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0화. 손을 뻗다
“방해…!”
드디어 거인 데몬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온통 검은색 액체지만 두 눈동자만큼은 붉게 일렁이는 녀석.
화가 난 건지 날 바라보던 놈이 촉수를 뻗어왔다.
“나 촉수 싫어한다고 이 새끼야!”
연기로 촉수를 막아내며 하늘을 빙글 돌았다.
방금 쳐냈을 때도 느꼈는데 착각이 아니었다.
연기를 이용한 공격은 놈에게 통하지 않고 있었다.
그저 잠시 흩어졌다 다시 합쳐질 뿐이었다.
흩어지는 과정에서 그나마 사라진 것도 아래에 득실대는 데몬을 흡수해 다시 복구하는 중이었고 말이다.
이거 모양새가 비슷한데.
오이먀콘까지 타고 왔던 열차가 떠올랐다.
서리 구울의 성체를 빨아먹고 있었던 지하층.
끈적이는 감각부터 성체에 들러붙어 있던 촉수까지 겹치는 부분이 많았다.
어떻게 죽여야 하나.
촉수를 막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몸에서 딱히 약점이라고 할만한 것도 보이지 않았다.
온통 흐물거리는 액체뿐이라 때려봐야 조금 전과 똑같은 결과일 듯했다.
확인해볼까.
촉수를 피해 높은 상공까지 올라갔다.
놈의 몸이 한 눈에 보이는 위치.
칼데아를 집어넣고 아래로 떨어지며.
[쿠훌린 - 게이볼그]
창을 꺼내 들었다.
만약 놈에게도 사람의 심장 같은 게 있다면 보일 터였다.
아래로 떨어지며 한참 놈의 몸을 살피다.
없다고?
눈을 찌푸렸다.
아무리 살펴도 놈의 심장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마치 외관에 보이는 검은 액체가 온몸을 구성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숙적… 먹는다…!!!!”
갑자기 포효한 놈이 몸의 형태를 바꿔나갔다.
커다란 거인 형태에서 원형의 소용돌이로 모습을 바꾼 데몬.
잠시 꿀렁이는가 싶더니 놈의 몸이 얼음 기둥으로 쏟아졌다.
검은 액체의 양이 하도 많아 약간의 틈도 없이 빼곡히 덮여버린 얼음 기둥.
자신 이외의 출입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덮인 액체 주변으로 날카로운 촉수가 돋아났다.
이 질퍽이 새끼가…!
창을 뒤로 젖히며 빠르게 얼음 기둥으로 내려갔다.
내가 온다는 걸 안 건지 녀석의 촉수가 날아들었다.
시야를 전부 가릴 정도로 엄청난 수의 촉수.
촉수를 피해 옆으로 몸을 틀거나 하진 않았다.
날아오는 촉수를 향해 그대로 창을 뻗었다.
[심장을 꿰뚫는 창]
콰가가가가가가가!!
촉수를 뚫어내며 계속해서 아래로 나아갔다.
완전히 소멸하지 않은 탓인지 게이볼그에 부딪히며 흩어졌던 촉수가 다시 날카로운 검으로 변해 내 뒤를 쫓고 있었다.
[이카로스 - 칼데아 윙]
옆과 정면에서도 쏟아지는 공격에 연기로 주변을 감쌌다.
지금 내 위치는 완전히 소멸시킬 수 없는 적의 중앙.
여기까지 온 이상 뒤로 물러나거나 할 생각은 없었다.
놈의 영향인지 그나마 형태를 유지하던 얼음 기둥은 이제 사라지기 직전이었다.
“방해… 죽인다…!!”
우렁찬 포효가 들려왔다.
잠시 후 정면에서 거대한 주먹이 만들어졌다.
내가 내려오는 동안 힘을 끌어모은 건지 조금 전까지 쏟아지던 공격과는 차원이 다른 강도였다.
그리고 녀석의 주먹 너머에서 빛나고 있었다.
검은색 얼음 조각에 둘러싸인 황금빛이 말이다.
[유탈라스 - 1단계 의태]
“좀 꺼져!!”
날아드는 공격에 비늘로 둘러싼 주먹을 아래로 내리꽂았다.
커다란 굉음과 사방으로 흩어지는 녀석의 주먹.
멈추지 않고 계속 뚫어내며 아래로 나아갔다.
흩어지는 놈의 액체 사이로 황금빛이 새어들었다.
마지막 한 겹의 액체까지 뚫어내고 빛을 향해 손을 뻗었다.
빛으로 둘러싸인 건 얼음으로 만든 조각상이었다.
찰나의 순간이지만 조각상으로 만든 게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혹한의 저주 사야와 라피타 족의 페리아.
헤스티아가 그 둘에게 행복한 얼굴로 안겨 있는 조각상이었다.
화아아아악!!
* * *
예상했던 대로 엄청난 한기가 몰아쳤다.
“후우우우우…!”
숨을 뱉어내자 새하얀 입김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호흡을 가다듬으며 조금이라도 몸을 한기에 적응시킨 후.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직 공명으로 공간이 안 만들어진 건가 했는데 아니었다.
온통 암흑으로 가득 쌓인 공간.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뎌 보았다.
지난번 공명으로 본 장소였다.
검은색 물감으로 가득 채워 놓은 듯한 수면.
걸을 때마다 검은색 물결이 일며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
몇 걸음이나 걸었을까.
지독한 추위를 타고 흥얼거리는 콧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어릿함이 남아있는 목소리였다.
노랫소리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눈으로 무언가 보인다 싶은 순간.
수면의 물이 솟구치더니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데몬으로 보이는 수많은 적에 둘러싸인 작은 체구의 헤스티아.
그럼에도 헤스티아는 전혀 겁먹은 기색이 없었다.
그저 닥치는대로 쏟아지는 데몬을 얼려버릴 뿐이었다.
언제까지 계속되는 거지.
쏟아지고 얼려지고의 반복.
거의 무한에 가까운 반복 사이엔 약간의 텀이 있긴 했다.
데몬이 공격해오지 않는 짧은 휴식 시간.
헤스티아는 바위에 홀로 걸터앉아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다.
조각상이구나.
아까 봤던 것과는 달랐다.
사야나 페리아가 아니었다.
다른 누군가였다.
완성한 건지 헤스티아가 멍하니 조각상을 바라봤다.
“어떻게 생겼을까? 이렇게 생겼으려나?”
혼잣말을 하며 바라보던 헤스티아가 조각상을 끌어안았다.
“빨리 왔으면 좋겠다.”
그 이후에도 같은 순간의 반복이었다.
데몬과 싸우고 홀로 조각상을 만들고의 반복.
어느새 헤스티아의 주위엔 셀 수 없이 많은 조각상이 만들어져 있었다.
매일밤 그 조각상들 사이로 파고들어 잠이 드는 헤스티아.
헤스티아는 기다리고 있었다.
사야와 페리아가 언젠가 나타날 거라 말했던 사람을 말이다.
“하.”
조용히 지켜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탄성이 나왔다.
헤스티아의 공간에 들어와 있어서인지 순간순간의 감정이 느껴지고 있었다.
조각상이 쌓일수록 헤스티아의 희망과 기대는 꺾여갔다.
고독과 외로움은 그 배로 증식했다.
언제부터였을까.
내 몸은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단순히 한기 때문은 아니었다.
한기와 함께 헤스티아가 빠져 있는 깊은 심연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툭.
어느 순간부터 헤스티아는 조각상을 만들지 않았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한 혼잣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모든 걸 잃은 눈으로 기계처럼 데몬과의 전투를 이어 갈 뿐이었다.
푸화아아악!
지난날과 다를 것 없는 전투 중.
헤스티아의 한쪽 팔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피가 뿜어졌지만 헤스티아는 아파하거나 고통스러워하지 않았다.
이미 더한 고통을 억겁의 세월동안 견뎌온 탓이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부상당한 곳을 얼리고 다시 싸움을 이어나가는 헤스티아.
저 새끼…!
헤스티아의 팔을 날린 건 조금 전 내 앞을 가로막은 거인 데몬이었다.
헤스티아가 다른 데몬과 싸우는 사이 거대한 촉수를 뻗어내 공격한 것이었다.
그리고 언제부터였는진 모르겠지만 배경은 완전히 뒤바뀌어 있었다.
이때가 아마 데몬의 세계로 흘러 들어간 시점인 듯했다.
그 뒤 밖으로 나온 건 헤스티아가 나온 건지, 아니면 지난번에 만났던 데몬이 의도적으로 나가게 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다시 이곳 설원으로 돌아온 헤스티아.
막강한 혹한의 저주를 가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적인 건 아니었다.
오랜 세월 대미지가 쌓인 헤스티아의 숨은 서서히 마지막 종착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저벅.
아무것도 없는 새하얀 설원 한가운데.
아무데나 몸을 앉힌 헤스티아가 멍한 얼굴로 몸을 눕혔다.
손에는 황금빛이 둘러싸여 있던 조각상이 들려있었다.
품으로 끌어당긴 조각상을 잠시 바라보다 서서히 두 눈을 감기 시작한 헤스티아.
저주와 사람 사이에 태어난 헤스티아의 마지막 순간이었다.
“누구야?”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새하얀 백발을 허리까지 늘어뜨린 헤스티아가 눈을 감은 채 서 있었다.
처음 공명 땐 왜 계속 눈을 감고 있는 건지 약간 의아했었는데 아까 기억을 통해 알게 되었다.
혹한의 힘이 눈에 깃들어 있다는 걸 말이다.
“안녕. 헤스티아.”
“내 이름 어떻게 알아?”
헤스티아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섰다.
“데리러 오는데 당연히 이름은 알고 와야지.”
“데리러… 왔어? 나를?”
고개를 끄덕이자 잠시 망설이던 헤스티아가 주춤거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안돼. 나랑 같이 있으면 죽어. 엄마도 추운 걸 억지로 참다가 죽었어. 난 저주받았으니까 누구랑 함께 있으면 안 돼.”
“난 안 죽어.”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너 혹시 바퀴벌레라고 알아? 아마 내가 걔네보다 더 목숨이 질길 거거든. 음… 사람한테 바퀴벌레는 좀 그렇네. 잡초라고 하자. 아무리 밟아도 다시 일어나는 잡초.”
최대한 어린이에 맞춰 말한다고 한 건데 다시 생각해보니 약간 별로 같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헤스티아도 멍한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내게 몇 발자국 다가와 고개를 든 헤스티아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눈을 여전히 감은 채였다.
“데리러 왔다고 말해줘서 고마워. 엄마가 그랬어. 누군가 날 데리러 오면 기분이 정말 좋고 기쁠 거라고. 그땐 데리러 온 사람을 웃으면서 맞이해주라고 했었는데.”
두 손을 입가로 올린 헤스티아가 검지로 입꼬리를 잡아당겼다.
“그런데 웃는 법을 몰라. 너무 오래돼서 웃는 방법을 까먹었거든. 사실 좋고 기쁘다는 것도 뭔지 모르겠어. 그런데 일단 웃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걸 보니까 좋은 거 같아.”
잠시 후 입에서 손을 내린 헤스티아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난 나갈 수 없어.”
묘한 말에 헤스티아를 응시했다.
고개를 푹 숙이더니 말을 이어나가는 헤스티아.
“오랜 시간동안 난 너무 깊은 곳까지 떨어져 버렸거든. 누가 오든 절대 꺼낼 수 없는, 아주 깊고 깊은 심연으로.”
“!!!”
말이 끝나기 무섭게 헤스티아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순식간에 말도 안 되는 깊이까지 떨어진 헤스티아.
계속 떨어지면서도 헤스티아는 고개를 들고 있었다.
“날 데리러 온 사람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 그런데 눈을 뜰 순 없어. 그랬다간 처음으로 내게 와준 사람이 꽁꽁 얼어버리고 말 테니까.”
헤스티아가 가라앉을수록 목소리는 멀어져 갔다.
[이카로스 - 칼데아 윙]
날개를 꺼내고 지체 없이 수면 아래로 방향을 틀었다.
연기를 터뜨리자 아래로 쏘아지기 시작한 몸.
한참 나아간 거 같은데도 이상하게 헤스티아와의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자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눈을 뜬 본연의 자신과는 그 누구도 함께할 수 없을 거란 헤스티아의 확신.
지금까지 쌓여온 고독과 외로움이 그 확신과 합쳐지며 이 끝도 없는 심연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헤스티아! 눈 떠!!”
아래로 빠르게 쏘아지며 말을 건넸다.
말을 건네는 와중에도 헤스티아는 계속해서 가라앉고 있었고, 검은 수면은 헤스티아의 마음을 대변하듯 아래로 나아가려는 날 밀어내고 있었다.
“안돼. 그랬다간 네가….”
“상관없으니까 떠! 난 안 얼어 죽으니까!”
여전히 망설이는 헤스티아에 마음이 점점 급해졌다.
급해진 마음에 비례해 목소리도 커져갔다.
연기를 쉴 새 없이 터뜨리며 나아감에도 수면에 몸이 밀려나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시는 헤스티아에게 닿지 못할 곳까지 말이다.
순간 떠오른 기억에 입을 열었다.
“마지막에 어머니랑 아버지가 너한테 뭐라고 했어!?”
“… 내 손을 붙잡아 주는 사람이 나타날 거라고.”
“기억하고 있으면 데리러 온 날 믿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눈 뜨라고!! 내가 무조건 데려갈 테니까!!!”
움찔거리던 헤스티아의 눈꺼풀이 천천히 들어 올려졌다.
그 아래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혹한의 저주.
저주가 순식간에 수면을 얼리며 나를 덮쳐왔다.
[라 - 불꽃의 문양]
불로 몸을 감싸고 헤스티아에게 향했다.
말도 안 되는 한기와 얼음이 날 덮쳤지만 상관없었다.
더 이상 수면은 날 밀어내지 않았다.
콰가가가가가가가가----!
길을 막는 얼음을 모조리 박살내며.
가까워진 헤스티아에게 손을 뻗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그 손을 붙잡는 헤스티아.
쩌적…!!
순간 주변을 덮어왔던 얼음이 깨어졌다.
공간을 가득 채웠던 검은 수면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따듯… 해.”
눈을 뜨고 날 바라보는 헤스티아에.
깊은 안도의 한숨을 한 차례 푹 내쉰 뒤.
“나가자.”
입가로 미소를 그렸다.
“밖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