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3화. 잘못된 방향
언덕에서 내려오자 디안이 반가운 미소를 그렸다.
“두들겨 맞고 올 줄 알았는데 아니네.”
“두들겨 맞다니. 때려도 내가 때리지.”
노인과 신도들이 떠나간 방향을 바라봤다.
마음 같아선 당장 두들기고 싶었지만, 지금은 딱히 증거라고 할만한 게 없었다.
회귀 전 글귀가 발견되는 1년 후까지 이곳엔 별일이 없을 예정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래서 이제 어디로 가게? 찾던 건 여기에 없다면서.”
“다른 단서라도 있나 도시 여기저기 좀 둘러보게. 디안, 넌 혹시 진시황이라고 들어본 적 있어?”
“당연히 들어봤지.”
약간 벙찐 얼굴로 디안을 바라봤다.
사실 별 기대 안 하고 물어본 건데 당연한 걸 묻냐는 듯 고개를 끄덕였기 때문이다.
“불사를 확인하기 위해 머나먼 이 땅까지 도달한 다른 나라의 황제. 맞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자 디안이 미소를 지었다.
“비샤카파트남에 사는 사람 중에 진시황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야. 관련된 이야기도 워낙 여기저기에 기록이 많이 되어있으니까.”
“오…! 어디로 가야 그 기록들을 볼 수 있어?”
“딱히 기록이 모여있는 장소가 있는 건 아니야. 여러 군데에 흩어져 있거든. 그래도 마을을 돌아다니다 보면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을 거야.”
찾아봐야지 하면서도 약간 막막하던 찰나였는데.
마음으로 한 줄기 희망의 빛이 드리워지는 순간이었다.
당장 가서 살펴볼 생각으로 디안에게 말을 건넸다.
“관련된 것도 살펴볼 겸 밥 먹으러 갈 건데 같이 갈래?”
그리고는 가게에서 뺏어온 돈을 꺼내 보였다.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
“고맙지만 난 해야 할 일이 좀 있어서. 나중에 갈게.”
“그럼 너 올 거 대비해서 배 좀 남겨놓을게. 어떻게 만나지? 혹시 핸드폰 있어?”
날 잠시 응시하던 디안이 입가로 미소를 그렸다.
“걱정하지 마. 내가 찾아갈 테니까. 내려가서 먼저 살펴보고 있으라고.”
알아서 찾아온다니.
워낙 자신감 넘치게 말하는 터라 어떻게? 라고 묻진 않았다.
대신 디안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못 만나게 된다면 내일쯤 내가 다시 이곳으로 오면 그만이었다.
“그럼, 먼저 내려갈게. 조금 이따 보자고.”
손을 흔드는 디안을 뒤로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출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인도 전통 음식 있습니다! 이쪽으로 오세요!”
“잘 구워진 탄두리 치킨입니다! 여기서 드셔보세요!”
여기도 저녁 시간 되니까 활발하네.
천천히 거닐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디안이 말했던 대로 진시황에 관련된 무언가가 있을까 싶어서였다.
그런데 왜 없냐.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딱히 이렇다 할 만한 게 보이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곳곳에 벽화나 기록이 새겨진 비석 같은 게 있긴 했지만 전부 비샤카 신에 관한 내용이었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진시황에 관련된 건 찾아볼 수가 없었다.
설마 거짓말…?
약간 미간을 찌푸린 채 사원 쪽을 돌아봤다.
사실 등장 순간부터 차림새까지 수상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닌 녀석이었다.
처음 만난 만큼 대충 진시황이란 이름에 맞장구쳐주고 도주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우와… 여행 오신 건가요?”
디안이 양치기 소년일 가능성을 점치고 있을 때.
옆으로 다가온 정장 차림의 무리가 말을 걸어왔다.
어디 또 다른 신을 모시는 사람들인가 했지만, 목에 걸린 명찰을 보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인도 헌터청 7급 헌터.
내게 말을 건 여자의 목걸이에 적힌 내용이었다.
“안녕하세요. 관광 왔고, 오늘 도착했어요.”
“그렇군요, 신기하네요! 여기서 일주일 넘게 있었지만 관광객은 처음이거든요. 전 아시나예요!”
“릭신입니다.”
“라샤드예요.”
7급 헌터 세 명으로 이루어진 팀.
아시나에 이어 함께 있던 두 명도 반가운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비샤카파트남에서 흔치 않은 외국인이라 마냥 신기한 모양이었다.
“혼자 오신 건가요?”
고개를 끄덕이자 왜요? 라는 표정을 짓는 아시나.
그런 아시나에게 시무룩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같이 올 친구가 없어서요.”
“하하… 그, 그렇군요. 지금은 뭐 하고 계셨어요?”
“마을을 둘러보던 중이었어요. 제가 진시황에 관심이 많은데 도시 곳곳에 관련된 기록이 있을 거라고 해서요.”
“진시황요?”
고개를 갸웃거리던 아시나가 릭신과 라샤드를 쳐다봤다.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흔드는 릭신과 라샤드.
날 쳐다보던 아시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누가 여기에 있다고 말해준 건가요? 이곳에, 진시황에 관련된 게 있다고요? 진시황은 워낙 유명한 황제다 보니 이름은 들어봤지만, 비샤카파트남이랑 연관이 있다는 이야기는 처음 듣는 거라서요. 아 물론, 저희는 비샤카파트남 출신이 아니긴 하지만요.”
오도독 입술을 깨물었다.
사실, 오는 길에도 틈틈이 상점 주인들에게 물어봤었다.
진시황에 대한 걸 보고 싶은데 어디로 가야 하냐고 말이다.
그때마다 상인들은 고개를 저었었다.
기록은 고사하고 진시황이 누군지도 모르는 눈치였다.
역시 양치기 소년이었나.
콧김을 내뿜으며 이마를 짚고 있자 난처하게 웃던 아시나가 한쪽을 가리켰다.
“저희는 식사도 할 겸 알아볼 게 좀 있어서 비샤카파트남에서 가장 오래된 식당에 가려던 참이거든요. 그… 혹시 성함이?”
“백운이에요.”
“괜찮으면 백운 님도 같이 가실래요? 주인 할아버지 나이가 꽤 많으셔서 비샤카파트남 역사의 산증인이라고 불리시거든요.”
잠시 사원 쪽과 아시나를 번갈아 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죠!”
“그럼, 이쪽으로!”
세 사람을 따라 도시의 구석진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양치기 소년에게 나한테 왜 그랬어!? 라고 묻는 건 내일 해도 늦지 않았다.
일단은 뭐라도 하나 얻어걸리길 바라며 가볼 생각이었다.
어느 정도 걷자 정말 오래되어 보이는 가게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제대로 된 보수도 안된 건지 지금 당장 무너져도 이상할 게 없어 보이는 모습.
드륵.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안쪽에 앉아 있던 할아버지가 몸을 일으켰다.
긴 머리와 눈썹이 새하얗게 센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지팡이를 짚은 채 문을 가리켰다.
“어서 오게. 문 떨어지니까 살살 닫….”
툭.
할아버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낡은 문은 바로 분리되어 현재는 내 손에 들려있었다.
살살 안 닫은 건 아니었다.
단지 문이 너무 약했고 하필 내가 마지막일 뿐이었다.
“당황하지 말고 거기 살포시 내려놔. 하루에 10번씩은 떨어지니까.”
“예, 옙.”
깃털처럼 문을 내려놓고 할아버지가 안내하는 구석 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뭔가 느낌 있는 가게네.
걸어가며 가게를 둘러봤다.
어디 유적지에다 가게를 만든 건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가게는 벽과 천장, 바닥 할 것 없이 온통 벽화로 가득했다.
“메뉴는 탄두리랑 카레뿐이니 그걸 먹게.”
고개를 끄덕이자 할아버지가 바로 옆에 놓인 오픈형 주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주방도 마찬가지로 다양한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벽화는 직접 새기신 건가요?”
“그럴 리가. 이 늙은이가 무슨 재주가 있다고 이런 벽화를 새겼겠나. 새겨진 곳에 가게 터를 잡은 거지.”
진짜 유적지에다 만드신 건가.
이래도 되나 하는 생각은 잠시 집어넣고 다음 질문을 건넸다.
“할아버지. 혹시 진시황이란 이름을 아시나요? 아주 먼 나라의 황제지만 아주 오래전에 이곳을 방문했다고 알려져 있어서요.”
“진시황?”
잠시 앓는 소리와 함께 고개를 갸웃거리는 할아버지.
이젠 익숙해져 버린 반응을 보니 아직 대답을 듣기 전임에도 딱히 기대가 되진 않았다.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군. 내가 워낙 무식해서 말이야. 허허허!”
가게에 새겨진 벽화가 누구에 관한 이야기인지는 딱히 물어보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다만 먼 나라에서 온 이라면 비샤카 신이 있지.”
“넵?“
“황제였는지 뭐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비샤카 신도 먼 나라에서 이곳까지 온 존재이니까.”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비샤카파트남의 많은 이가 숭배하는 신인 비샤카.
당연히 힌두교의 신들과 비슷한 신이라고 생각했었다.
“음식이 준비되는 동안 벽화 구경이나 하게. 모두 비샤카 신에 관련된 거니까.”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벽을 둘러봤다.
옆에선 함께 온 세 사람이 할아버지가 한 말을 들어본 적 있냐고 서로에게 묻고 있었다.
모두가 비샤카 신이 먼 나라에서 왔다는 건 처음 듣는 얘기라며 고개를 내저었고 말이다.
이게 첫 등장인가.
벽화 중 한쪽엔 차림새가 다른 남자가 한 명 서 있었다.
이곳 사람들로 보이는 반대편 이들은 꼿꼿이 선 채로 이방인을 경계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경계는 그리 오래가지 않은 듯했다.
벽화를 따라갈수록 서서히 사람들의 몸이 낮아졌고 마지막엔 모두가 이방인을 향해 절을 하고 있었다.
중간중간 벽화엔 이방인인 남자가 쏟아지는 괴물을 물리치고 재해를 막는 등의 활약이 표현되었다.
“자 다 되었으니 먹게. 그런데 자네들은 전부 처음 보는 얼굴이구만. 뭐 벽화 구경 중인 친구는 관광 온 거 같고. 나머지는 이 구석진 도시까지 무슨 일로 온 겐가?”
서로의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릭신이 입을 열었다.
“실종 사건을 조사하고 있습니다. 익명의 제보자로부터 신고가 접수됐거든요. 자기 친구들이 한두 명씩 사라지는 중이라고요.”
치킨을 우물거리며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정작 비샤카파트남에선 접수된 신고가 하나도 없다 보니 본청에선 장난 신고일 거라고 했지만.”
릭신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희가 봤을 땐 절대 장난으로 한 신고 같지는 않아서요. 같은 기수끼리 뜻을 모아 간신히 오게 되었습니다. 아득바득 우겨서요. 아마 돌아가면 엄청 욕먹고 혼나겠죠.”
“그래서 찾은 건 좀 있고?”
물어오는 할아버지에 릭신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 아이가 사라졌다는 집을 하나도 찾지 못했어요. 여기저기 묻고 다니는데도 전부 처음 듣는다는 말뿐이고요.”
“하지만 뭐랄까… 뭔가 알고 있으면서도 말하지 않는 느낌이었어요. 무언가를 무서워하는 거 같기도 했고요. 그래서 여기까지 오게 된 거예요. 여기서 가장 오래 지내신 할아버지는 뭔가 들으신 게 없나 해서요.”
“아쉽지만 나도 딱히 들은 건 없네.”
묘한 미소를 지은 할아버지가 가게를 둘러봤다.
“봤다시피 내 가게는 도시에서도 아주 구석, 사람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는 곳에 있지. 그건 이곳에서 소외되어 있다는 의미야. 도시에 무슨 일이 생기든 내 가게까지 와 말해 줄 사람은 없단 이야길세.”
아시나를 포함한 세 사람이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침묵이 이어지며 서로 입으로 치킨과 카레만 밀어 넣기 시작하고.
타이밍을 재다 마침 눈이 마주친 할아버지에 입을 열었다.
“가게에 비샤카 신의 벽화가 많다는 건 할아버지도 비샤카 신을 믿으시는 건가요?”
“믿고말고. 숭배한다고 보는 게 맞겠지.”
“그럼 혹시… 할아버지도 매일 아침 망토를 두르고 기도를 가시나요?”
이번엔 할아버지가 고개를 흔들었다.
“난 가지 않아.”
그리고 약간 화가 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들은 잘못된 신을 섬기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