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1화. 얼어라
설원의 한복판.
몰려오는 데몬에 시라크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렇게 많은 숫자는 처음이었다.
전투가 시작되고 한참이 지났음에도 전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 데몬 무리.
이대로라면 결국 라피타 족이 먼저 나가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뱀이여.”
다시 뱀을 불러들인 시라크가 전방을 휩쓸었다.
“쯧.”
시라크가 혀를 찼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시야에 들어오던 대부분의 데몬은 쓸려나갔지만 살아남은 놈들이 있었다.
시라크의 공격을 버텨냈거나 회피해낸 놈들이었다.
‘저놈들이 여기까지 오면….’
시라크가 뒤를 돌아봤다.
지금은 시라크의 공격과 라피타 족의 견제 사격으로 쉽게 접근하지 못하고 있지만 저놈들이 도착하는 순간 전황은 뒤집힐 터였다.
공격을 피한다는 건 그만큼 잔챙이 데몬이 아니란 증거.
지금 이곳에서 저런 개체를 상대할 수 있는 건 시라크뿐이었다.
나머지는 오랫동안 이어진 전투에 너무 지쳐 있었다.
“시라크.”
차냑의 부름에 시라크가 고개를 돌렸다.
한동안 시라크를 조용히 바라보던 차냑이 말을 이었다.
“이 정도면 됐다. 떠나거라.”
“뭐?”
“알고 있다. 지금 나를 포함한 라피타 족은 짐덩이라는 거. 너도 마음껏 싸우지 못하고 있겠지.”
“쓸데 없는 소리 할 거면 바쁘니까 나중에 살아남고 해.”
다시 정면을 응시한 시라크가 팔을 들려는 사이.
눈 아래에서 수십 개의 사슬이 올라와 시라크의 팔을 묶었다.
“!?”
사슬은 라피타 부족 사람들의 몸과 이어져 있었다.
“무슨 짓이야?”
“힘을 써서 부수거나 하진 말거라. 있는 힘 없는 힘을 다 쏟아낸 거라 바로 죽어버릴지도 모르니까.”
차냑이 입가로 쓴웃음을 지었다.
“애초에 우리가 고집부리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이길 수 없는 무모한 싸움이란 것도 알았지. 네가 떠나자고 하는 것도 우리 모두를 위한 일이란 것도 잘 안다. 하지만 말했듯이 패배할 걸 알면서도 도망갈 수 없는 싸움도 있는 법이다. 끝에 기다리는 게 설령 죽음일지라도 말이야.”
시라크의 발아래로 눈보라가 일기 시작했다.
차냑을 포함한 라피타 족은 선택한 것이었다.
마지막 남은 힘을 끝도 없이 몰려오는 데몬에게 소모하기보단 시라크를 먼 곳으로 날려버리기 위해 사용하기로 말이다.
“이건 우리 부족이 갚아야 하는 빚. 너까지 죽을 필요는 없다. 백운도 돌아오는 대로 날려 보낼 생각이다.”
차냑이 고개를 돌려 기둥을 뒤덮은 검은색 액체를 응시했다.
액체는 모든 걸 집어삼키고 소화하는 것처럼 꿀렁이고 있었다.
‘보냈으면 안 됐다.’
액체에 그대로 집어 삼켜졌던 백운.
그 모습을 보고 나니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백운은 아무도 들어가지 못한 동굴에서 살아 돌아왔다.
그래서 실낱같은 희망을 가졌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땐 이길 방도가 없는 싸움이지만 동굴에서 돌아온 백운이라면 무언가 해주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하지만 이런 이기심의 결과로 백운은 데몬에게 잡아먹히고 말았다.
“멍청한 짓 그만하고 이거 당장 풀어. 더 이상 밀리면 진짜 위험하니까.”
“족장한테 멍청한 짓이라니 여전히 건방지구나.”
차냑의 손으로 푸른빛이 올라왔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해봤자 살아남은 시라크가 힘들기만 할 것 같아 그만두기로 했다.
“이거 풀…!?”
다시 한번 소리 지르려던 시라크의 눈이 커졌다.
시라크의 시선은 차냑의 뒤쪽, 얼음 기둥으로 향해 있었다.
잠시 후엔 놀란 듯 입까지 벌리는 시라크.
사락…!
“…?”
차냑의 얼굴로 시린 한기가 느껴졌다.
얼음 기둥이 약해지며 설원에서 사라진 한기였다.
차냑이 천천히 기둥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시라크와 마찬가지로 입을 벌릴 수 밖에 없었다.
“거, 거인이….”
부족원 중 한 명이 멍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쓰러진다…!!”
달을 가릴 정도로 거대했던 검은 액체의 데몬.
아무리 공격해도 흠집조차 나지 않았던 데몬이 균형을 잃고 무너지고 있었다.
‘얼어… 있다?’
데몬은 완전히 얼어붙어 있었다.
한눈에 봐도 일반적인 얼음이 아니었다.
꽤 먼 거리임에도 이 정도의 시린 한기를 뿜어내는 얼음.
천막에 있는 청광석의 기억에서 본 것과 똑같았다.
“어떻게…?”
차냑이 의문을 표하는 사이 거인이 쓰러지고.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
언제 돌아온 건지 백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라크를 포함한 차냑과 부족민들의 고개가 돌려졌다.
몰려오는 데몬과 시라크의 사이에 아무렇지도 않게 서 있었다.
얼음 기둥으로 갔다가 데몬에게 집어 삼켜졌던 백운이었다.
“넌 바쁜데 묶여서 뭐해?”
“너 어떻게…?!”
어째선지 한쪽 눈은 감은 상태였다.
잠시 시라크와 차냑을 번갈아 보던 백운이 어깨를 으쓱였다.
“시라크. 좀 물러나 있을래?”
“뭐…?”
“좀 많이 차가울 거거든.”
알 수 없는 말을 마친 백운이.
몰려오는 데몬들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 * *
새카맣게 밀려드는 놈들을 보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괜히 혹한의 저주라고 불린 게 아니었다.
몸 안쪽에서부터 밀려오는 한기는 호흡조차 불규칙하게 만들어버리고 있었다.
슬쩍 고개를 돌려 물러나는 시라크와 라피타 족 사람들을 바라봤다.
다행히도 시라크는 더 캐묻지 않고 사람들을 뒤로 물리고 있었다.
만약을 대비해 검은 뱀으로 주위를 감싼 건 물론이었다.
훌륭하구만.
웃으며 감은 한쪽 눈으로 손을 들어 올렸다.
처음 갖는 형태의 무기라 약간 어색하긴 했다.
꺼내는 순간 눈동자로 힘이 깃드는 방식의 무기.
혹한의 저주 사야의 힘이 깃든 눈동자가 헤스티아의 무기였다.
남은 건 한 번 정도인가.
아직 헤스티아의 힘을 온전히 사용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현재 내가 쓸 수 있는 한기는 공명에서 느꼈던 것의 절반 수준.
아마 이후 무기가 성장하며 눈동자에 담기는 한기도 늘어날 터였다.
“크라아아…?”
“키륵…!?”
무언가 느낀 탓일까.
개떼처럼 몰려오던 데몬이 주춤거리기 시작했다.
서서히 속도를 줄이더니 이젠 뒷걸음질까지 치는 데몬 무리.
놈들을 보며 미소를 머금었다.
이제 와서 도망치려 해봐야 소용없었다.
결국엔 내 시야를 벗어나지 못할 테니까.
손을 치우고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걸 얼려버리는 죽음의 한기.
그리고 지금 그 한기는 내 눈동자에 깃들어 있었다.
[헤스티아 - 사안]
눈을 뜸과 동시에 머리 위로 거대한 두 개의 눈이 생겨났다.
한쪽 눈은 감긴 채로, 떠진 눈의 푸른색 눈동자 속엔 얼음꽃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사야의 뒤를 이은 혹한의 저주 헤스티아의 사안이었다.
몸을 돌리고 도망치기 시작한 데몬에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얼어붙어라.”
[개화]
내 눈과 연동된 머리 위의 사안에서 빛이 뿜어졌다.
얼음꽃의 문양으로 이루어진 푸른빛이 정면으로 터져 나가고 잠시 후.
쩌저저저저적!!
시야에 들어왔던 공간 전체로 한 송이의 얼음꽃이 피어났다.
바닥에서 피어올라 위에 있던 모든 걸 순식간에 집어삼키는 죽음의 꽃.
범위에 있던 데몬들은 인식조차 할 수 없는 찰나의 순간이었다.
속수무책으로 얼음에 집어 삼켜지며 움직임을 멈추는 데몬들.
소란스러웠던 정면으로 무거운 적막이 내리깔렸다.
“으.”
찌릿거리는 통증에 눈을 감았다.
동시에 무기도 해제되었다.
범위를 최대로 잡은 개화는 한 번이 한계인 모양이었다.
몸을 빼곡히 채웠던 한기가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지나자 온전해진 몸에 한숨을 내쉬었다.
사라진 얼음 기둥 대신 새롭게 피어난 얼음꽃.
약해지던 한기가 되살아나서인지 다른 방향에서 밀려오던 데몬들은 허겁지겁 도망치기 바빴다.
“일단 싸움은 끝난 거 같네요.”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돌리자.
그 자리에서 그대로 굳어버린 라피타 족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 자기가 뭘 본 건가 눈을 비비는 부족민도 있었다.
단 한 명.
시라크만이 조금 다른 눈으로 날 응시하고 있었다.
막연한 놀라움보단 약간의 경이로움이 담긴 눈동자였다.
“어… 음.”
묘하게 무거운 침묵을 깨고자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얼음꽃 때문에 사그라들었던 추위가 되살아나 있었다.
여기서 조금만 더 이렇게 서 있다간 금방 눈사람이 되어버릴 것 같았다.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 돌아갈까요?”
* * *
걸음을 멈춘 차냑이 고개를 들었다.
얼음 기둥의 한기가 약해지며 덩달아 약해졌었던 설원의 눈보라.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세찬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었다.
‘눈보라가 반갑긴 오랜만이군.’
차냑이 앞에서 걸어가는 백운을 쳐다봤다.
괜찮다고 했는데도 백운은 부상당한 부족민들이 탄 포대기를 끌어주고 있었다.
꽤 여럿이 탄 지라 무거울 텐데도 이 거센 눈보라 속에서 힘든 기색 하나 없이 끌고 있는 백운.
과연 백운을 같은 사람의 범주로 놓고 봐도 되는지 의문이 들었다.
‘… 늙은 건가. 말도 안 되는 생각을 다 하는군.’
걸어가던 차냑이 고개를 흔들었다.
같은 사람의 범주라니.
쓸데 없는 생각이었다.
엄청난 한기를 머금고 설원에서 피어난 두 개의 커다란 얼음꽃.
이런 걸 아무렇지도 않게 만들어내는 사람이 같은 범주에 속해 있다는 건 말이 안 됐다.
백운은 이미 차냑이나 일반적인 사람이 가늠할 수조차 없는 선을 넘어가 있었다.
“괴물이네.”
나란히 걷던 시라크가 입을 열었다.
싸움이 끝나고 차냑과 부족민들은 한바탕 시라크의 질타를 받았었다.
싸움 중에 뜬금없이 사슬로 묶고 날려버리려고 한 대가였다.
그렇게 한동안 말을 쏟아붓다 한숨을 쉬는가 싶더니 지금까지 입을 다물고 있었던 시라크.
어울리지 않게 삐진 건가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시라크는 오는 내내 백운에 관해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 기준에선 너도 괴물이다만. 괴물인 네가 봐도 괴물인 게냐?”
“나도 내가 괴물이라고 생각했거든. 누구한테 져본 적이 없으니까.”
시라크의 거침없는 말에 차냑이 입을 다물었다.
누굴 닮은 건지 어려서부터 겸손함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시라크였다.
고집도 더럽게 센 탓에 어렸을 때부터 차냑과 하루가 멀다 하고 말다툼을 했었고 말이다.
“그런데 조금 정체성이 흔들리려고 하네.”
“…?”
뜻밖의 말에 차냑이 시라크를 돌아봤다.
평생 저런 말을 한 적이 없었던 시라크라 더 놀라웠다.
“처음 봤어. 저런 말도 안 되는 건.”
시라크의 눈이 얼음꽃으로 향했다.
아직도 꽃이 피어나 공간을 삼키던 순간을 잊을 수 없었다.
몇 마리나 될까.
꽃에 삼켜져 순식간에 목숨을 잃은 데몬의 숫자는 말이다.
정확히 알 순 없어도 최소 천 마리 이상이었다.
‘내가 저놈들을 다 죽이려면 얼마의 시간이 걸렸을까.’
아까 봤듯이 강한 개체도 심심치 않게 섞여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질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을 건 분명했다.
백운은 그걸 찰나의 순간에 끝내버렸다.
‘무기왕이라… 들었던 대로.’
백운을 바라보던 시라크가 미소를 머금었다.
‘더럽게 강하구만.’
행운이란 생각이 들었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이곳에서 무기왕의 힘을 직접 보게 된 것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