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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왕이 헌터로 회귀했다-408화 (408/473)

408화. 저주의 이야기

동굴 안은 푸른빛으로 뒤덮여 있었다.

라피타 족 천막에서 봤던 청광석 느낌은 아니었다.

검은색이 섞여서인지 시리다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 푸른빛.

그리고 이런 느낌에 비례해 실제로 느껴지는 추위도 엄청났다.

여기까진가.

라는 생각이 나도 모르게 들 정도.

양팔로 몸을 감싸고 걸음을 내디뎠다.

처음엔 아름다운 광경에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었는데.

이젠 목이 굳은 건지 아니면 추위에 질린 탓인지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이게 혹한이지.”

간신히 입을 떼며 고개를 끄덕였다.

새삼스럽게 아일랜드에서 만난 칼마는 따듯한 녀석이었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누구냐?]

“!?”

안쪽으로 얼마나 들어갔을까.

목소리가 들려왔다.

물론 일반적인 목소리는 아니었다.

귀가 아닌 머리로 바로 전달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혹한이 저주, 사야.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직접 듣는 건 처음이지만 천막에서 청광석을 통해 들어봤었기 때문이다.

“사야 님이시죠?”

[내 이름을 아는구나.]

“찾으러 온 사람 이름을 모르면 안 되죠.”

순간 사람이라 불러도 되는 건가 의문이 들었지만 사야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죽으러 들어온 줄 알았는데 아니구나.]

“그럴리가요. 삶에 대한 집착만 따지면 제가 세계 1등인데.”

천연덕스럽게 말을 건네며 주위를 둘러봤다.

들려오길래 일단 대답은 하고 있지만 사야가 어디서 말하고 있는 건지 영 감이 잡히지 않았다.

어떻게 내 머리로 직접 목소리를 흘려보내고 있는 건지도 알 수 없었고 말이다.

[날 찾는 거라면 그럴 필요 없다. 난 존재하지 않으니.]

“…?”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자 사야가 말을 이었다.

[조금 더 들어올 수 있겠느냐? 한기가 더 강해질 거다.]

고개를 끄덕이며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등장하는 원형의 공간.

청광석의 기억에 등장한 공간이었다.

사야와 페리아가 처음 만난 장소이자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눴던 공간.

공간엔 페리아가 앉았던 작은 얼음 의자가 놓여 있었다.

[앉아라. 주인이 사라진 의자니까.]

무릎을 바싹 모으고 몸을 앉혔다.

엉덩이가 시리긴 했지만 조금은 앉아 있어도 될 것 같았다.

[네가 제 발로 날 찾아온 두 번째 인간이다. 날 찾아온 이유가 뭐지?]

“찾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찾고 있는 사람?]

“사야 님과 똑같은 한기를 가진 여자아이입니다.”

사야가 무언가 말을 한 건 아니었다.

다만 공간에 들어오며 나와 연결된 건지 사야가 크게 동요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여기로 오기 전에 라피타 족을 만났습니다. 거기서 한 기억을 봤죠. 사야 님과 페리아 님의 기억이었습니다. 그리고 부족분들이 말씀해주셨습니다. 두 분 사이에 아이가 있었다고요.”

[… 네 말대로 나와 같은 한기를 가질 수 있는 존재는 단 한 명뿐이다. 나의 딸이지. 다만…. 다시 한번 묻지 않을 수 없구나. 너 누구냐?]

사야의 목소리엔 짙은 경계가 깔려있었다.

[난 실존하지 않지만 알 수 있다. 네가 말도 안 되는 힘을 가진 존재라는 걸. 애초에 한기를 견뎌내며 여기까지 들어왔다는 게 그 증거겠지. 어째서 너 같은 존재가 나의 딸을 찾는 거냐?]

“제 이름은 백운입니다. 전 오래 지난 기억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조건 없이 원하는 대로 볼 수 있는 건 아니고요. 함께 할 수 있는 동료인 경우에만요.”

[동료…. 말해줬으면 좋겠구나. 네가 봤다는 기억.]

날 의심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단지 사야는 궁금해하고 있었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딸에 대한 기억을 말이다.

말해줘도 되나.

약간 고민이 됐다.

내가 본 기억은 결코 행복하거나 아름다운 게 아니었다.

소녀가 아주 오랜 시간동안 홀로 싸우다 외로움과 고독이란 심연에 점점 집어 삼켜지는 기억이었다.

아버지 입장인 사야가 들었을 때 힘들 수 밖에 없는 기억.

[어떤 기억이든 좋다. 있는 그대로 말해주길 바란다.]

고개를 끄덕이고 데몬의 세계에서 봤던 기억을 말해주었다.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아무 말 없이 귀를 기울이는 사야.

내가 공명으로 봤던 걸 다 말하고 입을 다물자 나지막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그 한 번의 한숨 속엔 많은 게 담겨 있었다.

[결국… 그렇게 되어버렸구나.]

처음보다 훨씬 가라앉은 목소리.

사야는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자 피부로 서늘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보여주도록 하마.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이다.]

머리를 채운 사야의 목소리가 흩어짐과 동시에.

주변을 가득 채운 얼음 조각에서 빛이 흘러나왔다.

* * *

조금씩 잦아드는 빛에 감았던 눈을 떴다.

방금 서 있던 동굴 안이었지만 시점이 달랐다.

황량한 얼음만이 가득했던 공간엔 어울리지 않는 아기자기한 물건들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페리아가 무언가를 안고 환하게 웃는 중이었다.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다.”

이번엔 귀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옆엔 혹한의 저주 사야가 서 있었다.

분위기가 완전 다르긴 하지만 저주라고 하기엔 너무나 인간스러운 모습이었다.

내 궁금함을 알아차린 건지 사야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이건 내 모습이 아니다. 모든 걸 얼려버리는 혹한의 저주를 감싼 껍데기일 뿐이지.”

페리아에게 다가가는 사야를 따라 나도 걸음을 옮겼다.

페리아는 어린아이를 안고 있었다.

내가 공명으로 봤던 것보단 훨씬 전인지 아이는 작았지만.

특유의 푸른 피부와 몸에 새겨진 문양으로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데몬의 세계에서 봤던 그 아이였다.

“아이의 이름은 헤스티아. 혹한의 저주를 그대로 타고났음에도 불의 이름을 가진 아이지.”

들어본 이름이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난로와 불의 여신으로 행복을 관장하는 신.

헤스티아를 내려다보던 사야가 이야기를 계속했다.

“헤스티아가 태어난 날 난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지독한 혹한의 저주가 대물림 될 거란 걸 알았기 때문이다.”

“사야 님의 힘 말씀인가요?”

사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게 깃들었던 저주의 힘은 전부 헤스티아에게 옮겨졌다. 평생을 홀로 한기와 고독 속에 살아온 삶을 그대로 줘버리고 만 거지.”

느껴지는 한기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페리아 같은 특수한 존재가 아니라면 사야나 헤스티아 근처에 오는 순간 목숨을 잃게 될 터였다.

그게 무엇이든 이 한기는 절대 견뎌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이기적이게도… 이런 부정적인 기억은 금세 씻겨나가 버리더구나.”

페리아의 품 안에 있던 헤스티아가 밝게 미소를 지었다.

세상 아무 걱정 없는 해맑은 웃음이었다.

“신기한 감각이었다. 항상 생명을 지워만 오던 내 곁에 이런 작고 예쁜 존재가 있다니. 보기만 해도 차갑게 얼어있던 것들이 녹아내리는… 아주 오랜 시간 저주로 존재해 온 나에겐 과분한 것이었지.”

진행되는 기억의 배경은 동굴뿐이었으며 등장하는 이도 사야와 페리아, 헤스티아 세 명이 전부였다.

헤스티아도 사야와 마찬가지로 한기를 타고나 밖으로 나가 다른 사람을 만나는게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헤스티아가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부터였다. 페리아의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한 건.”

사야가 안타까운 눈으로 페리아를 내려다봤다.

“난 대부분의 힘이 동굴에 봉인되어 있었다. 내 스스로 이 지독한 한기를 누르기 위해 한 봉인이었지. 하지만 헤스티아는 아니었다.

내 한기의 힘을 그대로 대물림받아 그야말로 순수한 한기의 결정체였지. 그리고 페리아는 이런 헤스티아의 한기를 버텨내지 못했다. 난 어리석게도… 그걸 몰랐었고.”

빨리 감기를 한 것처럼 스쳐 지나가는 얼음의 기억.

사야가 눈치채지 못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페리아는 필사적으로 한기의 고통을 티 내지 않으며 견뎌내고 있었다.

그게 사랑하는 아이 곁에 머무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란 걸 알았기 때문이다.

“뒤늦게 알아챈 난 내가 한 것처럼 헤스티아의 힘을 봉인하려고 했다. 그래야만 페리아의 건강이 더 악화되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페리아는 그걸 원하지 않았다. 헤스티아가 동굴 안에서 평생을 보내길 바라지 않았던 거야.”

기억에서 페리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작부터 페리아는 헤스티아에게 주문처럼 같은 말을 되뇌고 있었다.

“헤스티아. 네게도 분명 있을 거야. 평생을 함께 해줄 사람이 말이야.”

“내 곁에 오면 전부 얼어버리고 마는데?”

“그렇지 않은 사람이 꼭 있을 거야. 아빠가 오랫동안 기다려서 엄마를 만난 것처럼. 그러니까 외롭고 힘들어도 절대 포기하면 안돼. 언젠간 꼭 우리 헤스티아의 손을 붙잡아 주는 사람이 나타날 거니까.”

“정말?”

“정말이고 말고.”

얼음이 흩어지며 세 사람의 모습이 지워졌다.

그리고 얼음이 다시 모였을 때 페리아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기억 속의 동굴에는 멀뚱히 앉아있는 소녀와 점점 희미해지기 시작한 사야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헤스티아에게 모든 힘을 준 나도 존재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틈이 날 때마다 헤스티아를 동굴 밖으로 내보냈었지. 사람들이 사는 마을 쪽으론 보내지 못했지만 더 넓은 곳을 돌아다니게 했어. 그리고 누가 시킨 게 아님에도 헤스티아는 주위에 나타나 인간을 위협하는 존재들을 지워나가기 시작했다. 아마 인간인 페리아의 영향이었겠지.”

어느 시점이 되자 희미해지던 사야의 몸이 얼음 결정으로 흩어져 내렸다.

사라지며 헤스티아에게 마지막 말을 남기는 기억 속의 사야.

“언젠가 꼭 나타날 거다. 그러니 춥고 외로워도 조금만 기다리고 견디거라.”

사야의 말을 마지막으로 기억은 끝이 났다.

암흑으로 뒤덮인 주변.

사야가 덤덤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나까지 사라진 후 헤스티아는 해왔던 것처럼 홀로 이 땅을 지켜왔을 거다. 그리고 네가 말한 세계까지 흘러 들어가 버린 모양인 듯하고.”

잠시 눈을 감고 무언가를 느낀 사야가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지금은 이곳에 있구나.”

“…!”

“아주 희미하지만 헤스티아의 한기가 느껴진다.”

시라크와 차냑의 말이 떠올랐다.

이곳을 지키던 존재의 기운이 약해지며 되려 데몬이 몰려드는 중이라고 두 사람은 말했었다.

차냑은 그 존재를 홀로 두지 않기 위해 설원을 떠나지 않은 거였고 말이다.

여기에 있구나.

공명을 만났던 세계에서도 데몬들은 말했었다.

인간을 다시 몰아내야 한다고.

괜한 말을 한 게 아니었다.

데몬의 세계까지 흘러들어 갔던 헤스티아는 다시 되돌아온 것이었다.

“난 불안했다. 기다리고 견디라고 말했지만 헤스티아에게 그런 존재가 나타나지 않을까 봐. 그래서 마지막 힘을 끌어모아 동굴에 내 사념을 남겨두었다. 혹시라도 동굴의 한기를 버텨내고 들어오는 이가 있다면… 염치없지만 부탁하고 싶었다.”

날 바라보는 사야의 형체가 흩어지기 시작했다.

동굴에 남겨두었던 사념의 힘이 다한 모양이었다.

무언가 말하고자 하는 사야에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디에 있든 끄집어낼 생각이에요. 그게 만약 끝이 보이지 않는 깊은 심연이라면, 그 심연을 다 부수고 불태워서라도요. 그러니까.”

주먹을 움켜쥐며.

“걱정하지 마세요.”

입가로 밝은 미소를 그렸다.

“그런가….”

말끝을 흐린 사야의 형체가 완전히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안심했다는 듯 미소를 머금은 채 흩어진 사야.

찰나의 순간, 목소리가 들린 건 아니지만 사야가 남긴 마지막 말이 머릿속으로 스며들었다.

[고맙구나.]

잠시 기다리고 있자 날 감쌌던 어둠이 사라지고 처음 들어왔던 동굴의 공간이 나타났다.

동굴에선 더 이상 어떠한 한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사방에 퍼져 있던 푸른빛도 사라진 채였다.

“후우우우!”

크게 숨을 내뱉고 출구 쪽으로 몸을 돌렸다.

데리러 갈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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