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9화. 손 치워라
“몇 시간이나 지난 거지.”
동굴을 나가 주위를 둘러봤다.
분명 들어올 땐 밝았었는데 지금은 설원으로 어둠이 깔려있었다.
입구에서 기다린다고 했던 시라크와 차냑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거라곤 입구 구석에 덩그러니 놓인 내 배낭뿐이었다.
배낭으로 다가가 핸드폰을 꺼냈다.
가지고 들어갔다간 또 해먹을까봐 두고 간 것이었다.
# 2:00AM.
“두 시요?”
입이 벌어졌다.
체감상 두 시간도 안 지난 거 같은데 하루가 훌쩍 사라졌었다니.
사야의 기억에서 생각보다 오랜 시간을 보낸 모양이었다.
“시라크 이 친구 안되겠구만. 라면도 줬는데 그냥 가버려? 의리가 없는 친구구만 이거.”
꼬로록거리는 배에 일단 바닥에 앉아 배낭을 펼쳤다.
아침에 출발하며 차냑이 챙겨준 도시락.
도시락 통을 열어 우물거리며 주위를 살폈다.
“멀지 않다고 했었지.”
일단 라피타 족 마을로 가봐야 할 것 같았다.
데몬의 세계에서 돌려보내진 헤스티아가 잠든 공간.
작은 단서라도 알고 있는 게 없는지 물어볼 생각이었다.
“지금은 가도 다 자고….”
콰앙!!
“!?”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설원으로 울려 퍼지는 거대한 굉음.
혹시나 했지만 라피타 족 마을은 아니었다.
그것보다 훨씬 더 먼 곳이었다.
눈을 감고 스쳐 지나가는 바람에 정신을 집중했다.
아주 작고 희미하지만 바람을 타고 분명 들려오고 있었다.
누군가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소리가 말이다.
[이카로스 - 칼데아 윙]
도시락을 내려놓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시야가 트이는 고도까지 올라가니 확실히 보였다.
저 너머에서 쉴 새 없이 부딪히는 불꽃들.
쇠와 쇠의 부딪힘은 기본으로 정체불명의 에너지들이 사방으로 쏘아지고 있었다.
“이건 또 뭐냐.”
나도 모르게 미간이 찌푸려졌다.
입이 벌어질 정도로 엄청난 숫자였다.
새하얀 설원을 새카맣게 물들인 데몬이 지금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장소로 몰려가고 있었다.
사람만 한 크기의 데몬부터 설원 일부분을 가득 채울 정도로 거대한 데몬까지.
가지각색의 데몬이 모여 있었다.
저곳에 뭐가 있길래?
생각이 여기까지 다다르자 머리를 스치는 게 있었다.
이곳 설원 어딘가에 잠들어 있을 헤스티아.
데몬이 설원으로 몰려든 이유는 자신들을 몰살했던 헤스티아의 힘을 완전히 잠재우기 위해서였다.
그런 놈들이 지금 새카맣게 몰려가고 있다는 건.
저기구나.
데몬들이 몰려가는 방향으로 연기를 터뜨렸다.
데몬은 종이 다르면 웬만해선 서로 협력하지 않았다.
예외가 있다면 두 가지 정도.
지난번 헤키리스 때처럼 확고한 지휘체계가 있거나 아니면 명확한 공공의 적이 존재할 때였다.
저 너머에서 싸우고 있는 건 라피타 족인가.
고개를 내려 미친 듯이 내달리는 데몬들을 바라봤다.
라피타 족은 많아 봐야 100명이 채 되지 않는 전력이었다.
이것들이 그대로 다 도착했다간 아비규환이 펼쳐질 터였다.
쿵!
아래로 착지하자 내달리던 데몬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날개를 집어넣고 정면을 응시했다.
시야를 다 가릴 정도로 날 둘러싼 데몬들.
“크라아아악!!”
잠시 멍때리던 놈들이 일제히 내게로 쏟아져 왔다.
데몬으로 만들어진 해일이 있다면 이런 느낌일 것 같았다.
[앤 보니&메리 리드 - 동기화]
등 뒤로 생겨나는 앤 보니와 메리 리드의 형체.
자세를 낮추며 여섯 자루의 리볼버를 데몬들에게 겨누었다.
일단 한바탕 쏟아내고 시작할 생각이었다.
[데스페라도]
여섯 개의 총구에서 불이 뿜어졌다.
한두 방에 죽지 않는 놈도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한 방이 안 되면 두 방, 두 방이 안 되면 세 방을 박아 넣으면 그만이었다.
두두두두두두두두두-----!!
세 명이서 자리를 바꾸며 사방으로 쏘아 내길 한참.
마지막 한 발까지 쏘아내고 주위를 둘러봤다.
당장 주변에 남은 데몬은 없게 됐지만 그뿐이었다.
이젠 한가득 쌓여있던 눈까지 파헤쳐지며 새로운 데몬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일단 합류해야겠네.
[사사키 코지로 - 스이카]
앞으로 달리며 발도를 쉴 새 없이 뿌려냈다.
귀를 찢는 비명과 함께 넓게 뿜어지는 백색 검기.
대부분의 데몬은 몸이 조각나며 바스러졌지만 검기를 피하거나 버텨내는 놈들도 있었다.
낮은 등급의 어중이떠중이 데몬만 있는 게 아니란 증거였다.
한참을 달리며 검기를 뿜어내고 있을 때 머리 위가 어두워졌다.
어?
본능적으로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하늘에선 거대한 검은색 뱀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뱀이라기보단 이무기라고 부르는 게 더 맞을 듯한 크기.
순간 데몬인 줄 알았지만 그건 아니었다.
약간 반투명한 것이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누군가의 힘이었다.
콰아아아앙!!
바닥으로 떨어지자 모여 있던 데몬들이 순식간에 짓뭉개졌다.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내려앉은 이무기는 몸을 비틀고 흔들며 데몬을 처리해나갔다.
한 방으로 끝이 아니라 저 정도로 지속되며 주변을 휩쓸어대는 광역기라니.
이런 답도 없는 숫자에도 아직까지 밀리지 않은 건 저 힘 덕분인 듯했다.
쐐에에에에엑!
“오씨.”
몸을 뒤로 젖히며 날아드는 이무기의 꼬리를 피해냈다.
정신없이 싸우느라 이쪽에 내가 있다는 걸 모르는 것 같았다.
다시 발도를 뿌리며 걸음을 옮겼다.
이무기 외에도 안쪽에선 여러 빛깔의 에너지나 불을 머금을 화살 등이 쏘아지고 있었다.
슈팅 게임 같네.
전부 다 피하며 나아가다 앞에 쌓여있는 데몬들의 시체를 밟고 하늘로 몸을 날렸다.
도약하자 안쪽의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시라크였다.
최전방에서 데몬을 막아내고 있는 시라크.
시라크의 몸 주변으론 반투명한 검은색이 뱀이 똬리를 트고 있었다.
아까 봤던 이무기는 시라크의 힘인 것 같았다.
라피타 족 사람들은… 안 좋은 거 같고.
차냑을 포함한 부족 사람들도 쉬지 않고 공격하며 시라크를 지원하고 있었다.
시라크가 전방을 막아주고 있는 덕에 큰 부상은 없는 것 같았다.
다만 전투가 오래 지속된 건지 부족 사람들은 많이 지쳐있었다.
활을 잡은 손은 불안정하게 떨렸으며 입에선 거친 입김이 쉴 새 없이 뿜어졌다.
“백운!?”
날 발견한 시라크가 정면에서 뱀을 거둬냈다.
얼굴을 포함한 온몸은 데몬의 피로 물들어 있었다.
스이카에 손을 올려둔 채 시라크 옆에 서며 자세를 낮췄다.
“나 그냥 휙 버리고 간 줄 알았네. 어떻게 된 거야?”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콰앙!
다시 한 차례 데몬을 쓸어낸 시라크가 입꼬리를 올렸다.
“오늘이 최후의 결전 그런 거였나 봐.”
내가 동굴로 들어간 직후였다고 한다.
설원을 감싸고 있던 공기가 뒤바뀌기 시작한 것은 말이다.
“한기가 옅어지나 싶더니 나타나더군. 다짜고짜 여기로 향하기 시작했고. 그리고 라피타 족의 막무가내 족장님은 여길 지켜야 한다고 냅다 달려왔고 말이야.”
뒤에 서 있는 차냑을 돌아봤다.
내 시선을 느낀 건지 땀범벅인 차냑이 뒤를 돌아봤다.
뒤엔 거대한 얼음 조각이 돋아나 있었다.
아직도 대부분이 눈으로 뒤덮여 있는 걸 보니 평소엔 작은 설산 정도로 보였을 것 같았다.
허.
아래가 눈으로 덮여 자세히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위쪽의 얼음으로 희미한 황금색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드러난 부분을 보니 얼음의 색도 일반적이지 않았다.
혹한의 저주 사야의 얼음.
공명과 조금 전 들렸던 동굴을 채웠던 얼음과 똑같았다.
“저 얼음 기둥이 이 설원을 지키고 있던 힘이네.”
“족장님. 이것들 상대로 언제까지 싸울 생각이야? 물러나야 한다고.”
시라크의 말에 차냑이 고개를 흔들었다.
물러나는 대신 두 팔을 들어 올리는 차냑.
차냑의 손바닥 아래로 작은 눈보라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저게 이곳에 있는 이상 라피타 족은 떠날 수 없다. 이곳에서 다 죽을지언정 말이야.”
옆으로 늘어서 있던 라피타 족도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의 흔들림이나 망설임도 없는 표정이었다.
“쯧.”
혀를 찬 시라크가 다시 데몬들에게 집중하자 차냑이 날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존재를 지키고 있던 얼음이 녹고 있네. 얼마 지나지 않아 무방비 상태가 될 거야.”
차냑의 말대로 얼음 조각은 녹아내리는 중이었다.
이대로라면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지금 가서 얼음을 마저 녹이고 꺼내야 하는 건가 생각하고 있을 때.
드드드…!
바닥에서 진동이 전해졌다.
점점 커지는가 싶던 진동은 어느새 지진으로 돌변해 설원 전체를 흔들어 대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바닥의 눈을 헤치며 말도 안 되게 거대한 데몬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딴 거까지 나온다고….?”
팔과 다리를 가진 데몬은 끈적한 질감의 검은색 액체로 이루어져 있었다.
밤하늘 높은 곳까지 치솟아 거친 포효를 내지르는 데몬.
눈에 띄는 게 있다면 놈의 한쪽 팔이 없다는 것이었다.
꿈틀.
“조심해요!”
잠시 멈춰있는가 싶던 놈의 몸에서 수천 줄기의 촉수가 뻗어 나왔다.
끼아아아아아아악----!
발도를 뿜어내 이쪽으로 쏟아지는 촉수를 잘라냈다.
뭐 하는 새끼냐 이건.
촉수는 대상을 가리지 않았다.
녀석은 닥치는 대로 촉수에 잡힌 데몬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잡아먹고… 있다?
녀석에게 달라붙은 데몬들은 생명력을 빨리는 것처럼 순식간에 말라비틀어졌다.
반대로 동족을 빨아들인 놈의 덩치는 점점 더 커졌고 말이다.
놈이 못해도 천 마리가 넘는 동족을 빨아들였을 때.
하늘에서 기분 나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간… 되었다.”
단순히 덩치만 커지는 게 아닌 듯했다.
어눌하지만 정확히 의사를 표현하고 있는 데몬.
잠시 멈춰있던 데몬이 길고 두꺼운 다리를 내뻗었다.
“숙적… 먹는다.”
데몬의 시선은 우리를 향해 있지 않았다.
바라보고 있는 건 뒤에 놓인 얼음 조각.
조금 전 놈이 말한 숙적은 헤스티아를 말하는 것 같았다.
이런 샹!
거대한 크기 덕에 몇 발자국 걷지 않았음에도 놈은 얼음 조각 근처에 도달해 있었다.
“뭐해 안 가고. 저기에 볼일이 있는 거잖아.”
“…!”
데몬을 막고 있던 시라크가 날 돌아봤다.
뭘 밍기적거리고 있느냐는 얼굴이었다.
“쓸데없는 걱정이다. 여긴 나 혼자 있어도 충분해.”
얼음 기둥으로 가야 한다는 건 알았지만 찰나의 순간 난 망설였었다.
끝도 없이 쏟아지는 데몬과 지쳐있는 라피타 족.
이들을 못 본 척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가라.”
검은 뱀으로 몸을 휘감은 시라크.
할 말은 끝이라는 듯 시라크가 고개를 돌렸다.
“자네뿐이네. 저곳으로 갈 수 있는 건.”
차냑을 시작으로 주저앉아 있던 라피타 부족민들까지 일어났다.
시라크 옆으로 늘어서 내게 등을 보이고 있는 사람들.
“라피타 족은 약하지 않네. 자네와 우린 각자 주어진 일을 하면 되는 거야.”
말을 마치고 다시 힘을 끌어올리는 차냑에.
“금방 오겠습니다.”
[이카로스 - 칼데아 윙]
날개를 펼치고 얼음 기둥 쪽으로 연기를 터뜨렸다.
어느새 놈은 얼음 기둥 쪽으로 거대한 손을 뻗고 있었다.
“야이 데몬 새끼야. 그 더러운 손.”
오른손으로 연기를 끌어모아 놈의 손으로 휘둘렀다.
“당장 안 치우냐!!!”
콰아아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