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7화. 동굴 속으로
라피타 부족 마을에 도착해 할아버지가 그려줬던 지도와 비교해보았다.
라피타 족은 그때보다 더 깊은 곳으로 들어온 모양이었다.
사방이 얼음으로 둘러싸인 지형의 중심.
그곳에 라피타 족의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100명이 채 되지 않을 것 같은 규모였다.
“이곳이 라피타 족의 마을이라네. 날 따라오게.”
차냑은 대략적으로 마을을 소개하고 한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을에서도 제일 크게 만들어진 천막이었다.
“넌 아직도 안 가고 있는 게냐?”
걸어가던 차냑이 뒤따라오는 시라크를 흘겨봤다.
치쿠 족의 친구인 내게 대하는 것관 극명한 온도차였다.
“아니 나도 그냥 이쪽으로 가고 싶어서.”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일까.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친 시라크가 어깨를 으쓱였다.
차냑은 콧방귀를 뀌며 그러든가 말든가 하는 표정으로 계속 걸음을 옮겼다.
“여기네.”
시라크를 투명인간 취급하기 시작한 차냑이 천막의 입구를 들추었다.
안쪽에선 따스하면서도 은은한 푸른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고개를 꾸벅 숙여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오…!”
천막 곳곳엔 그림이 그려진 벽화가 놓여 있었다.
물감이나 펜 대신 푸른 돌조각으로 그린 건지 그림에선 은은한 푸른빛이 뿜어지는 중이었다.
“라피타 족의 역사라네.”
차냑이 천천히 걸으며 그림들을 설명해주었다.
그림 중엔 킹댕이 치쿠 족과 함께 있는 라피타 족이 그려진 것도 있었다.
“그리고 이게.”
한 그림 앞에서 멈춰선 차냑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혹한의 저주 사야라네.”
유난히 푸른 돌조각이 많이 사용된 그림이었다.
중심에 서 있는 남자 주위로 넓게 펼쳐진 푸른 기운.
추위를 표현한 건지 남자 주변에 있는 풀이나 꽃은 죄다 시들다 못해 죽어있었다.
“사야의 추위는 인간이 견딜 수 없는 것이었지.”
다음 그림으로 넘어가며 차냑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단 한 명. 사야의 저주를 견딜 수 있는 소녀가 있었네. 라피타 족에서 태어난 아이로 특수한 체질을 타고난 사람이었지. 둘의 만남은 우연이었어.”
라피타 족 소녀의 이름은 페리아.
어느 날 길을 잃은 페리아는 혹한 속에서 한 동굴로 들어서게 되고 거기서 만나게 된 게 혹한의 저주 사야였다.
“눈을 감아보게.”
이야기를 잠시 멈추고 말을 건네는 차냑에 두 눈을 감았다.
옆에서 팔을 휘두르는가 싶더니 얼굴로 시원한 감각이 느껴졌다.
“그림에 사용한 푸른 돌의 이름은 청광석. 그린 이의 기억을 담는 신비로운 돌이라네.”
차냑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눈앞으로 새로운 공간이 나타났다.
신기하면서도 낯설지 않은 감각이었다.
내 공명에서 시각과 청각만을 가져온 듯했다.
시야가 바뀌자 더 이상 차냑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대신 눈앞엔 푸른색 피부를 가진 사야와 라피타 족의 소녀 페리아가 서 있었다.
봉인된 건가.
사야는 몸의 절반 이상이 두꺼운 얼음에 둘러싸여 있었다.
“넌 누구냐?”
사야의 목소리가 동굴로 울려 퍼졌다.
“페리아예요. 당신은요?”
“사야.”
“사야…. 예쁜 이름이네요.”
순간이지만 사야의 얼굴이 꿈틀거렸다.
잠시 침묵하며 페리아를 바라보던 사야가 입을 열었다.
“넌 어떻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거지? 내 주변에 다가오는 모든 생명은 꺼지기 마련인데.”
“추위를 덜 타는 편이거든요. 물론 안 추운 건 아니에요.”
“처음이구나. 내 바로 옆까지 와서 얼어붙지 않은 건.”
“처음이라니. 심심하셨겠네요.”
페리아가 밝게 웃어 보였다.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웃음.
한 번도 만나본 적 없음에도 참 맑은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입가로 희미한 미소가 걸린 걸로 보아 사야도 나와 같은 생각인 듯했다.
화아아악…!
잠시 어둠이 깔리더니 다시 기억이 시작되었다.
시간상에 텀이 있는 걸로 보아 그림으로 그려지지 않은 건 보이지 않는 듯했다.
하루가 멀다하고 사야를 찾아와 대화를 나누는 페리아.
처음엔 페리아만 적극적으로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시간이 흐르며 사야도 변하기 시작했다.
감싸고 있던 얼음이 서서히 녹아내리더니 어느샌가 페리아와 나란히 앉아 대화를 나누게 된 것이었다.
그렇게 밤이 깊을 때까지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기억이 끝이 났다.
“그림으로 그려진 기억은 여기까지라네. 나머지는….”
고개를 돌린 차냑이 천막 너머를 바라봤다.
아까 들어오면서 키도에게 들었던 동굴에 관해 물어봤었다.
그리고 차냑은 그 동굴에 관해 알고 있었다.
사야와 페리아의 유실된 이야기가 담긴 장소.
키도의 말대로 라피타 족에서 그곳에 들어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입구부터 몰아치는 혹한의 추위에 감히 발 들일 상상조차 하지 못한 것이었다.
“날이 밝는 대로 데려다주도록 하지. 밤엔 찾기 힘든 장소니까.”
“감사합니다. 차냑 님.”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말게나. 그곳은 여태까지 아무도 들어가지 못한 동굴이라네. 거기까지 가서 실망할까 봐 걱정이군.”
“걱정하지 마세요.”
밝게 웃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제가 또 추위에 엄청 강하니까요!
여전히 걱정스런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차냑.
몸을 돌린 차냑이 천막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일단 밖으로 나가지. 손님에게 아무것도 안 내어주는 건 예의가 아니니까.”
여기까지 말하고 잠시 말을 멈춘 차냑이 시라크를 돌아봤다.
“너도 그렇게 멍청한 표정으로 서 있지 말고 따라와라. 도망간 놈이라도 밥은 먹여야 하니.”
냉랭한 듯하면서도 따듯한 말을 한 차냑이 밖으로 나가고.
날 보며 어깨를 으쓱이는 시라크와 함께 차냑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 * *
담백한 순록 고기로 푸짐한 식사를 마친 후.
차냑이 알려준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느 정도 걸어가자 모락모락 올라오는 김이 눈에 들어왔다.
“와우.”
절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혹한의 추위와 설산 속에 피어나는 온천의 수증기라니.
보고 있으면서도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조심스럽게 온천으로 발을 뻗었다.
발끝이 닿았을 뿐인데도 제대로 느껴지는 온천의 엄청난 열기.
“끄어어어!”
목까지 푸욱 담그자 나도 모르게 환희 가득한 비명이 나왔다.
얼굴은 당장에라도 얼어버릴 것처럼 추웠지만 아래쪽은 뜨끈한 것이 극락이 있다면 바로 이곳이란 생각이 들었다.
“죽이나 보네.”
뒤따라온 시라크가 온천으로 몸을 날렸다.
“캬아아아! 죽이는구만! 영감이 여기로 마을을 옮긴 이유가 있었어!”
시라크도 참지 못하고 감탄사를 뱉어냈다.
양손엔 아까 식사 때 마시던 술병까지 들려있었다.
배운 놈이군.
고개를 끄덕이며 시라크가 든 술병을 노려보았다.
당장 가져오라는 내 강력한 의지가 느껴진 건지 시라크가 술병 하나를 던져왔다.
기다렸다는 듯이 받아 뚜껑을 열고 입으로 가져가자 시라크도 술병을 기울였다.
“키아아아아!”
“크으으으으!”
오늘 처음 만난 두 인간의 목소리가 설원의 온천으로 울려 퍼졌다.
그렇게 한참 술병을 기울이다 입을 열었다.
“넌 왜 이곳에서 부족이 떠나길 바라는 거야?”
시라크가 찾아온 이유는 간단했다.
아버지인 차냑을 포함해 라피타 족이 이곳을 떠나도록 설득하기 위해서였다.
잠시 생각하던 시라크가 입을 열었다.
“아까 모인 라피타 사람들 봤어? 몇 명이나 되는 거 같아?”
“음… 한 50명?”
“원래는 그것보다 열 배는 더 많았어. 다 죽어버렸지만.”
씁쓸한 목소리로 말하는 시라크에 술병을 내려놓고 귀를 기울였다.
“라피타 족은 승산 없는 싸움을 하고 있어.”
손을 든 시라크가 광활한 설원을 가리켰다.
“저 넓은 땅에서 데몬은 끝도 없이 몰려들고 있지. 라피타 족은 점점 숫자가 줄고 다쳐가며 약해지는 중이고. 어느 방면으로 보나 절대 이길 수 없는 싸움이야.”
시라크의 말대로 라피타 족에겐 승산이 없었다.
데몬은 저 너머의 세계에서 끝도 없이 몰려올 터였다.
“그럼에도 라피타 족이 여길 안 떠나는 이유가 뭐야?”
“은혜이자 속죄.”
짧게 말한 시라크가 술병을 기울였다.
“아까 말했었지? 이 땅을 아주 오랫동안 지켜주던 존재가 있었고, 지금은 약해져서 되려 데몬을 불러들이는 중이라고. 아버지는 그 존재에게 깊이 고마워하면서도 동시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고 있어. 대가 없이 땅을 지켜준 것에 대한 고마움, 그리고 그걸 알면서도 존재가 약해질 때까지 홀로 싸우게 내버려 뒀다는 죄책감. 그래서 떠나지 않으려는 거야. 목숨을 건질 수 있을지언정 평생 죄책감에 시달릴 거라고.”
천막에서 본 기억 이후로도 차냑은 자신이 어렸을 때부터 듣고 자란 이야기를 조금 더 해줬었다.
시간이 지나며 서로를 사랑하게 된 사야와 페리아 사이엔 아이가 있었고.
이 아이가 오랫동안 이곳을 지켜온 존재라는 것이었다.
시라크의 말로 미루어봤을 때 라피타 족은 이 아이에게 속죄하기 위해 싸움을 이어 나가는 모양이었다.
내가 공명에서 봤던 녀석이려나.
내일 동굴에 가서 무언가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속단할 수 없었다.
다만 이야기를 미루어봤을 때 겹치는 부분이 적지 않았다.
소녀에게서 느껴졌던 엄청난 한기와 지독한 외로움.
분명 연관이 있을 것 같았다.
“여길 떠나면 방법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바위로 몸을 기댄 시라크.
두 눈을 감은 시라크가 약간 취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넓은 곳으로 가면 이 땅과 라피타 족을 구할 방법이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아니더라고. 오히려 더 추악하고 더 더럽더군. 그중에서도 빛나는 사람은 있었지만 말이야. 어쨌든.”
시라크가 내뱉은 새하얀 입김이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방법을 찾겠다고 나가고선 빈손으로 돌아오고 말았구만. 도망자라 불려도 할 말 없다.”
“도망자는 아니지.”
“…?”
감았던 눈을 뜨고 날 바라보는 시라크에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돌아왔으니까.”
잠시 멍하니 날 쳐다보던 시라크가 입가로 미소를 그렸다.
“그런가.”
* * *
날이 밝은 설원의 아침.
꽁꽁 싸맨 채로 거대한 동굴 앞에 섰다.
여기가 키도 님이 들어가지 못했던 동굴이구만.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 날 안내해 준 차냑이 입을 열었다.
“일단 들어가면 아무도 자넬 구해 줄 수 없네. 그래도 가겠는가?”
“당연하죠. 유실된 이야기가 담긴 동굴. 제가 찾는 게 여기에 있을 거 같진 않지만 적어도 단서는 얻을 수 있을 테니까요.”
여전히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차냑에.
안쪽으로 성큼성큼 걸으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아직 초입 부분인데도 키도가 왜 돌아섰는지 알 것 같았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점점 강해지는 한기.
아직은 견딜만했지만 안쪽까지 갔을 땐 라의 불꽃을 꺼내야 할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 정도로 한기는 강력했다.
“와 보길 잘했네.”
강해지는 건 한기뿐만이 아니었다.
몸으로 스며드는 한기가 선명해질수록 내 확신도 강해지고 있었다.
분명했다.
지금 몸을 감싼 한기의 기운은 공명에서 봤던 소녀의 한기와 동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