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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왕이 헌터로 회귀했다-405화 (405/473)

405화. 깊은 곳으로

김정윤이 배가 터지기 직전인 배낭을 건네왔다.

“식량도 최대한 꾹꾹 눌러 담았습니다. 한동안은 부족하지 않을 거예요.”

“감사합니다. 잘 쓰고 돌려 드릴게요.”

고개를 꾸벅이고 체육관 내부를 둘러봤다.

어느샌가 체육관에 남은 건 한국 수색대뿐이었다.

“러시아는 어디 갔나 보네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오이먀콘부턴 자율적으로 수색하라 하더군요. 러시아는 오이먀콘에서 대기하겠다고요.”

오이먀콘까지 온 이상 자기들 손바닥 위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손목에 팔찌 하나씩만 챙겨놓고 방목이라니.

이제 개별 행동을 할 나에겐 고마운 일이긴 했다.

“잠시 손목 좀.”

“아 네.”

손을 내밀자 김정윤이 태블릿으로 내 팔찌를 스캔했다.

“저들한텐 백운 님이 수색대와 함께 있는 걸로 보일 겁니다. GPS를 이쪽으로 옮겼으니 차고 계신 건 비활성화 됐습니다.”

“오오.”

그 짧은 시간에 이런 것까지 준비하다니 역시 대기업은 다르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아 혹시 정윤 님 팔찌 위치도 제 핸드폰에 표시되게 해주실래요?”

잠시 날 쳐다보던 김정윤이 묘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내 말의 의미를 알아차린 것이었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무얼 찾으시든 더 성심성의껏 도와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별말씀을요. 문제가 생기면 바로 연락해주세요. 바로 달려올 테니까.”

떠나기 전 강태황이 말한 대로 내게 대산이나 정부 인원을 지킬 의무는 없었다.

하지만 의무는 없을지언정 나 몰라라 할 순 없었다.

대산이란 기업과 친한 것도 있지만 여기에 온 사람들은 대부분 날 한 번 이상 도와준 사람들이었다.

이순신 장군의 활을 찾을 때도 회의실에서 같이 치킨도 뜯었었고 말이다.

“그리고 제가 한 가지 더 해놓은 게 있으니 놀라지 마세요.”

“해놓은 거라 하면…?”

“곧 한국에서 러시아 쪽으로 연락할 거예요. 무기왕을 보낸다고.”

“…!”

고개를 돌려 체육관 창문 너머를 바라봤다.

내가 떠나기 전 이곳으로 돌아오지 말고 도망치라고 했던 할아버지.

무언가를 더 묻기 전에 러시아 인원들이 체육관에서 나와 그대로 자리를 떠났었다.

할아버지도 무언가 더 말해주기엔 위험 부담이 있었을 테고 말이다.

이렇듯 경고까지 들었다 보니 그냥 휭 하고 이곳을 떠나기가 영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러시아의 시선을 돌리고자 한 가지 미끼를 더 던져주기로 했다.

처음부터 노골적으로 원했었던 무기왕이란 미끼였다.

“놈들이 함부로 안 움직이는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아직 대산에 숨어든 전력이 누군지 파악하지 못한 것도 한몫할 거예요. 여기에 무기왕까지 더해지면 이곳 수색대에 쏠려있던 놈들의 관심이 많이 분산되겠죠. 저지르려던 일도 한 번 더 고려하며 계획을 다시 수립할 거고요.”

충분히 시간을 벌 수 있을 터였다.

적어도 내가 다시 돌아오는 시간까지는 말이다.

“무기왕은 오이먀콘으로 오는 동안 계속 수색대와 연락을 주고받을 거라고 전달될 거예요. 놈들이 무기왕을 그렇게 원하고 있으니 도착할 때까지는 섣불리 움직이지 않겠죠.”

“그럼 한국에선 실제로 누가 오시는 건가요?”

김정윤의 물음에 의미심장한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실제로 넘어오는 사람이 없다면 거짓말은 오래갈 수 없었다.

그래서인지 의견을 전달하자 강태황은 서슴없이 한 명의 이름을 말했었다.

“이제 곧 러시아도 머리 아파질 거예요. 지금 여기에 있는 전력만으론 안될 테니 증원 요청도 할 테고요.”

“마지막 전투는 꽤 커지겠군요.”

“네. 그렇겠죠. 그때는.”

러시아가 있을 방향을 바라보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전력으로 박살내면 그만이니까요.”

* * *

“뭐라고요!?”

앉아있던 옥시나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소란스럽던 건물로는 정적이 찾아왔다.

옥시나를 포함한 모두의 시선이 조금 전 보고를 한 남자에게 쏠렸다.

“오이먀콘으로 오며 만난 서리 구울 때문인지 한국에서 공식으로 요청을 해왔습니다. 출입금지 명단에 없는 무기왕을 보내고 싶다고요.”

“하…?”

허리에 손을 짚은 옥시나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서리 구울은 계획한 것의 반도 쓰이지 못하고 돌아가 버렸었다.

예상치 못한 방해에 제대로 실패했다고 생각해 기분이 더러웠는데 갑자기 무기왕이라니.

생각지도 못한 대어가 걸린 격이었다.

“러시아에선 곤란한 척하면서 요청을 승인했습니다. 단 한국에서 말해 온 조건이 있습니다.”

“뭐예요?”

“지금까지 정체를 숨겨온 만큼 이번에도 신분을 감춘 채 입국하겠다는 겁니다. 러시아 측에서 오이먀콘까지 제공하는 이동수단은 사용하되 얼굴이나 지문 등 모든 검사를 면제해달라는 겁니다.”

“그딴 건 얼마든지 해주라고 하세요. 어차피 이곳으로 끌어들인 뒤 죽일 놈이에요. 얼굴 같은 건 그때 가서 봐도 늦지 않으니까요.”

옥시나가 기분 좋은 웃음을 터뜨렸다.

열차에 탄 이후부턴 내내 기분이 안 좋았었다.

자신이 짠 판임에도 불구하고 정체불명의 놈에게 휘둘리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젠 아니었다.

운이 따라줬다곤 해도 궁극적으로 원했던 먹이가 러시아로 오게 되었다.

“오이먀콘에 있는 수색대는 어떻게 할까요?”

부하의 물음에 옥시나가 손을 내저어 보였다.

“그딴 건 내버려 두세요. 주변을 뒤지며 수색을 하든 오이먀콘에서 눌러살든. 어차피 열차가 없으면 나가지 못할 테니까요. 찾아낼 수 있는 것도 없겠지만요.”

수색대든 대산으로 숨어든 전력이든 그런 건 이제 관심 없었다.

보통 놈이 아니더라도 무기왕이란 대어 앞에선 미꾸라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자리에 앉은 옥시나가 바쁘게 명단을 살피기 시작했다.

무기왕을 잡기 위한 전력을 러시아 정부에게 요청해야 했다.

“정부에선 뭐라고 하던가요?”

“이번 일에 반대하는 장관 측 전력을 제외하곤 협조하겠다고 알려왔습니다. 대통령 승인도 떨어졌고요.”

“쯧. 아직도 나라에 겁쟁이 새끼들이 이렇게 많아서야.”

옥시나가 고개를 흔들었다.

당장은 무기왕이지만 훗날엔 마찬가지로 제거해야 할 놈들이었다.

반대하는 측 인원을 제외한 옥시나가 명단을 작성해나갔다.

러시아 본진에서 일어날 무기왕 사냥.

절대 실패해선 안 되는 만큼 최고의 구성으로 실패할 리 없는 작전이 되게 할 생각이었다.

* * *

“이야. 벌써부터 막막하구만.”

그나마 오이먀콘에선 날씨라도 좋았었는데.

출발하기 무섭게 귀신같이 눈보라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조금 지나자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상태가 되었고 말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이제 곧 해가 진다는 것이었다.

“비장의 무기를 꺼내야 하나.”

등 뒤에 메고 있던 걸 꺼내 내려놨다.

오이먀콘을 떠나기 전 눈길을 사로잡는 게 있었다.

체육관 옆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던 멋들어진 스노우보드.

주인 없는 거니 대충 가져가라는 말에 바로 집어왔었다.

타본 적은 없지만 내 운동 신경은 쩌니까.

보드를 내려놓고 신발을 끼워 넣었다.

마침 이제부터 가야 할 길은 언덕의 내리막길.

걸어가는 것보다 훨씬 더 빠르고 재밌을 터였다.

“자 가보자고.”

옛날에 봤던 동영상을 떠올리며 엉거주춤 자세를 잡은 뒤 앞으로 체중을 실었다.

안 넘어지게 중심만 잘 잡으면 될 거 같았다.

부드럽게 나아가는 보드에 미소가 그려졌다.

타기 시작한 지 30초도 안 됐는데 벌써 재밌었다.

“오 빠른데.”

미끄러지며 보드로 속도가 붙었다.

경사가 급해지며 점점 빨라지는 보드.

“어… 어 잠깐.”

말도 안 되게 빨라진 보드에 무언가 잘못됨을 느꼈지만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주변 경관이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다.

속도가 너무 빨라 방향을 바꾸거나 할 순 없었다.

약간이라도 트는 순간 그대로 튕겨 나가버릴 것 같았다.

손으로 배낭끈을 꽉 부여잡았다.

소중한 식량이 든 배낭만큼은 살려야 했다.

“갸아아아악!”

이젠 내가 보드를 타는 건지 보드가 내 머리채를 붙잡고 가는 건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거의 날아가다시피 하며 보드가 거침없이 나아갔다.

순간 동영상에서 지그재그로 움직이던 게 떠올랐지만 이제 와서 그딴 게 가능할 리는 없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보드에 몸을 맡겼다.

부디 엄한 곳에 날 데려가지 않길 바라면서 말이다.

“가봐야 설원이겠…?”

나도 모르게 사망 플래그를 깔아버린 탓일까.

몸이 부웅 뜨는 느낌에 아래를 내려다봤다.

끝없을 것 같던 새하얀 눈길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어째서 이런 곳에 절벽이?

정확히는 거대한 얼음 절벽이었다.

얼마나 높은지 아직도 아래가 시커먼 색이었다.

일단 발을 보드에서 분리시켰다.

저 아래로 휭 날아 가버리는 스노우보드.

[잭 더 리퍼 - 면도칼]

면도칼을 입에 물고 아래를 응시했다.

바닥보다 먼저 건너편에 있던 거대한 얼음벽이 다가오고 있었다.

몸을 빙글 돌려 두 발로 벽을 차냈다.

충격으로 벽에 쌓여 있던 눈이 쏟아졌지만 추락 속도는 많이 줄어든 상태였다.

“후우우우!”

호흡을 뱉어내며 가까워진 바닥에 발을 딛고 몸을 숙이며 손을 짚었다.

점수를 준다면 만점짜리 히어로 랜딩이었다.

잠시 후 등 뒤로 눈이 쏟아졌다.

방금 전 추락 속도를 줄이겠다고 벽을 디딘 탓이었다.

“완벽하군.”

배낭이 안전한 걸 확인하며 머리에 쌓인 눈을 털어냈다.

이런 멋진 장면을 액션캠으로 찍어 놨어야 하는데 아쉬울 따름이었다.

무기왕의 히어로 랜딩.

잡으라는 데몬은 안 잡고 보드나 타고 다니냐고 세금 아깝다 욕이 날아들긴 하겠지만, 어쨌든.

“음. 해 질 때까지 라면이나 한 젓갈 할까.”

하늘은 서서히 어두워지고 있었다.

이제부턴 날개로 이동할 생각에 메고 있던 배낭을 내려놓았다.

설산도 식후경이라고 배나 좀 채울 생각이었다.

“추운 곳에서 먹는 라면은 기가 막히겠지.”

솟아오르는 기대에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는 사이.

뒤에서 묘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게 뭔지 고개를 돌려 확인하려는 순간.

덥썩.

“응?”

발목을 잡는 무언가에 삐걱거리며 고개를 내렸다.

눈더미 속에서 누군가의 팔이 삐져나와 있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벙쪄 있자 잠시 후엔 얼굴이 나타났다.

새파랗게 질린 것이 산 자의 얼굴이 아니었다.

“기… 기아아아아악!”

곧장 반대쪽 발로 얼굴을 걷어찼다.

좀처럼 놓지 않는 손에 급한대로 들고 있던 봉지 라면을 휘둘러 면상을 후렸다.

이젠 무기를 꺼내 박살내려는 순간.

“자, 잠깐…!”

“!?”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구타를 멈추고 얼굴을 내려다봤다.

한쪽 눈 주변으로 붉은색 문신을 새긴 남자.

남자가 코피를 흘리며 의아한 얼굴로 날 올려다봤다.

“왜, 왜 때리는 건데?”

깜짝 놀라 일단 두들기고 본 터라 딱히 대답할 말은 떠오르지 않았다.

단지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누군지는 몰라도 튼튼한 사람이어서 말이다.

“!?”

둘 사이로 어색한 정적이 흐르는 사이.

아래로 내려간 눈이 뜻밖의 물건을 발견했다.

라피타 족이 하고 다닌다는 푸른빛의 돌조각 목걸이.

남자가 찬 목걸이에선 은은한 푸른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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