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6화. 라피타 족
영하 30도가 넘어가는 얼음 절벽 사이.
후루룹! 후루룹!
아무 말 없이 면을 흡입하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뭐야 이거? 신기한데. 이 추위에서도 불이 안 꺼진다니.”
“대기업의 힘이랄까.”
얼떨결에 대답하다 정신을 차리고 남자를 쳐다봤다.
목까지 오는 백발을 뒤로 넘겨 묶고 왼쪽 눈 주위로 문신을 새긴 남자는 쉴 새 없이 라면만 탐내고 있었다.
“아니 근데 누구냐고. 라면 줬으니까 이제 말해.”
간신히 몸을 일으킨 남자는 다짜고짜 말했었다.
과자 부스러기라도 좋으니 먹을 것좀 달라고 말이다.
그래서 김정윤이 건네준 필살 버너로 라면을 끓여 건네줬었다.
얼굴을 걷어차고 라면으로 후려친 게 미안해서는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어려운 사람을 돕고자 하는 선의에서 건넨 것이었다.
“아 아직 말 안 해줬나? 내 이름은 시라크. 직업은 일단 모험가로 해두자고.”
“모험…? 이 엄동설한에 모험하고 있었다고?”
“뭐 조금 다르긴 하지만 비슷하지. 어쨌든 목적지를 찾아 나아간다는 건 똑같으니까! 와하하하!”
이상한 놈이네.
라면을 후룹거리며 남자의 눈을 바라봤다.
혹시나 또 실례를 할까 물어보진 않았으나 남자의 눈동자는 눈처럼 하얀색이었다.
건넨 라면도 잘 집어먹고 있으니 안 보이거나 하진 않는 듯 했지만 말이다.
“내 눈 특이하지?”
“쿨럭!”
뜨끔하며 재채기를 했다.
매운 기운에 하마터면 사레가 들릴 뻔했다.
“잘 보이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라피타 족의 특징이니까.”
국물까지 한 번에 원샷한 시라크가 날 쳐다봤다.
“그래서 라피타 족을 찾으러 가는 중이라고?”
“응.”
“나돈데 가는 길이 같구만.”
물을 법한데도 시라크는 내가 라피타 족을 찾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어쨌든 목적지가 같다는 말에 눈을 반짝였다.
“지도를 갖고 있긴 한데 오래된 거라서. 나도 데려가 줘.”
“그건 좀 힘든데.”
“!?”
망설임 없이 대답하는 남자에 배낭에서 꺼내던 손을 멈췄다.
후식으로 달달한 초코바와 딸기 우유도 주려고 했는데 보류였다.
이유를 묻는 얼굴에 시라크가 머리를 긁적였다.
“왜냐면 나도 길 모르거든. 그런데 뭐 꺼내려던 거야? 왜 꺼내다 말아.”
“아무것도 아니야. 여기서는 그럼 길 잃어서 널브러져 있던 거야?”
“길 잃은 건 맞는데 널브러져 있진 않았어. 텐트에서 자고 있는데 갑자기 쏟아진 눈에 깔린 거지.”
뜨끔하며 초코바와 딸기 우유를 꺼내 시라크에게 건넸다.
발로 걷어차고, 라면으로 후려치고, 눈으로 매장까지 해버렸으니 줘야 할 것 같았다.
“오 고마워.”
시라크가 환하게 웃으며 초코바를 뜯었다.
묘한 분위기를 가진 남자였다.
온몸은 아주 근육질인데 반해 얼굴은 또 선한 기운이 물씬 풍기고 있었다.
“그런데 걱정할 필요는 없어. 여기서 기다리면 돼.”
“응? 기다리면 된다니.”
초코바를 우물거리던 시라크가 목에 걸린 목걸이를 가리켰다.
왠지 모르게 아까보다 새어 나오는 푸른빛이 늘어난 것 같았다.
“저쪽에서도 내가 온 걸 알 테니까. 찾으러 오겠지.”
“오…!”
빛이 흐르는 목걸이엔 사람 찾는 용도가 탑재된 모양이었다.
“넌 여기서 살다가 떠난 거야?”
“그렇지. 계속 부족 생활을 하다간 얼어 죽을 거 같아서 도망쳤어.”
어깨를 으쓱인 시라크가 손을 들어 주변을 가리켰다.
“여기가 어떻게 사람 사는 곳이야? 죽음에 훨씬 가까운 곳이지. 안 그래?”
“그렇긴 하지.”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우라지게 추운 이곳은 까딱 잘못 잠들면 그대로 깨어나지 못하는 장소였다.
오독. 오독.
그렇게 시라크와 나란히 앉아 초코바를 뜯어먹길 한참.
무언가 이상한 것 같아 시라크를 쳐다봤다.
“찾으러 오는 거 맞아?”
약간 뜨끔한 시라크가 웃음을 터뜨렸다.
“생각해보니 아닐 수도 있을 것 같네. 집 나간 자식이 뭐가 이쁘다고 데리러 오겠어. 하하하!”
오도독.
나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내 소중한 초코바 한 봉지를 다 먹여놨더니 저런 소리를 하다니.
한참 웃던 시라크가 바지를 털며 몸을 일으켰다.
“안 오면 내가 찾아가야지 뭐.”
“길 모른다면서.”
“목걸이가 대충 알려 주긴 하니까 따라가면 돼. 엄청 대충 알려줘서 길 잃기 십상이지만.”
더럽게 못 미더웠지만 나 혼자 찾는 거보단 나을 거 같았다.
탈주자이긴 해도 어쨌든 라피타 족 출신이었다.
함께 가는 게 라피타 족에 무언가 물어보기에도 더 좋을 듯했다.
배낭을 꾸리고 앞장서는 시라크를 따라나섰다.
쌓인 눈으로 치워내더니 절벽 안쪽에 뚫린 동굴로 들어가는 시라크.
길은 몰라도 걸음 하나만큼은 아주 거침없었다.
“떠났다면서 부족은 왜 찾아가는 거야?”
“설득하러 가는 거지. 나처럼 이곳을 떠나자고. 추위를 떠나서 여긴 정말 사람 살 곳이 못 되거든. 그런데 너 달리기 좀 해?”
뜬금없는 물음이라 생각하려는 순간.
여기저기서 기척이 느껴졌다.
나지막한 울음소리도 함께였다.
“보통 이런 얼음 절벽 동굴엔 데몬이 바글거리거든. 일단 뛰자고.”
그걸 알면서도 동굴로 온 거냐 묻고 싶었지만.
앞으로 튀어 나가는 시라크를 따라 나도 발을 뻗었다…
양손은 소중한 배낭 끈을 꽉 움켜쥔 채였다.
“크라아아아!”
뒤에선 기다렸다는 듯이 엄청난 수의 데몬이 얼음을 깨며 튀어나왔다.
아마 안쪽에서 잠들어 있던 걸 우리가 들어오며 깨운 모양이었다.
“이곳뿐만이 아니야.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데몬이 들끓거든.”
시라크의 말을 들으면서도 약간 의문이긴 했다.
오이먀콘을 포함한 근처는 무언가의 이유로 데몬이 없다고 들었었기 때문이다.
과거 수색대도 그 이유를 밝히기 위해 온 것이었고 말이다.
“원래 데몬이 이렇게 많았어?”
호다닥 달리며 묻자 시라크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많아진 거지. 지켜주던 존재가 약해졌거든. 그 존재가 무서워 접근조차 못 하던 놈들이 이젠 되려 존재를 공격하고자 몰려오는 중이고 말이야.”
“존재?”
“나도 어렸을 때 전설처럼 들었던 거라 잘 알진 못해. 솔직히 믿지도 않았었고. 이 지경으로 데몬이 쌓이기 전까지는.”
앞으로 나타난 절벽에 시라크가 건너편으로 도약했다.
나도 따라 도약해 착지하자 시라크가 웃음을 터뜨렸다.
“잘 달린다더니 진짜네. 바가지 머리.”
바가지 머리라니.
김강산이란 이름을 알려줄까 하다가 그만두기로 했다.
딱히 가짜 이름을 밝히고 싶지도 않았다.
그나저나 얘도 보통이 아니긴 하네.
심상치 않은 근육에 어느 정도 짐작하긴 했으나.
시라크의 운동 능력은 일반적인 수준을 한참 뛰어넘고 있었다.
특별히 능력을 사용하는 거 같지도 않은데 말이다.
드드드드…!
불길한 소리에 정면을 바라봤다.
커브길이라 시야가 제한돼 그게 뭔지는 당장 알 수 없었다.
“앞에서 뭐 굴러오는데.”
“피할 준비해.”
시라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거대한 원형 눈덩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고대 함정에서나 등장할 법한 녀석이었다.
내 뒷덜미를 잡고 끌어당긴 시라크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듯한 틈으로 몸을 숨겼다.
콰가가가가가가!
그대로 굴러가며 쫓아오던 데몬을 싹 쓸어버리는 눈덩이.
시원한 광경에 감탄사를 터뜨리고 있자 시라크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여전히 환영 방식이 과격하구만.”
시라크의 말에 눈덩이가 굴러 왔던 쪽을 바라봤다.
적지 않은 인원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이 채 보이기도 전에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난 놈이 이곳엔 무슨 용건이냐?”
어깨를 으쓱이며 목소리를 낮춘 시라크가 입을 열었다.
“내가 말했지? 데리러 온다고.”
* * *
어색한 침묵과 함께 걸음을 옮겼다.
나와 시라크를 둘러싸고 있는 라피타 족 사람들.
키도가 말했던 것처럼 모두가 두툼한 털옷을 걸치고 있었다.
잘은 안 보이지만 희미한 푸른빛이 보이는 걸로 보아 모두 같은 목걸이를 착용한 듯 했고 말이다.
나이가 꽤 들어 보이긴 하지만 라피타 족 사람들은 걱정과 달리 건강한 모습이었다.
“왜 돌아온 거냐?”
“알잖아. 이곳에서 떠나자고.”
“너도 알 텐데? 돌아올 대답은 똑같다는 걸.”
일단 입을 꾸욱 다물었다.
친구 집에 놀러 왔는데 친구가 부모님한테 혼나는 느낌이었다.
“거기다 이곳에 멋대로 이방인까지 데려오다니. 무슨 생각인 거냐?”
“내가 데려온 거 아니야. 저 친구도 라피타 족을 찾고 있었거든.”
“뭐?”
그제야 걸음을 멈춘 라피타 족의 시선이 내게로 쏠렸다.
사람들을 만나고 처음으로 유의미한 관심을 받게 된 순간이었다.
“하하… 안녕하세요.”
시라크의 아버지인 족장 차냑이 날 바라봤다.
인사는 됐고 라피타 족을 찾아온 이유나 말해보라는 얼굴이었다.
“혹시 치쿠 족을 아시나요?”
치쿠 족의 생김새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대충 거대하고 털이 북슬북슬하며 댕댕이를 닮았다는 설명.
간단한 설명이 끝나자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그리고 잠시 후.
덥썩!
차냑 할아버지가 두 손으로 내 손을 붙잡았다.
“자네 치쿠 족과 만났던 건가!”
“네, 네.”
키도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추가로 더 들려주었다.
라피타 족은 마지막까지 치쿠 족을 감싸줬으며 아직까지 감사히 여긴다는 말도 함께였다.
“이럴 수가…!”
차냑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나도 실제로 치쿠 족을 보진 못했다네. 다만 우리의 선조들은 치쿠 족에 관해 항상 얘기했었지. 라피타 족과 함께 싸워준 고마운 종족이라고. 마지막엔 사람들로부터 지켜주지 못해 이곳을 떠나게 한 게 너무 미안하다고 말이야.”
냉랭하기 짝이 없었던 차냑이 내 어깨를 두들겼다.
“잘 왔네! 잘 왔어! 치쿠 족의 친구는 우리 라피타의 소중한 손님이라네! 자! 가지!”
어깨동무를 한 차냑이 날 이끌었다.
그 모습을 옆에서 벙찐 얼굴로 쳐다보고 있는 시라크.
시라크를 지나치며 살짝 손을 흔들어주었다.
“아까 한 질문이네만 이런 혹한의 땅까지 우릴 찾아온 이유가 뭔가?”
훨씬 부드러워진 목소리의 차냑.
키도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혹한의 저주 사야. 그리고 사야와 인간 사이에 태어난 존재에 대해 알고 싶어요.”
“…!!”
차냑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졌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었던 모양이다.
“계속 캐묻는 거 같아 미안하네만, 이유를 알 수 있겠나?”
“제가 찾고 있는 사람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르거든요. 물론 아직은 가능성일 뿐이고요. 저주와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존재가 제가 찾고 있는 사람인지 확인하고 싶어요.”
“그런가….”
정면으로 고개를 돌린 차냑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먼 곳을 바라보는 게 무언가 생각에 잠긴 모습이었다.
“치쿠 족의 손님이니 최대한 도와줘야겠지. 자네의 의문을 풀기엔 충분하지 않을 수도 있다네. 하지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테니 보여주도록 하지.”
생각을 마친 차냑이 희미한 미소를 그려 보였다.
“혹한의 저주와 저주가 사랑했던 소녀에 관해서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