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2화. 잠깐의 휴식
후룹.
차냑이 건넨 차를 들이켰다.
“좋다.”
뜨끈한 것이 목을 타고 흐르자 절로 좋다는 소리가 나왔다.
몸이 풀려서인지 배에선 꼬로록 소리가 들려왔다.
동굴에서 워낙 급하게 튀어가느라 차냑이 만들어준 도시락도 다 먹지 못했었다.
“조금만 기다리게. 곧 먹을 걸 가져올 테니.”
“어휴 아니에요. 다들 힘드실 텐데 좀 쉬세요.”
“그런 소리 내놓고 쉬라 그러면 어디 마음 편히 쉬겠어.”
뼈를 때리는 말에 고개를 돌렸다.
시라크는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틈이 날 때마다 웃으며 따듯한 술을 들이켜고 있었다.
그런 시라크를 같이 쳐다보던 차냑이 입을 열었다.
“참고로 시라크 네 밥은 없다.”
“응? 왜지?”
“넌 손님이 아니니까.”
당황한 시라크가 멍한 얼굴로 차냑을 바라봤다.
잠시 후 천막이 열리며 차냑이 말한 식사가 도착했다.
그리고 그곳엔 차냑의 말대로 시라크의 밥이 없었다.
“진짜 없다고? 먹는 걸로 이렇게 치사하게 나온다고? 나 진짜 서러워지려고 하는데.”
속사포로 말을 쏟아내는 시라크에 차냑이 어깨를 으쓱였다.
“만들어 놓은 게 부족한데 어쩌겠어. 늙은 내가 굶을 순 없지 않느냐. 한 끼만 걸러도 쓰러져 버릴 거 같은데.”
시라크의 시선을 외면하며 차냑이 아무렇지도 않게 숟갈을 떴다.
옆에서 부족민들은 재밌다는 듯 그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나도 차냑을 따라 조용히 숟가락을 들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쌀밥과 고깃국이 앞에 놓여있었다.
한 숟갈 떠 넣으면 아주 기가 막힐 것 같았다.
큼지막하게 한 숟갈 뜬 밥을 입에 넣고 국그릇을 집었다.
“후루룹!”
고기와 함께 국물을 마셨다.
쌀의 단맛과 고기의 담백함이 입안에서 한데 어우러지는 것이 아주 일품이었다.
한동안 굶어서 그런지 평소보다 밥맛이 두세 배는 더 좋은 것 같았다.
“국물이 제대로네요. 아주 잘 우려졌어요.”
“그렇지? 라피타 부족은 음식으로도 꽤 유명하거든. 많이 먹게나.”
옆에서 시라크의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됐으니까 한 입만 나눠 먹자는 노골적인 시선이었다.
“정말 입에 잘 맞나 보군. 국 좀 더 먹게.”
“뭘 더 먹어? 없다면서.”
시라크의 반박이 끝나고 잠시 후.
천막이 열리며 방금 지은 듯한 밥과 국이 등장했다.
텅 비어 있던 시라크의 밥상으로 놓이는 밥그릇.
그제야 잔뜩 인상 찡그리고 있던 시라크가 미소를 지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밥그릇을 들고 흡입하는 시라크.
피식 웃으며 그런 시라크를 보던 차냑이 내게 말을 걸었다.
“참으로 미안하군. 이 설원을 구해준 것도 모자라 다친 사람들을 옮겨주기까지 했는데 줄 수 있는 게 이것뿐이라.”
“아니에요. 밥이랑 국이면 충분합니다. 이렇게 맛있는 걸 또 어디 가서 먹어보겠어요.”
“허허…. 갈 길이 바쁜데 우리 때문에 지체되는 건 아닌가 걱정되는군.”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아직 괜찮습니다.”
웃으며 괜찮다며 손을 내저은 뒤.
고개를 살짝 돌려 옆에 놓인 핸드폰을 바라봤다.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김정윤이 신호를 보내기로 했었다.
다행히 신호 대신 조사를 진행 중이란 연락이 주기적으로 도착 중이었고 말이다.
그래도 잘 먹힌 모양이네.
만약을 대비해 시간을 벌고자 여러 꼼수를 써놨었다.
잘 먹힌 탓인지 아직까지 러시아는 얌전한 상태.
그렇다고 해서 라피타 부족의 마을에 주구장창 머무를 생각은 없었다.
단지 방금 돌아온 라피타 부족을 그대로 두고 떠날 수가 없어 조금만 기다렸다 갈 생각이었다.
지금 당장의 라피타 부족은 상처 입은 인원들을 옮기고 뒷정리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저녁 되면 가야겠다.
아침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
해가 질 때쯤 슬슬 출발하면 될 것 같았다.
올 땐 얼음에 처박히고 길을 헤매서 그렇지 날개가 있다면 금세 돌아갈 수 있는 거리였다.
그때쯤이면 라피타 부족도 어느 정도 한숨을 돌릴 정도가 될 테고 말이다.
“잠깐 괜찮다면 식사가 끝나고 함께 가도록 하지. 손님을 고생만 시키고 보낼 순 없으니까.”
밥을 우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먹고 있는 맛있는 밥만 해도 충분하긴 했다.
몽골부터 시작되어 찾기 시작한 헤스티아도 만났고 말이다.
다만 어른이 주시는 걸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니기에 얌전히 따라가 볼 생각이었다.
* * *
오, 쑥 냄샌가.
킁킁거리며 차냑을 따라 걸었다.
아직 들어가지 않았음에도 쑥을 푹 찐듯한 냄새가 풍겨왔다.
“부족 대대로 다친 이가 있을 때 사용하는 굴이라네. 각종 약초를 수십 년 동안 쪄냈지. 그 증기를 계속 가둬 효과를 더해왔고. 자넨 다친 곳은 없지만 들어가 있는 것만으로도 피로가 싹 풀릴 걸세.”
수십 년이나 쪄낸 약초라니.
과학적으로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기대가 되는 곳이었다.
풍겨오는 냄새도 전혀 역하거나 그러지 않았다.
아주 구수한 것이 저절로 한적한 산골 마을을 떠올리게 하는 냄새였다.
“걱정하지 말게.”
나란히 걷던 차냑이 내 어깨를 두드렸다.
“우리 부족엔 약초 관련된 개방자도 있으니까. 그들이 직접 효과를 확인한 동굴이야. 외딴 부족의 편협한 지식으로 만들어진 곳이 아니란 거지.”
내가 의심할 거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호다닥 차냑에 손을 내저으며 입을 열었다.
“어휴 그런 생각 안 했어요. 냄새만 맡아도 힘이 샘솟는 거 같아요.”
동굴에 관한 차냑의 몇 마디 설명이 이어지고.
설명이 끝나갈 때쯤 냄새가 새어 나오는 동굴 앞에 도착했다.
구수한 냄새와 함께 설원과 어울리지 않는 후끈한 열기가 뿜어지고 있었다.
“들어가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엄청난 열기에 숨이 턱 막혀왔다.
어린 시절 처음으로 목욕탕 사우나에 들어간 기분이었다.
한쪽엔 아까 차냑이 말한대로 이번 전투의 부상자들이 몸에 약초를 붙이고 누워있었다.
“걱정할 거 없어. 금방 나을 테니까.”
차냑이 미소를 지었다.
“모두 자네 덕분이야. 이길 수 없는 전투에서 한 명의 사상자도 없이 돌아올 수 있었던 건.”
열기만큼이나 훈훈해지려는 분위기에 멋쩍게 웃음을 터뜨렸다.
“여기 앉지.”
차냑이 가리킨 바위 위로 몸을 앉혔다.
이제 막 들어왔을 뿐인데도 몸에선 땀이 흐르고 있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자 찐한 쑥 냄새가 코를 타고 들어왔다.
“이것도 붙여보게.”
차냑이 건네는 찐득한 약초를 받아 팩을 하듯 몸 여기저기에 발랐다.
오랫동안 달궈져서인지 아주 후끈한 약초였다.
엄청나군.
얼굴을 제외한 상체로 약초가 빼곡히 덮어졌다.
두꺼운 겨울 이불을 빠짐없이 돌돌 만 느낌이었다.
“자넨 동굴이 잘 맞나보군. 시라크는 질색하는데 말이야.”
식사를 마치기 무섭게 시라크는 자러 간다고 몸을 일으켰었다.
언젠가 분명 동굴에서 한 명 쪄죽을 거란 약간의 저주를 남긴 채였다.
“전 이런 곳 좋아하거든요.”
나도 어렸을 땐 사우나를 싫어했었다.
덥고 뜨겁고 땀만 나는 게 영 마음에 안 들었기 때문이다.
다만 어느 순간부터 이런 느낌이 개운하고 시원하다로 변했었다.
“굴을 나가면 어제 갔던 온천이라네. 조금만 더 가면 차가운 얼음물이 고인 곳이 있고.”
“너무 좋은데요?”
사우나와 냉탕, 온탕이라니.
한국의 찜질방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여기서 이렇게 찜질을 즐기는 것도 마지막이겠군.”
나지막이 말하는 차냑을 바라봤다.
“이곳을 떠나기로 했다네. 그렇다고 시라크 놈이 사는 도시 같은 곳으로 가진 않겠지만 말이야.”
돌아오는 길에 차냑에게 말해줬었다.
라피타 부족이 목숨까지 걸며 끝까지 곁을 지키고자 했던 헤스티아.
헤스티아는 나와 함께 하게 되었으며 더 이상 혼자가 아니게 되었다고 말이다.
그 말에 차냑은 다행이라며 고개를 숙였었고 몇몇 사람은 눈물을 흘렸었다.
“부상당한 사람들이 어느 정도 회복되면 시라크와 함께 출발할 생각이야. 녀석이 미리 봐둔 지역이 있다고 하니까.”
“잘됐네요. 시라크도 이제 안심하겠어요.”
얼음꽃이 피며 잃어버렸던 한기를 되찾은 설원.
오늘처럼 몰려오거나 하진 않겠지만 여전히 많은 수의 데몬이 잠들어 있는 건 변함없는 사실이었다.
시라크는 한기를 떠나 이런 설원의 한복판에서 부족이 살아간다는 걸 걱정했었다.
“이제 고집은 그만 부려야겠지. 그래야 할 이유도 사라졌으니까. 자식놈 고생도 그만 시키고 말이야.”
에잉! 하면서 말하는 차냑에 미소를 지었다.
유난히 서로 툴툴대는 부자였지만 뭐랄까.
보고 있으면 절로 미소가 그려지는 둘이었다.
벽으로 몸을 기대며 고개를 들었다.
라피타 부족이 안전해지길 바란 건 시라크뿐만이 아니었다.
그동안 설원을 지켜온 헤스티아의 바람이기도 했다.
다행이야.
시라크와 헤스티아의 오랜 염원이 이루어진 순간.
나도 모르게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 * *
약초 동굴에서 빠져나와 호다닥 앞으로 달려갔다.
열기가 다 빠져나가기 전에 얼음물에 몸을 담글 생각이었다.
어제 몸을 담갔던 온천을 지나자 수면이 꽝꽝 얼어 있는 원형의 공간이 나타났다.
“와다아!”
주먹으로 얼음을 박살내고 물속으로 몸을 날렸다.
“허어어어억!!”
찰나의 순간이지만 심장이 멈췄던 것 같았다.
간신히 호흡하며 숨을 고르고 얼음물 속으로 얼굴을 담갔다.
새어 들어온 햇빛이 청명한 물 사이사이를 비추고 있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고요함이었다.
물의 바닥까지 가라앉은 후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사로카의 전투 이후 수련했던 돌산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어디 한 번.
그렇게 한참 앉아있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한동안 들어가보지 않았던 무기고.
뒤바뀌는 공기에 눈을 뜨자 세 개의 달이 뜬 무기고가 날 반겼다.
많아졌네.
보고 있자니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처음엔 잭 더 리퍼의 면도칼 하나만 핏빛 기운을 띠며 덩그러니 놓여있었는데.
이젠 엄청 많진 않더라도 휑하다는 느낌은 사라져 있었다.
조금 더 걸어가 헤스티아의 사안을 바라봤다.
사안이 어떤 형태로 무기고에 머무르고 있을지 궁금했었다.
예상이랑은 조금 다르네.
뭔가 두 눈이 덩그러니 놓여있으면 어떡하지 했는데 다행히 그렇진 않았다.
무기를 사용할 때 머리 위로 나타났던 거대한 두 개의 눈동자.
그 두 개의 눈동자가 눈을 감은 채 떠 있긴 했지만 실체가 아닌 푸른 한기의 형상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음.”
팔짱을 끼고 조용히 헤스티아의 사안을 바라봤다.
처음 들어왔을 땐 오랜만에 와서 착각한 건가 싶었지만, 자세히 보니 확실히 알 것 같았다.
기존에 있던 무기의 위치가 모두 달라져 있었다.
모든 무기의 중앙에 위치한 헤스티아의 사안.
무기들은 그런 헤스티아를 감싸듯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각자의 기운이 헤스티아의 기운과 섞여 따듯한 색을 띤 건 물론이었다.
“… 좋네.”
입가로 미소가 그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