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기왕이 헌터로 회귀했다-419화 (419/473)

419화. 입주

조용히 샤워를 마치고 슬금슬금 신발을 신었다.

드르렁!

방 안에선 우렁찬 코골이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어젯밤 순대국밥을 먹은 가게 근처의 펜션.

밤늦게 급히 구한 탓에 작은 방밖에 남지 않았었다.

덕분에 덩치 큰 네 사람이 방 하나에 구겨져 자야 했고 말이다.

탈출…!

막내인 내 자리는 침대와 화장실 사이의 좁은 틈이었다.

거기서 구부린 채 잠들었더니 온몸이 쑤셔 왔다.

눈은 감고 있었는데 제대로 잔 것 같지도 않았고 말이다.

“어디 가냐?”

조심조심 문을 열고 있을 때 잠에 취한 비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광은 반쯤 몸을 일으키고 사방으로 머리를 뻗친 채 날 쳐다보고 있었다.

“라면….”

무슨 라면이야!

비광의 눈이 반쯤 감긴 걸 확인한 후 그대로 문을 열고 탈출을 감행했다.

술 냄새 가득하던 방에서 나오니 미세먼지 섞인 공기도 상쾌하게 느껴졌다.

일정이 없었다면 신라면이라도 하나 사 와서 끓여줬겠지만, 오늘은 그럴 수 없었다.

오늘은 미루고 미뤄왔던 새집 입주 날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나가서 급하게 가야 간신히 약속 시간을 맞출 수 있었다.

나중에 집들이 오시면 끓여 드릴게요!

닿지 않을 말을 속으로 되뇌며 바닷가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고개는 쉬지 않고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는 중이었다.

빵빵!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내 옆으로 미끄러지는 작은 경차 한 대.

“백운 님!”

창문이 내려가며 찹쌀떡 전수희가 모습을 드러냈다.

언제나 그렇듯 해맑은 얼굴로 손을 흔드는 전수희에 인사를 건네고 조수석으로 몸을 날렸다.

전수희가 청라 근처에 살고 있단 걸 떠올리고 출근길에 좀 주워가 달라고 연락했었다.

“우와…! 술 냄새 엄청나요!”

“앗. 죄송합니다.”

아무리 샤워를 열심히 해도 옷이 그대로니.

냄새를 완전히 지우는 건 무리였다.

“누구랑 그렇게 술을 드신 거예요?”

“음… 직장 상사분들…?”

전수희의 얼굴이 약간 어두워졌다.

“직장 상사분들과 기나긴 회식 후 근처에서 숙박까지 하신 거예요?”

“그렇죠.”

“헌터청도 쉽지 않네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드는 전수희를 바라봤다.

전수희 입장에선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최리아와 밤새 술을 먹고 한방에서 자다니.

생각만 해도 불편함으로 몸이 굳어가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누가 쫓아오나요? 왜 이렇게 몸을….”

허리를 쭉 빼고 조수석 아래로 들어가 있어서일까.

전수희가 의아한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하하… 쫓아오는 건 아닌데 혹시나 해서요.”

자세를 고쳐잡으며 슬쩍 뒤를 돌아봤다.

라면을 끓이지 않고 도주한 죄로 비광이 추노할까봐 나도 모르게 몸을 숨겼었다.

“백운 님 잡히기 전에 얼른 출발해야겠네요.”

안경을 치켜올린 전수희가 차를 몰기 시작했다.

“고마워요. 수희 님. 갑자기 연락했는데 태워주셔서.”

“가는 길인데요 뭐! 어디에 내려드릴까요?”

“회사 앞에 내려주시면 돼요. 거기서부턴 지하철 타고 가면 되니까요.”

“알겠습니다!”

부드럽게 미끄러지는 차에 마음으로 평화가 찾아왔다.

새삼스레 깨닫게 되었다.

어제 탄 건 자동차라고 할 수 없었다.

자동차의 모습을 한 폭주 기관차였다.

“수희 님. 회사 분위기는 어때요? 대산 내부에 옥시나 조사실이 꾸려졌다고 하던데.”

“아 그거요. 겉으로 보면 아무렇지도 않은데 내부적으론 꽤 북적이고 있어요. 정부에서도 사람을 꽤 보내오기도 했고 대산은 대산 나름대로 보안을 늘렸으니까요.”

“술술 불고 있나요?”

전수희가 난처한 미소를 그렸다.

“끝까지 입을 다물 기세였는데 그때… 실장님이 등판하셨죠. 이후엔 순조로워요. 사라진 수색대 관련된 내용도 얼추 완성이 됐고요. 백운 님도 어느 정도 짐작하고 계신다고 들었는데… 역시 생존자는 없더라고요.”

“그렇군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제라도 진실을 알게 됐으니 다행이라고 마냥 말할 수 없는 이유였다.

“추가로 백운 님을 죽이려고 작전을 준비했다는 진술도 확보했어요. 관련된 러시아 인사들의 이름도 포함해서요. 정부에선 공식적으로 러시아에 항의할 예정이라고 해요.”

“오… 안 그래도 되는데 감사하네요. 그런데 러시아 쪽은 옥시나 돌려달라고 안 그러나 보네요. 벌써 하루 지났는데.”

“맞아요. 대산이랑 정부에서도 의아하게 여기는 부분이에요. 분명히 하루도 안 돼서 다시 데려오라고 난리 칠 줄 알았는데 엄청 잠잠하거든요.”

머릿속으로 모스크바를 뒤집어 놓겠다던 시라크가 떠올랐다.

아마 내부에선 한바탕 난리가 났을 터.

한국으로 팔려간 옥시나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런데 오늘은 어디 가세요? 전 태워달라고 하시길래 대산으로 가시는 줄 알았어요.”

“오늘 이사하는 날이거든요.”

“…!?”

전수희가 깜짝 놀란 눈으로 날 바라봤다.

“벌써 새로운 집 구하신 거예요? 엄청 빠르네요.”

“구했다고 해야 하나… 구해졌다고 해야 하나. 어쨌든 집이 생겨서 오늘 들어가려고요.”

“축하드려요! 이삿짐 같은 건 없나요? 제가 같이 옮겨 드릴게요!”

밝게 말하는 전수희에 웃픈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집이 통째로 없어졌는데 무슨 짐이 있겠어요.”

“아, 맞다. 하하… 깜빡했네.”

“오히려 잘됐어요. 이사하고 말 것도 없으니까.”

실제로 난 아무것도 없이 몸 하나만 가지고 새집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필요한 건 이제부터 채워 나갈 참이었다.

“그럼 서울 근처로 구하신 거예요? 요즘 집값이 장난 아니잖아요.”

약간 뜸을 들이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한강에 구했어요. 아크 라디스트라고….”

끼이이익!

“갸아아악!”

급브레이크를 밟은 전수희가 날 바라봤다.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얼굴이었다.

“아크 라디스트요…!? 그 한강 바로 앞에 있는?! 아침에 눈 떠서 커튼 걷으면 반짝이는 한강이 바로 보인다고 TV에서 광고하는 곳!?”

“광고하는지는 모르겠는데 어쨌든 한강은 바로 보여요.”

“우와…. 저런 곳엔 대체 누가 사는지 궁금했는데 백운 님이었군요!”

고개를 흔들던 전수희가 눈을 반짝였다.

“백운 님. 돈 많이 버셨군요! 역시 무기왕!!”

“그건 아니지만 하하….”

머리를 긁적이고 있자 두 손을 모은 전수희가 내게 다가왔다.

“나중에 한 번 초대해주시면 안 될까요? 부디 우매한 중생에게 한강뷰의 기회를!”

“당연히 되죠! 오고 싶을 때 아무 때나 오세요! 당장 오늘도 가능합니다.”

“오늘요!?”

가볍게 건넨 말이었는데.

의도와 달리 전수희의 두 눈이 뜨겁게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 * *

“고맙습니다!”

“그럼, 저녁에 봬요!”

손을 흔든 전수희가 빠르게 멀어져 갔다.

지각하면서까지 날 아파트 단지까지 데려다준 전수희.

오는 내내 전수희는 고개를 가만히 두지 못하고 아파트 단지 이곳저곳을 둘러봤었다.

끊임없이 감탄사를 내뱉은 건 물론이었다.

“예상은 했지만 엄청난 곳이었군.”

고개를 돌려 이제는 내 집인 아파트를 바라봤다.

겉에서 풍기는 분위기부터 다르긴 달랐다.

웅장한 것이 화려하면서도 과하지 않아 세련미가 돋보이는 초고급 아파트.

왠지 모르게 아파트 입구가 강하게 나의 출입을 거부하는 느낌이었다.

내 몸도 이곳은 네게 어울리는 집이 아니라며 거부감을 드러내는 중이었고 말이다.

“아니.”

거부감을 이겨내며 입구로 걸음을 내디뎠다.

“오늘로 소시민 백운은 끝이다.”

고개를 끄덕이며 강하게 다짐했다.

이제부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중소 시민 백운이 되기로 마음먹으면서였다.

“이참에 차도 한 대 뽑….”

삐빅.

입구를 지나고 있을 때 주차장에서 차 한 대가 빠져나왔다.

몇 시간을 댔는지는 모르겠지만 주차 비용이란 글자 옆엔 30만원이란 숫자가 찍혀있었다.

“응, 차는 필요 없어. 날아다니면 그만이야.”

자기합리화를 마치고 내 집을 찾아 서성거렸다.

단지가 워낙 넓어 동 찾기부터 문제였다.

“저기요! 선생님, 잠시만요!”

한참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가드로 보이는 남자 두 명이 달려왔다.

“무슨 일로 방문하셨나요?”

정중하게 물었지만, 남자들의 눈엔 짙은 경계가 깔려있었다.

네가 들어올 곳이 아니라는 노골적인 눈초리.

“오늘 이사하는 날이라서요. 여기 아크 라디스트로요.”

“실례지만 성함 좀 말씀해주실래요? 여기에 지문도 찍어주시고요.”

여전히 의심을 거두지 못한 남자에 시키는 대로 순순히 해주자.

“…!!”

잠시 후 검색을 마친 두 명의 눈이 커졌다.

“시, 실례했습니다! 로열층이신데 오늘 처음이라서 몰라뵀습니다!”

“하하…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혹시 어디로 가면 되나요?”

급 깍듯해진 가드 중 한 명이 손을 번쩍 들었다.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 * *

“죽이는구만.”

집으로 들어와 주변을 둘러봤다.

말 그대로 기가 막히는 집이었다.

이게 궁전인지 집인지 헷갈릴 정도.

내가 산 건 아무것도 없음에도 집엔 최신 가전기기와 킹사이즈 침대가 놓여 있었다.

옵션으로 모델 하우스와 똑같이 해달라고 한 류희수 덕분이었다.

누나라고 부르고 싶다.

나중에 맛있는 거 사줘야지 다짐하며 베란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와우.”

넓게 펼쳐진 한강과 그 위로 잘게 부서지는 햇살까지.

감탄이 절로 나오는 광경이었다.

아침마다 이걸 보며 일어날 수 있다니 행복할 따름이었다.

“아, 맞다.”

잠시 감탄하던 걸 멈추고 자리에 앉아 핸드폰을 꺼냈다.

전수희와 가볍게 얘기하던 중 급작스럽게 체결된 금일 집들이.

이왕 부르는 거 올 수 있는 사람들한테 문자를 돌릴 생각이었다.

“대산은 수희 님이 물어본다고 했고.”

물어본다고는 했지만, 옥시나 때문에 워낙 바쁜 대산이었다.

아무도 안 올 가능성이 훨씬 높았다.

“아직 주무시고 계실 분들한테도 보내고.”

헌터청의 세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워낙 바쁜 사람들이다 보니 무계획 당일 집들이에 오는 게 가능한가 싶었다.

“나… 친구 왜 이렇게 없냐…. 일단 한국에 있을 만한 사람한텐 다 보내자.”

‘외국 친구까지 하면 꽤 많은데….’란 자기합리화를 하며 부지런히 메시지를 보냈다.

“휴우.”

전송을 마치고 기지개를 켰다.

“그나저나.”

일단 메시지를 다 보내긴 했는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집들이 어떻게 하는 거지.”

옆통수로 땀 한줄기가 흘러내렸다.

생각해보니 집들이를 해보긴커녕 가본 적도 없었다.

회귀 전엔 반지하 자취방 아니면 유물관 골방에 살았다보니 집들이를 할 만한 환경이 아니었다.

회귀 후에도 첫 집은 청라였고 그마저도 뭔가 해보기 전에 홀라당 날아가 버렸고 말이다.

잠시 찾아온 패닉에 핸드폰을 내려다봤다.

“… 메시지 전송 다 취소 못 하나.”

숙취로 인한 판단 미스 같았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진 상황.

인터넷에 빠르게 집들이를 검색한 후 몸을 일으켰다.

검색 결과 집들이에서 가장 중요한 건 한 가지였다.

바로 먹는 것.

일단 배가 터질 때까지 먹을 맛있는 음식과 술이 필요했다.

호다닥!!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