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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왕이 헌터로 회귀했다-422화 (422/473)

422화. 눈을 가린 남자

너무 놀라면 비명도 안 나온다더니.

지금 내 상태가 딱 그랬다.

불이 밝혀지며 어둠 속에서 등장한 얼굴.

필사적으로 참지 않았다면 곧장 턱을 돌려버릴 뻔했다.

“누, 누구세요?”

간신히 심호흡하며 입을 열었다.

떨어질 뻔한 간 대신 심장이 매우 거칠게 요동치고 있었다.

“난 디안. 너는?”

아무렇지도 않게 이름을 밝히는 남자.

나도 고개를 끄덕이며 답을 했다.

“난 백운이야. 안 그래도 어두운데 눈은 왜 가리고 있는 거야?”

짧은 흑발을 가진 디안은 길고 검은 붕대로 눈을 가린 상태였다.

다만, 눈이 안 보이거나 하는 거 같진 않았다.

얼굴의 움직임이나 반응을 보면 앞이 훤히 보이는 사람 같았기 때문이다.

나이는 나랑 비슷하거나 조금 더 어려 보였다.

“굳이 눈으로 안 봐도 되니까?”

의미심장한 말에 조용히 디안을 바라봤다.

귀신이나 헛것은 아니였다.

놀란 심장을 가라앉히고 다시 보니 확실히 살아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왜 몰랐지.

비석에 정신이 팔려있긴 했지만, 디안이 바로 옆으로 다가와 불을 밝힐 때까지 조금의 기척도 느끼지 못했었다.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상황이라, 진지하게 귀신이 아닐까 생각했다.

“뭘 찾고 있었어? 열심히 더듬거리던데.”

“뭐랄까. 벽에 새겨진 글귀 같은 걸 찾고 있었어. 혹시 본 적 있어?”

“글귀라.”

묘한 미소를 지은 디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본 적 없는데. 애초에 내가 아는 한 여기 들어온 건 네가 처음이거든. 공간을 처음 만든 사람이 아니라면 글귀 같은 걸 남기지 못했을 거 같은데.”

“흐음.”

턱을 어루만지며 다시 비석을 돌아봤다.

회귀 전에 본 걸 잘못 기억하고 있을 리는 없었다.

몇백 년 전에 새겨진 거다 보니 내가 회귀한 이후 한 행동이 영향을 끼쳤을 리도 없고 말이다.

“볼일 끝났으면 나가자. 이제 곧 신도들이 기도하러 올 거거든.”

일단 고개를 끄덕이며 디안을 따라나섰다.

아래에서 기도를 마치면 신도들이 여기까지 올라오는 모양이었다.

“넌 여기서 뭐 하고 있던 거야?”

“난 항상 이곳에 있어. 돌아다니다 문이 열린 걸 보고 들어온 거지.”

“사원 지키는 무녀… 는 아니고 관리인 같은 건가?”

“뭐 그렇다고 볼 수 있지. 돈 받고 하는 건 아니지만.”

돈도 한 푼 안 받고 사원을 관리해주다니.

가업을 물려받은 게 아니라면 인도에도 열정페이가 있는 듯했다.

“이쪽으로 와.”

숨겨졌던 공간을 닫고 디안을 따라 사원의 2층으로 향했다.

어둑하면서도 아늑한 것이, 아래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장소였다.

일단 진이 가리키는 자리에 앉으며 조금 전 열었던 벽면을 바라봤다.

여러 가지 경우를 떠올리고 있자니 머리가 복잡했다.

새겨진 시기를 고려했을 때 오늘 이후로 누가 글귀를 새기는 것도 말이 안 됐다.

남은 경우는 글귀가 여전히 숨겨져 있고 어떠한 조건을 달성해야 드러나는 것이었다.

“왜 그렇게 인상을 쓰고 있어? 찾는 게 없어서 그래?”

디안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내 상식선에선 있어야 하는데 없거든. 어떻게 된 건지 잘 모르겠네.”

“그게 그렇게 중요한 거야?”

“약간 애매하긴 해.”

무기의 흔적이라면 내게 있어서 중요한 게 되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글귀는 내게 그리 큰 의미를 가지진 않았다.

역사적 의의는 있을지언정 말이다.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어.”

“응?”

“네가 찾는 글귀가 이곳에 있냐 없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저벅.

아리송한 디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래에 있던 신도들이 올라와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낮은 듯하면서도 굵은 기도 소리에 공간 자체가 웅웅 울리고 있었다.

바로 위에서 듣고 있음에도 뭐라고 하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저 사람들은 매일 이렇게…!?”

디안에게 물으려다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봤다.

뭐냐…?

찰나의 순간이지만 분명히 느껴졌었다.

얼마 전에 넘어갔었던 데몬의 세계.

그 세계 특유의 숨 막히는 공기와 서늘한 기운이었다.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진 상태였고 말이다.

고개를 돌려 아무렇지도 않게 앉아 있는 디안을 쳐다봤다.

조금 전 기운을 못 느낀 걸 수도 있었다.

하지만 뭐랄까.

본능적으로 알 것 같았다.

디안은 못 느낀 게 아니라, 느꼈음에도 개의치 않고 있다는 걸 말이다.

“저들은 어디를 향해 기도하고 있는 거야?”

“비샤카 신을 위해서. 정확히는 비샤카 신이 머무르는 곳을 향해서.”

머무르는 곳이란 말을 곱씹다 입을 열려는 순간.

공간을 울리던 기도 소리가 멈추었다.

그리고 디안이 먼저 입을 열었다.

“조심해라.”

“…?”

“네가 눈치챈 것처럼.”

디안의 입가로 묘한 미소가 그려졌다.

“저쪽에서도 널 눈치챘으니까.”

말이 끝나기 무섭게.

기도하던 이들의 고개가 일제히 내 쪽으로 돌려졌다.

허.

내게 쏠린 수백 개의 시선.

시선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바라보다 미소를 그렸다.

아무래도 이곳도 어딘가 뒤틀려 있는 모양이었다.

* * *

“담이 꽤 센 편이네. 아까 그 시선을 받고도 겁을 안 먹다니.”

“나 죽이려고 눈 뒤집혔던 놈들이 꽤 많았거든. 익숙하지.”

사원에서 벌어졌던 눈싸움은 얼마 가지 않아 끝이 났었다.

날 노려보던 신도들이 그대로 몸을 돌려 사원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마치 나와 같이 있으면 부정한 기운이 묻는 것처럼 서둘러 나갔던 신도들.

대체 뭐 하는 인간들인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먹어. 아까부터 꼬로록 거리던데.”

“오 감사.”

디안이 건넨 작은 꼬치와 차를 받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사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엔 작은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어두컴컴하고 약간의 향냄새가 밴 걸 보니 작은 사원으로 쓰던 걸 개조한 것 같았다.

절로 치면 불상이 있어야 할 것 같은 장소는 텅텅 비어있어 뭘 모시던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여기서 지내는 거야?”

같이 차를 홀짝이며 디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냉랭하지? 사람의 발길이 끊긴 지 오래됐거든. 뭐 한때는 꽤 많았지만.”

“신도 유행 같은 걸 타는 건가?”

“유행이라. 적절한 표현인데?”

한차례 웃음을 터뜨린 디안이 말을 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과거의 기억은 잊혀지고, 그 빈자리는 새로운 기억으로 채워지기 마련이니까. 누가 가장 최근에 빈자리를 채웠냐에 따라 모시고자 하는 신이 달라지기도 하지.”

“음… 사람들이 누굴 모시든 그건 자유지만 말이야.”

차를 홀짝이며 아까 본 신도들을 떠올렸다.

“그놈들은 뭔가 기도의 방향이 단단히 잘못된 거 같은 기분이거든.”

“그럴 수도 있지. 어쩌면 잘못된 걸 모시는 게 운명일 수도 있는 거고.”

차를 단숨에 들이켜고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여기 사람들이 어디다 기도하든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다만 그 결과가 데몬을 불러들이는 거라면 가만히 놔두고 싶진 않았다.

날 조용히 쳐다보던 디안이 입을 열었다.

“아까 데몬의 기운을 느꼈다고 했었지?”

“응.”

“안 무서워? 보통 사람들은 데몬을 두려워하잖아. 강한 힘을 가진 건 물론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을 죽이는 존재니까.”

디안의 물음에 어깨를 으쓱였다.

“나도 처음엔 두려워했지. 그런데 지금은 아니야. 지금은 뭐랄까. 두려움이 지워질 정도의 분노가 쌓였다고 해야 하나.”

회귀 전 무기력했던 내게 데몬은 여러 의미를 가진 존재였다.

두려운 건 당연하고 지긋지긋한 상실감과 무력함을 제대로 깨닫게 해준 존재.

이것들을 질리도록 느끼고 회귀한 지금, 데몬은 내게 있어 딱 한 가지 의미만을 가지고 있었다.

무조건 죽여야 하는 존재.

할 수만 있다면 그 씨를 말려 존재 자체를 깨끗하게 지워버리고 싶었다.

“보이면 무조건 죽인다… 내가 데몬을 보면 드는 생각이야.”

“만약 네가 이길 수 없을 정도로 강한 녀석이라면?”

“그래도 무조건 죽일 거야. 어떻게든. 지금까지도 그래왔거든.”

이쯤 되니 진지하게 묻던 디안이 미소를 그렸다.

“시원한 대답이네.”

고개를 끄덕이며 디안과 몇 마디 더 나누고 있을 때.

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최소 열 명 정도 되는 인기척이었다.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가자 그곳엔 아까 봤던 신도들이 서 있었다.

아까와 달리 모자를 벗은 채였다.

“아까 사원 2층에 계시던 분이죠?”

맨 앞에 선 사람은 나이가 지긋이 든 노인이었다.

노인은 세상 사람 좋은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기도 중이었던 터라 따로 인사를 못 건넨 게 마음에 걸려 찾아왔습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잠시 걸으시겠습니까?”

“그러시죠.”

정중한 부탁에 노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나머지 신도들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따라오는 중이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군요. 언제 이곳에 오신 겁니까?”

“오늘 왔어요. 행렬을 보고 여기까지 따라오게 됐고요.”

“그렇습니까? 이곳에선 흔히 볼 수 있는 일인데 외부인이라 신기하셨나 보군요.”

고개를 끄덕인 노인이 향한 곳은 사원이 위치한 곳보다 조금 더 높은 곳이었다.

올라오니 어느새 도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장소.

“보이십니까? 저희와 같은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노인의 말대로 곳곳에선 똑같은 복장을 한 신도들이 길게 줄지어 걸어가고 있었다.

대충 보이는 것만 해도 천 명은 거뜬히 넘을 것 같았다.

“도시에 비샤카 신을 모시는 분들이 정말 많은가 봐요.”

“그냥 많은 것이 아니라 절대다수라고 봐야겠죠. 아직 몇몇은 여전히 부정한 걸 믿고 있지만, 어쨌든 비샤카 신을 모시는 신도가 많다는 건 도시가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단 증거입니다.”

“올바른 방향요?”

거슬리는 말을 되뇌자 고개를 돌린 노인이 날 바라봤다.

“아니라고 생각하십니까?”

“전 신이나 그런 걸 잘 몰라서요. 궁금한 게 한 가지 있다면.”

나도 조용히 노인의 두 눈을 응시했다.

“여러분이 모시는 그 비샤카 신은 대체 어떤 존재이며 어디에 살고 계신 지거든요.”

“흐음… 그런가요.“

노인이 재밌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관광으로 오셨으니 금방 떠나시겠군요. 이곳은 딱히 볼만한 것도 없어 재미없는 도시니까요.”

“아뇨. 좀 오래 머무르려고요.”

“…?”

의아해하는 노인에 미소를 그렸다.

터무니없는 거짓말은 아니었다.

당장 글귀는 없어도 진시황이 다녀갔다고 예상되는 만큼 여기저기 돌아볼 예정이었다.

왠지 모르게 표정이 굳어진 노인에 다시 입을 열었다.

“왜 그러세요? 제가 빨리 갔으면 하는 것처럼.”

“… 하하하하!”

잠시 후 노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지워졌다.

“시건방진 애송이 같으니라고. 잘못 느낀 게 아니었어. 부정함을 제대로 타고났군.”

얼굴이 굳어진 노인과 반대로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나도 제대로 본 모양이야. 금세 태도 바꾸는 꼬라지 보니까 멀쩡한 인간 같진 않네. 멀쩡하지 않은 인간이 믿는 것도 정상은 아닐 거 같고.”

“이거 참… 경고를 해줘도 못 알아먹는 망나니라니 슬플 따름이구만. 마지막으로 경고 하나 하지.”

노인이 무서운 눈으로 날 노려봤다.

“그 부정하고 얄팍한 목숨이나마 유지하고 싶다면 당장 꺼지시게나. 신께서 네가 여기에 있는 걸 허락하지 않으셨으니까.”

제 할 말을 마친 노인이 빙글 몸을 돌렸다.

그런 노인의 뒤통수로 말을 건넸다.

“노인네.”

“…?”

“나도 경고 하나 할게.”

걸음을 옮겨 나보다 작은 키의 노인을 내려다보며.

“만약 아까 사원에서 내가 잘못 느낀 게 아니라면.”

손을 올려 엄지손가락으로 노인의 목을 가리켰다.

“각오해야 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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