 게 알려지면 나중에라도 의심받을 여지가 있었다.
지금 미리 알린다고 해서 딱히 무언가를 먼저 할만한 거리도 아니었다.
숫자가 엄청난데.
대충 세어 봐도 수백 마리였다.
시야가 닿는 모든 장소가 들썩이고 있었다.
눈에서 태어난 놈들인지 이런 눈보라 속에서도 열차를 뒤쫓을 만큼 더럽게 빨랐고 말이다.
“어…? 저거 뭐야?”
“이쪽 확인이 필요합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다른 칸이 소란스러워졌다.
동시에 창가 주변으로 사람들이 몰리고 있었다.
“데몬이다!! 전원 전투 준비!”
지시에 따라 장비를 챙기는 한국 측 인원들.
다만 그다음이 문제였다.
좁은 열차 안에서 전투 준비는 했으나 어디서 어떻게 방어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는 것이었다.
러시아 놈들은 어떻게 하고 있으려나.
분주한 틈을 타 러시아 측이 타고 있는 칸으로 걸어갔다.
이미 한국에서 책임자 급 인원 몇 명이 현재 상황을 묻기 위해 넘어가 있었다.
“각자 원하시는 자리에서 전투하시면 됩니다. 열차가 대미지를 받지 않도록요.”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도도하게 서 있는 옥시나였다.
옥시나는 뭘 당연한 걸 묻느냐는 표정이었다.
“꽤 튼튼한 만큼 어느 정도 대미지는 견디겠지만 내부는 무척 섬세한 열차거든요. 기준치 이상의 대미지가 발생하면…. 말 안 해도 예상이 가능하시겠죠? 이 속도로 달리고 있으니 완전히 붕괴할 겁니다.”
“그럼 일단 속도를 줄이고 방어전을 펼치는 건 어떻습니까?”
“그건 안됩니다. 창밖 안 보셨나요? 저런 숫자가 달려오는데 속도까지 줄이면 바로 포위당해서 끝장날 겁니다. 어쨌든 어떻게 방어하든 그건 한국 여러분 자유입니다. 이쪽도 알아서 방어하겠습니다.”
무언가 더 물으려는 한국 측에 옥시나가 몸을 휙 돌렸다.
여전히 싸가지가 더럽게 없는 인간이었다.
그나저나 대기 중인 러시아 쪽을 보고 있자니 약간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한바탕 난리가 난 한국 진영과는 달리 이곳은 아주 평온했다.
마치 데몬이 나타날 걸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옥시나 저 새끼 반응도 영 이상한데.
멀어지는 옥시나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일정 이상의 대미지를 받으면 열차가 붕괴할 거라 말했던 옥시나.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각자 알아서 싸우자는 저런 반응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열차가 붕괴해도 한국만 죽을 거라는 듯한 반응이었다.
설마.
머리로 열차 칸의 배치도를 떠올렸다.
중간중간마다 섞여 있긴 하나 러시아와 한국 측의 칸은 완전히 분리되어 있었다.
지금까지 밥을 줄 때를 제외하곤 러시아 쪽 인원이 칸을 넘어온 적도 없었다.
“열차 위에서 싸울 수 있는 인원은 위로 올라간다! 내부에선 창문을 열고 데몬을 요격, 근거리 인원은 열차에 붙는 놈들을 처리해!”
“예!”
러시아의 대답에 잠시 벙쪄 있던 지휘관들이 인원 배치를 시작하고.
난 분주한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열차 안쪽으로 향했다.
비전투 인원인 대산도 전투원들이 필요한 걸 나르기 위해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는 상태.
지금 당장은 돌아다닌다고 눈에 띌 걱정도 없었다.
“퍼부어!!”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여기저기서 격발음이 들려왔다.
창가로 눈을 돌리자 데몬 위로 덮어지는 수천 발의 탄이 보였다.
열차 위에서도 퍼붓고 있는 건지 사방에서 쏟아지는 중이었다.
특별한 방어 능력은 없는지 한차례 싹 쓸려나가는 데몬 무리.
여기저기서 폭발한 탓에 눈이 일어나며 시야가 가려졌다.
“사격 중지! 재장전해라!”
귀가 얼얼할 정도의 소리가 한바탕 지나가고.
열차로 약간의 고요함이 찾아왔다.
나도 같이 바라보다 혀를 찼다.
아직이었다.
“크아아아아!”
“발사!”
다시 귀를 때리는 발사음이 울려 퍼졌다.
한차례 쓸어버렸음에도 놈들의 숫자는 전혀 줄어들지 않은 상태였다.
되살아나는 거 같진 않으나 그만큼 숫자가 엄청났다.
“얼레.”
가만히 선 채로 놈들의 움직임을 살폈다.
놈들은 어떻게든 열차에 붙기 위해 필사적으로 달리고 있었다.
이것만 보면 이상할 건 없었다.
놈들 입장에선 적을 공격하기 위한 행동이었으니까.
다만 가까워지니 확연한 차이가 드러났다.
데몬들이 달려드는 칸은 정해져 있었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놈들은 러시아 인원들이 탄 칸으론 접근하지 않았다.
“이 새끼들 진짜 가지가지 하네.”
고개를 빼꼼 내밀어 러시아가 탄 칸을 살폈다.
러시아도 창문 너머로 공격을 하곤 있긴 했다.
정확히는 열심히 공격하는 척이라고 보는 게 맞을 것 같았다.
녀석들은 전혀 필사적이지 않았다.
그저 쏴야 하니까 쏜다 라는 느낌으로 여유롭게 방아쇠를 당기고 있었다.
어떻게 한 거지.
소란의 한복판에서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데몬은 무언가에 끌린 것처럼 밀려들고 있었다.
놈들을 끌어들일 만한 게 뭐가 있을까.
딱히 헤키리스처럼 대화가 통할만한 부류도 아니었다.
열차에 타고 있는 것도 저놈들 입장에선 똑같은 인간이었다.
만약 다른 점이 있다면 열차의 각 칸에 있을 확률이 높았다.
러시아 쪽에 처음 보는 종류의 능력 개방자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중간마다 칸이 섞인 걸 봤을 때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았다.
칸마다 데몬들을 끌어들이는 무언가가 배치되어 있다고 보는 게 지금으로선 가장 현실성 있었다.
무언가 있다면 위는 아닐 거고.
고개를 들어 소란스러운 천장을 바라봤다.
객실과 천장 사이엔 공간이라 할만한 게 존재하지 않았다.
일반적인 열차와 다를 바 없는 두께.
다만 객실과 바퀴 사이는 달랐다.
지하 1층이 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높이 차이가 있었다.
어디 보자.
의심을 피하고자 구급상자 하나를 든 채.
아래로 내려갈 만한 곳이 없나 열차 여기저기를 훑었다.
교묘하게 숨겨 놓은 건지 딱히 열릴 만한 뚜껑이나 계단 같은 게 보이지 않았다.
칸과 칸을 잇는 지점으로 나간 뒤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어 보았다.
바퀴와 바퀴 사이의 텀이 넓은 것이 뭔가 공간이 있을 법했다.
영 안 땡기지만.
문을 열고 눈보라가 몰아치는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얼굴을 아래로 내려 살피니 사람 한 명 들어갈 만한 작은 공간이 보였다.
부디 안이 텅 비어있지 않기를 바라며.
서커스를 하듯이 몸을 비틀어 그곳으로 구겨 넣었다.
“후우.”
입구가 좁아 간신히 통과한 후 참고 있던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다시 들이마시는 순간.
“…!”
코를 찌르는 엄청난 악취가 풍겨왔다.
입고 있던 옷으로 대충 코와 입을 가린 후 정면을 응시했다.
온통 암흑이라 잘 보이진 않으나 느껴지고 있었다.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쉴 새 없이 꿀렁이는 열차의 지하가 말이다.
“한국 놈들 아주 피똥 싸고 있겠구만.”
“킬킬킬…. 그러게 말이야. 아주 진이 쏙 빠질 거라고.”
지하를 더 살펴보려는 찰나에 러시아 어가 들려왔다.
아직 거리가 꽤 있지만 내가 있는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역시 준비해뒀던 건가.
다가오는 인원은 적지 않았다.
순찰을 도는 건지 최소 서른이 넘는 인원이 지하를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원래라면 별 게 없어야 하는 열차 지하.
객실보다 감시 인원이 많다는 건 신경 써서 지켜야 할 게 있다는 걸 의미했다.
“그나저나 이렇게 피곤하게 할 필요가 있는 건가? 딱 보니까 약해 보이는 새끼들이던데.”
“그러게 말이야. 마음 같아선 그냥 죽여버리고 싶긴 해. 그럼 이 구역질 나는 냄새를 안 맡아도 될 테고.”
“야이 자식들아. 계속 구시렁거릴래? 옥시나 님께 또 무슨 욕을 처먹으려고.”
“죄, 죄송합니다.”
대장으로 보이는 놈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우리가 제공한 열차에서 다 뒤져버리면 어떻게 되겠냐? 우리가 작정하고 죽인 게 아니냐고 염병을 하겠지. 사실 뭐 약소국이 짖어봐야 얼마나 짖겠냐만은. 똥이 더러워서 피하지 무서워서 피하겠어? 그 뒤에 있는 놈들이 신경 쓰이는 거지. 여기선 힘만 빼놓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구린내가 풀풀 난다는 건 원래도 알았지만 귀로 직접 들으니 한숨이 나왔다.
놈들은 애초에 우릴 한국으로 돌려보낼 생각이 없었다.
놈의 말처럼 열차에선 인원을 줄이거나 힘을 빼놓을 작정인 듯했고 말이다.
그렇단 말이지.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놈들의 목적은 확실히 들었으니.
이쪽에서도 살살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잭 더 리퍼 - 면도칼]
한쪽 손에 면도칼을 든 뒤.
저벅.
천천히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