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4화. 거대한 공당
“이 괴물 새끼가…!”
기태랑이 깨어나고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깨끗하게 정비되었던 열차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눈이 닿는 모든 곳이 박살 난 건 기본으로 완전히 사라져 버린 칸까지 존재했다.
“괴물이라니 말이 너무 심하군. 그쪽도 1급이면 나름 괴물이라고 불리는 거 아닌가?”
러시아의 1급 헌터 이바노프가 입술을 깨물었다.
이바노프가 현재 열차에 탄 러시아 소속 중 가장 강한 전력인 건 맞았다.
평소에 자기 스스로를 괴물이라고 생각한 것도 맞았고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생각이 흔들리고 있었다.
‘저딴 게… 나랑 같은 1급이라고?’
눈앞에 있는 건 세계 공식 괴물로 유명한 무기왕이 아니었다.
나름 이름이 알려졌다고는 하나 그저 작은 나라의 1급 헌터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이 사달이 나고 말았다.
‘정말 다 뒤진 건가.’
숨을 고르며 이바노프가 주위를 둘러봤다.
엉망이 된 건 열차뿐만이 아니었다.
반파된 곳곳엔 러시아 측 헌터들이 처박혀 있었다.
숨이 끊어진 그들에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한 명도 빠짐없이 몸 일부분이 으깨졌다는 것이었다.
‘대체 어떻게 되어 먹은 몸이냐.’
다이아몬드 인간이란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일 거라고 생각은 못 했다.
이야기를 전해 듣기만 했을 때와 실제로 마주했을 때의 괴리가 엄청났다.
무슨 공격을 퍼붓든 기태랑에겐 약간의 대미지도 들어가지 않았다.
맞부딪혔을 때 부러지고 으깨지는 건 오히려 이쪽이었다.
“그렇게 앉아만 있을 건가? 아직 싸울 수 있잖아.”
아무렇지도 않게 몸에 묻은 피를 닦아내는 기태랑에 이바노프가 마른침을 삼켰다.
너무나도 익숙하다는 듯한 움직임.
처음부터 그랬었다.
기태랑은 수적으로 확실한 열세였음에도 약간의 동요조차 하지 않았었다.
그저 덤덤한 얼굴로 전투를 시작했었다.
그리고 한 명씩 부숴나갔다.
항상 해왔던 일이라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말이다.
“러시아에선 1급 헌터가 되는 기준이 뭐지?”
“…!”
“아 이거 실례했군.”
기태랑이 입가로 희미한 미소가 그려졌다.
이바노프를 비웃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진심으로 미안함이 깃든 미소였다.
“비꼬거나 하는 건 아니니까 기분 나쁘게 듣지 말고. 그냥 궁금했던 거야. 떨고 있는 거 같길래 말이야.”
눈이 커진 이바노프가 고개를 내렸다.
기태랑의 말대로였다.
어느새 이바노프의 몸은 사시나무 떨듯 떨리고 있었다.
“처음인가 싶었거든. 이렇게 사방이 피로 범벅된 공간 중앙에서.”
기태랑이 이바노프 쪽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죽을 위기에 처한 게 말이야.”
“거, 건방진!!”
이바노프의 몸이 빠르게 쏘아졌다.
한쪽 손으로 불투명한 에너지가 모였다.
기태랑이 사정거리에 들어오자마자 손을 내뻗는 이바노프.
“내가 봤을 땐 말이야.”
“!?”
입을 연 기태랑이 가볍게 공격을 피하며 이바노프의 팔을 낚아챘다.
아깐 굳이 피하지 않고 다 맞아 줬지만 이번엔 아니었다.
“그쪽은 자기보다 훨씬 약한 적이랑만 싸워왔던 거 같거든. 그렇지 않고서야.”
빠각!
“끄아아아아악!”
팔을 부러뜨린 기태랑이 이바노프의 입을 틀어막았다.
“위기에 몰렸다고 해서 이렇게 엉망진창일 리가 없잖아.”
“끄… 끄읍….”
얼굴로 가해지는 압력에 그대로 무릎을 꿇는 이바노프.
이바노프가 떨리는 눈으로 기태랑을 올려다봤다.
애써 외면하려고 했지만 이젠 명확히 알 것 같았다.
1급이란 급수는 같지만 눈앞의 인간은 전혀 다른 차원의 괴물이란 것을 말이다.
단순히 가진 능력의 강약을 떠나 겪어 온 전장 자체가 달랐다.
“솔직히 말하면 헛웃음이 나올 거 같아. 어이가 없어서 말이야.”
기태랑이 이바노프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도착지에 준비야 더 해놨겠다만… 겨우 이걸로 무기왕을 잡겠다고? 내가 장담하는데 말이야. 만약 이 열차에 탄 게 내가 아니고 진짜 그 녀석이었다면.”
몸을 숙여 이바노프에게 눈을 마주친 기태랑.
기태랑이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우고 입을 열었다.
“1분도 안 걸렸을 거야. 네놈들 목숨이 다 끊어지는 데는. 그러니까 다음부턴 물어도 되는 적과 안되는 적을….”
“…!!”
기태랑의 손아귀로 강한 힘이 들어갔다.
“잘 구분하고 덤비도록 해.”
빠각!!
이바노프의 몸이 축 늘어지고.
몸을 일으킨 기태랑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저나 보통 열차가 아니었군.”
열차는 복구 불가능한 수준까지 박살 났음에도 계속해서 달리고 있었다.
괜히 EMP탄에 영향을 받지 않은 게 아니었다.
“엄청난 악취네.”
고개를 내린 기태랑이 인상을 찌푸렸다.
바닥이 부서지며 열차의 지하 일부가 드러난 상태.
그곳에서 참기 힘든 썩은 내가 풍겨오고 있었다.
“일단 도착은 해야 하니까.”
빙글 몸을 돌린 기태랑이 의자에 몸을 앉혔다.
정체불명의 열차를 완전히 박살낼까도 싶었지만 일단은 러시아가 인도하는 장소까진 도착해야 했다.
그래야 수색대와 합류할 수 있을 터였다.
“또 얼마나 기다리고 있으려나.”
열차의 도착지엔 더 많은 적이 기다리고 있을 게 분명했다.
“열심히 해야겠군.”
헤키리스의 침공 때 어이없게 발목이 잡혔던 만큼 이번엔 그때 싸우지 못한 것까지 더해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일단 좀 잘까.”
의자를 기울인 기태랑이 눈을 감았다.
* * *
과거 연구원들이 갔을 거라 생각되는 루트로 탐색을 진행 중인 수색대.
수색대 한편에선 대산의 탐사 인원들이 무언가를 분석 중이었다.
“실장님. 이, 이것 좀 보세요.”
주변을 둘러보던 김정윤이 다가왔다.
직원이 가리킨 모니터를 살피는 김정윤.
“뭐야 이건.”
김정윤이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 보고 있는 건 백운이 열차에서 스캔한 공간들이었다.
“뭐로 채워져 있는 거야?”
“모르겠습니다. 아마 백운 님이 처리했다는 데몬이 아닐까 싶습니다.”
지하와 지상으로 나뉜 열차.
객실이 존재하는 지상 칸 벽에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색 액체가 가득 채워져 있었다.
시간차를 두고 스캔한 정보에 따르면 벽 속의 액체는 점점 해골 형태를 만들어가는 중이었고 말이다.
백운이 한차례 놈들을 처리하며 비게 된 공간을 다시 채워 넣는 과정 같았다.
“지상도 이상하지만 지하가 더 가관입니다.”
“이게 기관실… 인가?”
어딜 봐도 열차를 조종할만한 공간이 보이지 않았었다.
대신 지하층의 끝으로 정체를 알 수 없는 공간이 존재했다.
마찬가지로 검은 액체로 둘러싸였지만 위와는 또 달랐다.
공간엔 사람의 장기와 비슷하게 생긴 것들이 잔뜩 배치되어 있었다.
한쪽으론 방향을 결정할 때 쓰이는 듯한 작은 키가 존재했고 말이다.
“그리고… 바퀴가 없습니다.”
예상을 뛰어넘는 정체에 김정윤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열차 아래론 바퀴 대신 수백 개에 달하는 팔이 있었다.
흡사 지네를 연상케 하는 모습이었다.
“우린 대체 뭘 타고 온 거냐.”
“그러게요. 뭘 타고 온 거예요? 대체.”
“우왁!”
바로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김정윤이 엉덩방아를 찧었다.
“배… 백운 님!?”
언제 온 건진 알 수 없었다.
옆엔 여전히 바가지 머리를 한 백운이 뭘 그렇게 놀라냐는 얼굴로 서 있었다.
* * *
해가 지기 무섭게 김정윤의 GPS를 따라 날아왔었다.
오이먀콘에서 꽤 떨어진 위치였지만 GPS 덕에 헤매지 않고 찾을 수 있었고 말이다.
“호오….”
놀라 자빠진 김정윤을 뒤로하고 모니터를 살폈다.
안 그래도 돌아와서 다시 조사해봐야지 했었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 보였다.
열차에 장기라니.
그 질퍽이 새끼의 본체일 거란 확신이 들었다.
“별일 없으셨죠?”
“예, 예. 백운 님이 말씀하셨던 대로 러시아 인원들은 저희에게 관심이 없어 보이더군요.”
“아마 바쁠 거예요. 이쪽으로 무기왕이 열심히 달려오고 있을 테니까요. 그런데 혹시 이 열차 아직 오이먀콘에 있나요?”
김정윤이 고개를 저었다.
“저희가 오이먀콘을 떠날 때쯤 열차도 마을을 떠났습니다.”
“태랑 님을 태우러 간 모양이네요.”
“태랑…? 설마 무기왕으로 위장한 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아마 한 시간 후면 도착할 거예요. 이곳에서 뭔가 발견된 건 있나요?”
“예. 과거 연구원들이 이곳을 탐사한 흔적이 있습니다. 그때까진 딱히 별일이 없었던 모양이고요.”
몇 마디 더 나누고 있을 때 앞서 나간 수색대 쪽이 소란스러워졌다.
“여기 좀 와보셔야겠어요!”
“가보죠.”
눈앞으로 드러난 갈림길을 따라 야광봉이 달려있었다.
앞서간 수색대가 설치하며 나아간 것 같았다.
몇 개의 갈림길이 끝나자 거대한 공당이 눈앞에 나타났다.
“여기요!”
사람이 몰려 있는 곳으로 가자 나타나는 묘한 구조물.
약간 우물 비슷하게 생긴 구조물은 꽤 오래전에 만들어진 것처럼 보였다.
“위에 건 뭘 뜻하는 걸까요.”
구조물 위론 평평한 암벽이 있었는데.
표면으로 특이하게 생긴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저건…?
그리고 문양은 낯설지 않았다.
수천 갈래로 갈라져 사방으로 뻗어진 문양.
얼음 기둥 근처에 나타났던 거인 데몬과 비슷한 생김새였다.
머리로 차냑이 해줬던 말이 떠올랐다.
라피타 부족이 발견했던 청년.
청년은 죽어가며 한국 연구원들이 발견해선 안 되는 걸 발견했다고 말했었다.
이걸 찾아서 죽임당했다는 건가.
우물로 다가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텅 비어있었지만 얼마 전까지 뭔가 담겨있었던 흔적이 있었다.
아마 내가 사안으로 얼려놓은 데몬의 액체가 아닐까 싶었다.
“여기에 글귀가 있어요.”
고대에 쓰인 건지 알아볼 수 없는 글자.
다가온 관련 학자가 한참 테블릿을 뒤지는가 싶더니 떠듬떠듬 글귀를 읽기 시작했다.
“거래를 원하는 자. 문을 열어라…?”
문은 이미 열려있었다.
이게 의미하는 건 누군가 거래를 위해 열어 재꼈다는 것이고.
당장 떠오르는 건 러시아가 오이먀콘을 오는 데까지 이용한, 현대 기술로 불가능한 걸 구현해 낸 열차였다.
약간 끔찍한 가능성이 떠오르네.
이들은 우릴 돌려보낼 생각이 없다고 한글로 적혀있었던 쪽지.
실제로 열차엔 많은 양의 피가 뿌려져 있었다.
“정윤 님. 욕심을 부린 러시아가 이걸 이용해 열차를 만들었다면 당연히 발견한 연구원들의 입을 막으려고 했겠죠?”
“그럴 거 같군요. 아무래도 데몬과 거래를 한 거니까요. 백운 님이 보셨던 거랑 연관 지으면 열차의 먹이로… 줬을 수도 있고요. 일단 단서가 될만한 걸 찍어서 이곳을 나가죠.”
김정윤의 지시에 따라 대산의 인원들이 장비를 챙겨 들었다.
“잠깐만요! 여러분!”
“…?”
현재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게 활기찬 목소리.
고개를 돌리니 비행기에서 만났던 정부 측 신입 연구원 임솔빈이 손을 번쩍 들고 있었다.
“이거 참 한국분들은 집념이 대단하다니까요? 항상 발견하면 안 되는 것까지 다 찾아버리니! 덕분에 제 손까지 또 더럽혀야 되잖아요.”
해맑게 말하는 임솔빈을 바라봤다.
시선을 느낀 건지 내 쪽으로 손을 흔드는 임솔빈.
“안녕하세요. 강산 님! 비행기에서 나눴던 대화는 다 거짓말에 가짜 사진이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마세요!”
이중인격인진 몰라도 임솔빈은 순식간에 성격이 뒤바뀐 것 같았다.
어이가 없어 쳐다보고 있길 잠시.
“참고로 다들 느끼고 계시겠지만….”
두세 번 박수를 친 임솔빈이 방긋 미소를 지었다.
“여기선 아무도 못 나간답니다!”
너무 신이 난 건지 줄줄이 말을 이어가는 임솔빈.
이제 그만 들어줘야겠다 싶은 순간.
푸화아악!
허공으로 피가 솟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