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7화. 사라진 글귀는
오른손으로 빛의 창이 생겨났다.
펄럭이는 깃발과 함께 사방으로 뿌려지는 황금빛.
생카트나를 든 채 곧장 하늘로 솟아올랐다.
집회장으로 쓰이던 지하실은 이미 나와 셀베스의 전투로 지상까지 뚫린 상태였다.
스아아악!
날 쫓아 셀베스의 그림자가 뿌려졌지만 굳이 방어할 필요는 없었다.
예상했던대로 셀베스의 그림자는 생카트나의 빛을 뚫지 못했다.
아래에 있는 셀베스를 노려보다 생카트나를 뒤로 젖혔다.
“…!?”
미리 봐뒀던 장소로 생카트나를 던져냈다.
그대로 날아가 꽂히며 사방으로 빛을 뿌려내는 생카트나.
찬란한 빛에 잠시 움찔거렸던 셀베스가 내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힘이 다한 건가? 어디다 던지는 거지? 난 여기에 있는데.”
“너한테 던진 거 아니야. 이 새끼야.”
“…?”
생카트나가 꽂힌 곳은 셀베스가 서 있던 곳과 작게 열린 균열 사이였다.
생카트나와 셀베스 사이엔 부서지다 만 벽 하나뿐이었고 말이다.
셀베스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고개를 내린 순간.
그때를 놓치지 않고 셀베스 쪽으로 몸을 날렸다.
생카트나의 빛으로 셀베스와 이어진 그림자는 벽의 그림자 하나뿐이었다.
“이제 어디까지 피할 수 있냐?”
셀베스의 얼굴로 면도칼을 휘둘렀다.
마찬가지로 셀베스가 몸을 피했지만, 예상대로였다.
아까 같았으면 더 멀리 이동했을 셀베스지만 지금은 딱 벽의 그림자가 걸치는 부분까지만 이동해 있었다.
더불어 한 가지가 사라져 있었다.
나타났을 때부터 조금 전까지 넘치던 셀베스의 여유로움이 말이다.
“일부러 그림자를 끊으려고…!”
“딩동댕.”
셀베스한테 냅다 생카트나를 꽂아버릴까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안될 것 같았다.
중심에 깃발이 꽂힌다고 해도 셀베스는 범위 밖에 있는 그림자로 물러나면 그만이었다.
대신 놈을 고립시키기로 했다.
지금 반응을 보니 성공한 모양이었고 말이다.
“이제 도망칠 수 있는 범위가 이거뿐이란 거지.”
“달라지는 건 없다!!”
쏘아지는 그림자를 피해내며 셀베스의 바로 앞까지 이동했다.
“달라지는 게 왜 없어.”
[라 - 불꽃의 문양]
“다 태워버릴 건데.”
그림자에 손을 디디며.
문양에서 새어 나온 불꽃을 터뜨렸다.
그림자를 타고 순식간에 번져 나가는 라의 불꽃.
남은 그림자를 다 집어삼키고도 충분한 불꽃이었다.
“크아아아아아아악!”
불꽃이 마지막 남은 그림자를 집어삼켰을 때.
셀베스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더 이상 그림자에 숨지 못한 셀베스의 본체가 밖으로 끄집어내 졌다.
처음 봤던 것보다 훨씬 거대한 덩치로 그림자는 불안정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가, 감히 너 따위가!!!!”
셀베스가 포효하며 팔을 휘둘렀지만 그뿐이었다.
불꽃을 뚫어내지 못하고 그대로 소멸해버리는 그림자.
셀베스의 본체도 그림자가 흩어지며 서서히 작아지고 있었다.
“말했었지. 그 여유 없애준다고.”
바로 앞까지 걸어가 타들어가는 셀베스를 응시했다.
분한지 한참을 발악하던 셀베스가 쿵 소리를 내며 무릎을 꿇었다.
더 이상 방법이 없다는 걸 깨닫고 포기한 모양이었다.
그런 셀베스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네가 모시는 그 신이란 거 뭐냐.”
“신이란 거라… 역시 오만하구나. 네놈은.”
“뒤져가면서 아직도 그런 소리를 하네.”
“넌 그분에게 닿을 수 없다.”
이제 한계인지 셀베스의 몸이 불꽃과 함께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분의 곁엔 죽지 않는 불사의 검이 있으니… 넌 절대….”
어느새 무너져 내린 몸과 함께 셀베스의 마지막 말이 공기로 흩어졌다.
“닿을 수… 없다.”
“쯧.”
완전히 사라진 셀베스에 혀를 찼다.
뭐라도 좀 알아내고 싶었는데 닿을 수 없다는 말만 남기고 사라진 데몬 자식.
처음부터 도움이라곤 하나도 안되는 놈이었다.
“죽지 않는 불사의 검이라. 사도란 게 더 있는 건가.”
열려있던 균열은 어느새 닫혀 있었다.
애초에 크게 열리지 않았던 터라 금방 사라진 것 같았다.
“사원도 다 박살났고.”
미간을 찌푸렸다.
노인이랑 신도들을 처리하고 천천히 둘러볼 생각이었는데 아주 산산조각이 나버리고 말았다.
“끄… 끄으.”
“응?”
신음 소리가 나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셀베스와 나의 전투로 주변이 엉망이 되며 바닥을 뒹굴던 신도들도 휘말려 들었었다.
다 죽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런 난장판 속에서도 운 좋게 목숨이 붙은 놈이 있었다.
“사, 살려줘…!”
다가가기 무섭게 신도가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신도는 그 와중에도 찢어진 옷으로 어찌저찌 잘린 발을 지혈한 상태였다.
“살려줘! 죽을 거 같아!”
처절하게 울부짖는 신도를 잠시 내려다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살려 줄 테니까 묻는 거에 대답해.”
“제발…! 먼저 치료받게 해줘!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
“그럴수록 시간만 길어져. 너네 여기서 무슨 짓을 하고 있었던 거냐?”
바로 구해주지 않을 거란 걸 깨달은 건지 신도가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분이 넘어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분은 뭐고 어떻게 넘어오는데?”
“비샤카 신이시다. 어떻게 인지는 우리도 자세히 알진 못한다. 그저 신도가 늘어날수록, 바치는 제물이 늘수록 균열이 점점 크기를 키워갔었다. 균열이 충분히 커지면 그분이 넘어올 거라고만 들었고. 그게 전부야! 정말이다! 균열이란 것도 정말 열릴지 몰랐었다!”
악귀참도를 찾으러 갈 때 사용했던 척사율의 검부터 몽골에서 러시아가 벌인 폭발, 그리고 비샤카파트남의 신도들까지.
데몬의 세계로 향하는 균열을 여는 방법은 한두 가지가 아닌 것 같았다.
“처음부터 균열이 열리진 않았다는 소리네? 아까 그 사도란 새끼도 없었고.”
눈물범벅이 된 신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신도가 모이며 균열이 어느 정도 문의 형태를 갖췄을 때였다고 한다.
자신을 신의 사도라고 부르며 셀베스가 나타난 것은 말이다.
“그럼 너네한테 신도 모으고 기도하라고 한 건 누구야? 시작이 있었을 거 아니야.”
“모, 목소리가 들렸어! 비샤카 신의 목소리가! 그리고 형상이 보였다. 과거 비샤카 신이 한 업적들을 그대로 재연했었어! 또 신께서 말씀하셨다! 자신의 말을 따르면 사도가 나타나 힘을 나눠 줄 거라고!”
안 그래도 인도는 자신이 모시는 신에 대한 숭배가 엄청난 곳이었다.
이곳에서 가장 유명한 비샤카 신이라고 자칭하며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형상까지 보여줬다면 충분히 속아 넘어가고도 남을 터였다.
저 너머에 있을 데몬의 세계에서 어떻게 이곳까지 영향을 끼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애들은 왜 갖다 바쳤어? 어디로 간 거고?”
“그, 그건 몰라. 누군가에게 벌을 줘야 한다며 데몬의 세계로 데리고 들어갔어.”
“그래?”
“정말이야! 내가 아는 건 이게 전부다! 다 말해줬으니까 이제 날 데리고 나가줘!”
울부짖는 신도를 내려다보다 몸을 일으켰다.
“내가 널 왜 살려줘야 하는데?”
“뭐… 뭐? 약속했잖아! 얘기하면 살려준다고!”
“너 같은 새끼랑 하는 약속은 1분 뒤에 깨려고 하는 거야.”
“이 사탄 새끼가!!”
“사탄은 너지 쌍놈의 새끼야. 결국 발목이나 잘리고 끝날 힘 따위를 얻자고,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애들을 데몬한테 갖다 바친 새끼가.”
“신의 말씀을 거역한 자 천벌을 받을지어다! 신이시여! 여기 사탄의 자식이 있습니다! 이 자의 목숨을 거두어 가십시오!”
갑자기 기도를 시작하는 신도에 한숨을 내쉬었다.
“열심히 기도해 봐. 혹시 알아?”
우드득.
발을 뻗어 신도의 두 팔을 박살냈다.
“끄아아아아악!”
발목에 열심히 지혈해 놓은 천도 풀어다 저 멀리로 던져버렸다.
기다렸다는 듯이 붉은 선혈이 뿜어졌다.
“그 위대한 신이 살려줄지. 그럼 바이바이.”
손을 휘적이며.
“이 사탄 새끼야!!!”
울부짖는 신도를 뒤로하고 건물을 빠져나갔다.
* * *
“하아.”
건물을 빠져나와 언덕에 서 있자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싸이비 신도들과 신이라 불리는 데몬 새끼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대충 알게 되었다.
다만 내가 궁극적으로 찾고자 하는 진시황에 관련된 건 제자리걸음이었다.
풀썩.
언덕 위로 몸을 눕히고 대자로 팔과 다리를 쭉 뻗었다.
오랜만에 열심히 움직이며 싸운 탓인지 노곤함이 몰려오고 있었다.
약간이지만 여기저기 난 상처도 좀 쓰렸고 말이다.
솔직히 말해 좀 놀랐었다.
의외의 장소에서 조우한 예상치 못한 적.
그림자에 숨는 특징을 알아내 어떻게 잡긴 했지만 보통 데몬이 아닌 것만큼은 확실했다.
만약 주어진 환경이 셀베스에게 유리했다면 훨씬 더 힘든 싸움이 될 수도 있었다.
“불사의 검이란 새끼는 또 뭐 하는 놈이려나.”
그래서였다.
셀베스가 사라지기 전에 한 말이 머리에 남은 건 말이다.
눈앞엔 빼곡한 별과 은하수가 펼쳐져 있음에도 마음 편히 감상할 수 없는 이유기도 했다.
“에라이 그때 가서 죽이면 되지. 일단 한숨 잘까.”
다른 사원으로 가기 전에 한숨 때리려는 찰나.
“저 너머엔 대체 뭐가 있는 거… 갸아아아악!”
시야로 얼굴 하나가 불쑥 나타났다.
“이런 곳에 누워있었네. 만날 때마다 소리 지르는 건 여전하고.”
낮에 간 사원에서 만났던 양치기 소년 디안.
처음과 마찬가지로 약간의 기척도 없이 나타난 디안에 벌떡 몸을 일으켰다.
“어, 언제 왔어!?”
“지금.”
“어디서?!”
“언덕 위니까 밑에서?”
더 묻는 건 별로 영양가가 없을 거 같아 입을 다물었다.
이쯤되니 정말 사람인지 귀신인지 헷갈리고 있었다.
내가 여기에 있는 건 또 어떻게 알고 온 건지도 의문이었다.
“진시황에 관련된 건 좀 찾아봤어?”
디안의 물음에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과거의 비샤카 신은… 진시황이다.”
정답이라는 뜻일까.
디안의 입가로 묘한 미소가 그려졌다.
그런 디안을 잠시 바라보다 말을 이었다.
“이곳 사람들은 아무도 진시황이란 이름을 몰랐어. 넌 언제부터, 어떻게 알았던 거야?”
언덕 위로 잔잔한 바람이 불어왔다.
눈에 묶은 붕대를 흩날리며 날 조용히 응시하는 디안.
디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기다리고 있었다.”
주변의 공기가 변했다.
정확히는 디안을 감싸고 있던 분위기였다.
순식간에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너 누구야?”
본능적으로 떠오르는 질문을 건넸다.
잠시 아무 말 없던 디안이 천천히 눈을 묶고 있던 붕대를 풀었다.
“…!”
있어야 할 곳에 눈은 존재하지 않았다.
대신 기괴한 문양이 새겨져 있을 뿐이었다.
“널 찾아오는데 눈은 필요 없었다. 여기까진 내가 본 미래였으니.”
“네가 본 미래…?”
“그저 기다리고 있었다. 네가 찾아올 걸 알았으니까.”
알 수 없는 말뿐이었다.
말을 곱씹으며 조용히 바라보고 있자 디안이 허공으로 손을 뻗었다.
디안의 손가락 끝에서 새어 나오는 황금빛이 글씨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글씨가 완성되었을 때.
나도 모르게 소리를 내어 그 글귀를 따라 읽었다.
“불사를 찾기 위해… 이곳으로 왔다.”